2011-05-18
예술의 본질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이것이다. 아니다, 저것이다……. 하지만 글쎄. 왜 다들 본질은 하나라고만 생각하는 걸까. 사람도 앞모습 옆모습이 다른 법인데, 예술의 본질은 하나라고 생각하는 발상부터가 잘못된 거다. 그것은 얼마든지 여러 개일 수 있다. 이건 물론 이것도 답이고 저것도 답이라고 말하는, 물에 물 타고 술에 술 섞기 딱 좋은 소리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중 확실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나마 그거라도 찾은 것이 바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수많은 선배 화가들을 통해 파악해 낸 우리의 예술적 소득 가운데 하나이다.
글 | 남대남 일러스트라이터( statchs@hotmail.com)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정중동 동중정(靜中動 動中靜),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고 능동 가운데 수동이 있다는 이 말은 무협소설을 30분만 들여다보면 찾아볼 수 있는 말이다. 무술의 도리를 가리키는 말로 등장하며 보통 절대고수의 손가락질 하나에 산천초목이 벌벌 떨 때 쓰이는 말이지만, 기실 이것은 불경 속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나 중용의 이치에도 선을 살짝 대고 있는 말로써 동양에서 추구하던 정신문화의 정수 중 하나이다.
이 문화가 그림으로서 발현된 것이 바로 동양화, 극단적인 파동 속에서 고요함을 드러내다가도 그 정적 속에서의 격렬한 진동을 묘사해 낼 수 있는 특징을 가진 위대하면서도 심원한 스타일인 것이다. 그런데 일러스트레이터 홍원표는 왜 이 심오한 그림의 세계를 벗어났을까. 아니, 정말 벗어 던진 것이 맞을까?
일러스트레이터 홍원표의 세계는 복잡하고, 장난스럽게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제 멋대로 휘어져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극단적인 현대적 디자인의 파격에 걸맞게 역시 제 멋대로 생긴 상태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삐죽삐죽한 세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기묘한 질서를 구현시킨다. 어딘가 혼잡스럽지만 통일적이고, 정신 없지만 정연하며, 어른이 그린 것 같다가도 아이가 끼적거린 낙서 같은 이 세계가 바로 홍원표가 수묵담채의 그윽함을 물리고 안착한 세계이다.
홍원표는 바로 이 세계, 질서 속에 변화가 있고 변화 속에서 질서를 바라보는 세상을 자신의 내면으로 본 것인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동양화의 궁극적 추구 가치인 정중동과 홍원표가 구현해 낸 혼잡 속의 질서는 스타일로서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보이지만, 이론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어? 길을 돌아 온 것 같은데 사실은 지름길로 왔다?
물론 결과는 그렇게 되었지만, 그림을 그려나가며 사는 길이 상징하듯이 사람의 삶에 지름길이란 없는 법이다. 홍원표는 동양화에서 요구하는 인고의 깨달음을 기다리지 않고 나름의 방향을 모색하며 길을 돌아가 동양화의 극단에서 요구하는 이론적인 묘사를 드러내었고, 여기서 이론적인 예술의 한계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가 실제로 극단을 묘사해 냈다면 난 지금 이 글을 쓰기는커녕 단지 한번 보는 것만으로 그의 세계에 끌려들어가 정신 없이 그림 세계에서 노닐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적지 않은 명인들은 내게 자신을 열어주는 척 하면서 스스로의 내공으로 압도하여 나에게 감히 펜을 놀릴 수 없을 정도의 감성 마비를 자행하곤 했다.
그러나 홍원표는 아니다.
그것은 그의 그림이 기본 골자만 동양화의 그것을 가져왔을 뿐 해당 이론을 형상화시키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내적인 깨달음을 가져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설마 작가 홍원표가 그것을 몰랐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홍원표는 그러한 핸디캡을 안고서라도 불구하고 이 지름길 아닌 지름길을 달려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까지 생각한다면, 그가 동양화를 버리고 이러한 세계로 이사 온 것은 훌륭한 선택이다. 동양화에는 그가 삽입하고자 했던 천진스러운 해학을 집어넣을 구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이러한 행보가 편안했던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을 것이 뻔하고, 수년간 고련하여 익혔던 세계를 자기 스스로 떠나는 것은 무모한 자학처럼 느껴져 공포를 가져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러한 공포는 전혀 그림에 드러나 있지 않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그건 홍원표의 동양화가 새로운 세계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세계의 지반을 떠받드는 지축 구실을 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홍원표의 새로운 세계와 기존의 동양화 사이에는 대단히 큰 일치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선의 존재다. 홍원표는 동양화의 세상에서 자신의 디자인 스타일의 작품에 실상 꽤 많은 것들을 들고 왔지만,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동양화의 핵심을 이루는 것. 즉 묵의 농담에서 발현하는 한없이 깊고도 묵중한 맛을 포기했다.
단지 여백을 활용하는 선화적 특징만을 디자인 스타일에 가져왔는데,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고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는 법. 그는 육중함을 포기하는 대신 한없이 가벼운 장난기로 표현되는 능동성을 얻어내었다. 쉽게 말하자면 홍원표는 디자인 식으로 동양화를 꾸며나가는 중인 것이다.
