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7-13
불혹에 접어든 나이로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일러스트집을 4권이나 펴낸 일러스트레이터 정해찬.
그의 다섯 번째 일러스트집 [幻想-illusion]이 드디어 출간했다.
정해찬은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수 백가지를 고려하여 고치고 다듬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정교한 손길로 유명하다.
감성이 메마른 현대인들에게 끊임없이 순수한 동화를 들려주듯이 요정과 천사 같은 신비로운 대상을 아름다운 꽃과 어우러지게 하여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창조해 낸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요정과 천사들은 은밀히 숨겨놓은 정원 속으로 안내하며, 그 정원에는 수줍은 봉오리와 만발한 꽃밭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게 된다. 여전히 컬러잉크만을 고집하는 그는 하늘거리는 옷자락과 요정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완벽하게 그려낸다.
삶이 각박하여 우울하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그의 몽환적이면서도 환상적인 그림을 통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행복을 주는 일러스트레이터다.
대학로의 한 미술관에서 만난 그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풍부한 열정과 다분한 ‘끼’를 지닌 일러스트레이터이며, 자신이 그려내는 요정과 천사처럼 영혼이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러스트레이션부터 구체관절인형 제작까지 쉬지 않고 달려가는 그의 열정적인 작품을 만나 보자.
인터뷰 I 박현영 기자 (maria@yoondesign.co.kr)
벌써 일러스트집을 5권이나 펴낸 중견 작가인데,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동기는 무엇이며,
아직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이끌어 나가는 비결은 무엇인가?
15년 전에 [주간 만화] 표지 일러스트로 데뷔를 했다. 원래 [주간만화]에 다른 작가가 캐스팅이 되었다가 원고료 문제로 출판사와 마찰이 있었다.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주변의 친구들이 한번 도전해보라고 권유를 해서, 보낸 그림이 되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브룩쉴즈를 그린 그림을 보냈다. 그런데 그 그림이 표지가 되었고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길이 시작된 셈이다.
물론 고생하고 데뷔한 사람들에 비해서는 데뷔는 쉬웠지만, 어렸을 때부터 일러스트레이터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너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등단을 해버려서 당시에는 책임감이 느껴져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나는 항상 그림과 인형생각을 한다. 특별히 작업 시간을 정해두는 스타일이 아니고 머리 속에 그려지는 구상을 스케치북에 바로 옮기는 스타일이다. TV를 보다가도 습관처럼 그림을 그리곤 한다.
그리고 작업이 안 풀리면 풀릴 때까지 잡고 있는 성격이다. 맘에 들지 않으면 맘에 들 때까지 작품을 완성하는 성격 때문에 솔직히 슬럼프라는 것을 겪어보진 않았다. 그러나 대신 체력적으로 힘들 때가 많다.
[THE FACE] [스크린의 요정] [메르헨 에세이] 등 일러스트집을 출간했는데, 이번에 출간한 시공사에서 발행하는 일러스트집 [幻想-illusion]은 지난 일러스트집과 어떻게 다른가?
[메르헨 에세이]는 99년 IMF 때 출간했다. 당시 전쟁 중에 책이 나왔다고 할 정도로 출판 시장의 여건이 좋지 않을 때 발간을 한 것이다. [THE FACE]는 미소녀를 그렸고, [스크린의 요정]은 여배우를, [메르헨 에세이]는 천사를 주로 그렸다. 이번 7월 7일에 출간된 [幻想-illusion]은 요정과 천사를 주로 다루었다.
같은 천사를 다루었다고 해도 [환상]이 [메르헨 에세이] 보다 조금 더 무겁다는 것이 달라진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다음 일러스트집을 구상중인데, 더 무거워질 것 같다.
메르헨 에세이의 ‘한쪽 날개의 천사’ 에서 보듯이 작품에 천사가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천사를 자주 그리는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천사를 보고 자랐다.(웃음)
진짜 천사를 봤다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약국을 운영하셨는데, 모 약품회사에서 매년 명화캘린더를 발행했는데, 그 캘린더에는 천사가 항상 등장했다. 천사를 너무 좋아한 어머니는 캘린더의 천사를 오려서 수집하곤 하셨는데, 어린 시절부터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봐와서 그런지 정신적 교류가 이루어졌던 것 같다.
어머니는 항상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마음속의 아름다운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단다..”라고. 어린시절 그 말이 참 가슴에 와 닿았다.
정교하게 작업을 하는 것이 특징인데,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 같다.
[환상]은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걸렸나?
99년 후반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에 대작도 몇 번 그리고 인형 제작 및 전시를 하면서 4년여 동안 꾸준히 준비해왔다.
이 다음부터는 한 작품에 좀 더 몰입을 해서 2년 정도 제작기를 단축 할 예정이다.
매번 일러스트집을 낼 때 마다 체력과의 한계,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심할 것 같다.
그러면서도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일러스트집을 꾸준히 발간하는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마치 산고의 고통을 잊고 다시 출산을 하는 여성들처럼, 일러스트집을 낼 때 마다 무척 힘들고 다시는 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항상 그림을 그리고 작품 구상을 하는 생활이 반복되다 보면, 다시 또 일러스트집을 출간한 나를 보게 된다.
일러스트레이터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원하는 것을 바로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행운인 것 같다.
예를 들면 꽃을 보고 카메라로 바로 그 꽃을 담아낼 수는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것은 찍어낼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림으로는 그려낼 수 있다.
아무리 예쁜 꽃이라도 일주일이 지나면 시들어 버리지만 그림 속의 꽃은 영원하다.
원하는 꽃, 원하는 아름다움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이 직업의 매력이다.
데뷔 후 지금까지 자신의 그림엔 어떤 변화가 있었나?
나는 변했다고 생각하는데, 독자들은 변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림만 보더라도 ‘이것은 정해찬의 그림’이라고 티가 난다는 것.
즉, 기법상이나 표현상의 변화는 있을지언정 정해찬 그림이라는 것의 차이는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평소에 작업 구상은 어떻게 하는가?
그냥 평소에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스타일이다.
심지어 꿈속에서 본 것을 그림으로 그린 경우도 있다.
원래 백합을 좋아하는데, 어느날 꿈에서 백합의 군락, 즉 백합밭을 봤다.
실존하지 않은 백합의 군락을 너무 그리고 싶어서 그리기 시작한 것이 환상의 표지가 되었다.
대부분의 작품이 몽환적이며 판티지한 분위기와 터치가 상당히 많은 정교한 일러스트가 주를 이루는데 작품세계에 대해 설명을 한다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표현해 내고 싶다는 열망이 섬세한 터치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꽃 한 송이라도 꽃의 줄기, 잎맥 하나 하나를 표현해내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머리 속의 상상력을 디테일하게 풀어내고자 한다.
평소에 식물을 볼 때 꼼꼼하게 잎맥까지 들여다 본다.
허상의 무언가를 그림으로 구체화 시켰다는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내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그리고 싶은 대상이 있다면?
보리밭을 바라보는 소년이나 해바라기 밭을 그리고 싶다.
일러스트레이터 지망생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자기가 좋아해서 시작한 일에 대한 정신력이 강해야 한다. 너무 판타지만 가지고 이 직업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생각보다 그림자가 짙은 분야이다.
그림은 ‘환상’을 그려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현실’ 인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의 자리에 오르려면 많이 힘들어도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지않을 정도의 강한 사람이어야 한다.
지난 1월 2일 ~ 1월 16일 동안 아티누스갤러리에서 보름 동안 직접 제작한 구체관절인형 전시회
<데자뷰>
를 연 것으로 알고 있다. 일러스트레이터이면서 인형작가로도 유명한데, 인형을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데자뷰>
일러스트와 마찬가지로 인형도 작정을 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첫 작품을 만들고 난 후에 반응이 상당히 컸다. 각종 매체에서 보도되었고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셨다. 꾸준히 작업은 해왔지만 등단을 결심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일러스트만큼 나에게 큰 작업이 아닐 수 없다.
후배 양성에 및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요즘 사회적인 역할상 후배양성에도 신경을 쓰라는 주변의 권유로 제자를 키우려고 생각하고 있다.
일러스트, 인형 모두 제자를 키울 예정이고 여러 명을 키운다기 보다 소수 제자의 질적 양성을 하고 싶다.
앞으로의 계획은 벌써 반년 정도의 계획이 잡혀 있는데, 인형책은 10월 추석 때 출간 예정이고, 크리스마스 때는 에세이집, 내년에는 창작동화를 출간할 예정이다.
또한 홈페이지를 제작 중인데 오픈일은 아직 미정이지만 미공개 일러스트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나는 50세 때까지는 타이트하게 그림을 그리면서 살고 싶다.
그리고 50세가 넘으면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