그러나 역시 두려운 것은 두려운 것. 스스로 잘 하는 건지 그렇지 않은 건 지, 일각이 아쉬운 평생에서 혹시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건 아닌지에 대한 끝없는 자문들, 그리고 그러한 소리들을 극복하기 위해 찾아 헤맸던 그의 노력은 그가 적었던 온라인 다이어리에 명사들의 한마디로 고스란히 남았다.
스스로가 자신을 의심하면 최선을 다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면 누가 믿어주겠는가. 일단 작업에 들어가면 나는 항상 자신을 가진다. 계획을 착수할 때는 그것을 100% 믿는다.
– 마이클잭슨
" 이봐, 해봤어? "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것이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주영
TV는 현실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커피를 마셨으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옳다.
- 빌 게이츠
예술가가 끊임없이 이러한 주문들을 되새기면서 스스로를 돌이켜, 우스울 정도의 바보짓일 수도 있는 길을 우두커니 걸어갈 수 있는 것은 단 오로지 하나의 아군 덕분이다. 스스로가 경망스럽고, 충동적이며, 무책임할 정도로 뒤를 돌아보지 않지만 의외로 나약하고, 허영심은 많아 자신을 과대포장하려 드는 등 이 모든 모습을 마치 자신과 별 상관없는 타인의 모습인 양 우두커니 지켜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단 하나의 아군.
렘브란트가 평생을 바쳐 찾아왔던 그 자기 해석법의 정석을 우리는 '응시'라 부른다.
이 네덜란드의 거장은 평생 수십 점에 달하는 자화상을 남겼는데 그 덕분에 우리는 이 대화가의 눈을 통해 그의 인생을 시리즈로 응시할 수 있다.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든, 광풍이 몰아치는 언덕에서든. 낙원이 지속되는 해안에서든, 태초의 정적이 감도는 에덴동산에서든 예술가는 이 응시하는 자세를 지켜나가야 한다.
그것은 냉혹한 것이다. 거기엔 그 어떤 자기 정당화나 자위가 위치할 구석이 없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파악하고,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볼 수밖에 없다. 오로지 진실만을 찾아내는 안목과 자세. 뇌가 분비하는 자기정당화의 모든 노력을 배제한 채 스스로가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은 마치 칼로 베이는 아픔이지만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진실이 그것이라면, 목적을 찾아 가는데 있어 정확한 시작점은 바로 거기부터이기 때문이다.
한 번도 어려운 일을 시간날 때마다 하는 것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만 다행히도 사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저 응시를 한 번이라도 성공한 예술가는 나름의 진실 보기 스킬을 보유하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그 다음부터 실행하는 자아 찾기가 훨씬 쉬워지기 때문이다.
이 응시를 만들어주고, 또한 지켜나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응시를 위해서는 반드시 소지해야만 하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있다.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응시를 할 수 있고,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꾸준히 아프지 않게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의 이름은 여러 가지다. 달라이라마에 따르면 불가에서는 그것을 ‘자비심’이라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만, 불가의 가르침을 예술가가 섣불리 따르다간 아예 창작욕마저 버리고 무소유로 떠날 판이라 그렇게는 권유할 수 없는 노릇. 나는 그것을 예술가에 맞춰 살짝 단어를 고쳐 ‘여유’라 부를 것이다.
여유의 핵심은 거리에 있다. 상대에게는 그가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을 넓혀주는 배려를 보여야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리 가리려 들어도 똑똑히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떼어두는 것이다. 손바닥을 자신의 눈앞에 딱 붙이고 있으면 절대 손금을 볼 수 없듯이, 자기의 본성을 파악하고 싶다면 우선 자신과의 거리를 두는 것이 중요한 노릇.
그렇게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설정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후 바라보라. 지켜야 할 기준점, 주어야 하는 포인트, 비틀어야 하는 재미, 그리고 걸어야 할 길이 보일 것이다. 여유는 응시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고,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열쇠다. 이 거리 맞추기의 예를 들기 위해 굳이 멀리 갈 것도 없다. 세상 모든 것이 삶의 한 자락이라면, 그에 대한 예는 사방에 널려있으니까.
작품으로 형상화할 모델인 자기 자신조차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을 위해서라면 한갓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존재들이 바로 예술가들이다. 일단 예술가가 되어버리면 멈출 수 없고, 또 멈추지도 못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익힌다는 것은 자전거 타는 법과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번이라도 몸에 익힐 경우 설령 기억상실에 걸린다 한들 절대 잊혀지지 않는 화인(火印)과도 같은 것. 절필이 불가능에 가깝고 은퇴 또한 어불성설인 직업이 바로 예술가다. 그들이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며, 세상과 타협한다는 것은 장르를 바꿔 돈을 쫓는 것이 아니라 이 자기 응시를 포기하고 굴복한다는 것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누가 묻는다. 예술이 뭐냐고, 그 본질을 말하라고. 본질이란 무엇이라고 누가 정의하던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해 줄 수 있다. 진정으로 원하는 목표, 그것 단 하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것.
예술의 본질 가운데 하나는 이런 치열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