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연 | 2015-06-18
일러스트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 어딘가에 귀속되어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러스트의 사전적 정의 또한 삽화, 도해, 신문이나 잡지, 광고 문장이나 내용을 보충하거나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첨가하는 그림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회화 사전에서는 제3자에게 의미를 전달하거나 내용을 암시하기 위해 제작한 그림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연유로 일러스트는 그림 자체로 평가받기보다 보조 매체로 가치가 매겨졌다. 또 예술 작품과는 구별되는 디자인 작업으로 분류됐다. 향유하는 문화라기 보다 소비하는 제품처럼 인식되었던 것이 일반이다.
일러스트는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매일 들고 다니는 핸드폰 케이스, 음료와 식품, 셔츠, 책, 노트 등 밋밋함을 덜기 위한 모든 곳에 존재한다. 어디에나 있지만, 그 가치는 제대로 인정받고 있지 못한 셈이다. 그 쓰임도 제품을 포장하고 구매를 독려하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일러스트도 대부분 특정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캐릭터다. 대중의 인식은 거기서 머물러있다. 그라폴리오는 이런 존재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일러스트는 왜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인정받을 수 없는가?’
‘단순히 인식의 문제로만 봐야 하는 것인가?’
노장수 네이버 그라폴리오 콘텐츠 매니저는 “일러스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도구가 아닌 문화 콘텐츠다. 영화, 만화, 음악 같은 대중문화로서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일러스트레이터가 인정받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서비스 마련에 힘을 쏟는 이유다. 미술보다 가볍고 예술보다 편하면서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로 도약하기 위해, 그라폴리오는 스토리와 튼튼한 플랫폼을 마련했다. 이젠 그것들을 도약대 삼아 세계 무대로 나아갈 전망이다.
에디터 ㅣ 박수연 (sypark@jungle.co.kr)
“그라폴리오는 일러스트가 단지 포트폴리오가 아닌,
온전한 하나의 문화로서 존중받고 누구나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라폴리오는 말보다 그림으로 말하는 게 익숙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보여주고 소통하는 공간이다. 감상하는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서 단발적인 소통보다 일관된 작품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피력한다.
Jungle : 그라폴리오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그라폴리오 서비스를 확장해 전 세계 크리에이터를 지원하는 좋은 작품 환경을 만들고 싶습니다. 작품을 좋아하는 팬이 생기고, 그들이 작가를 지원하는 식으로 자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 작가들이 꾸준히 창작활동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 목표예요. 일러스트레이션 영역은 솔직히 쉽지 않아요. 해외 유명 서비스만 보더라도 대부분 관계자를 위한 서비스죠.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포트폴리오 서비스라고 꼽는 ‘Behance’조차도 자료를 올리는 사람 대부분이 일자리를 찾거나 일을 맡기기 위해 이용합니다. 대부분 서비스가 그런 니즈를 바탕으로 설계되고 서비스가 이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에요. 저희는 포트폴리오는 기본이고 ‘다른 문화 영역과 마찬가지로 그림도 하나의 문화 콘텐츠가 될 수 있을까?’의 관점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라폴리오도 처음에는 포트폴리오 중심이었어요.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관계자들만 보는 서비스로 남겠구나’라는 결론에 닿아 변화를 시도한 거죠. 일러스트를 문화 콘텐츠로 만들어 누구나 쉽게 보고 즐길 수 있는, 팬이 생기는 서비스를 만들고자 합니다.
Jungle : 일러스트가 대중화되지 못한 이유를 어떻게 보십니까?
답은 미술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미술을 접하지만, 대중화됐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죠. 대중화된 콘텐츠인 영화, 음악, 만화, 소설은 이야기 중심입니다.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기 때문에 몰입도가 높아요. 이야기는 자신을 이입할 틈을 만들어주죠.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소입니다. 드라마에 빠지는 이유도 서사 구조에 몰입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공감하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미술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야기 중심이었어요. 사진이 나오면서 상황이 바뀌었죠. 순간의 캡처는 이야기 단절을 야기했습니다. 장면을 캡처해서 그리는 행위가 사진과 다르지 않다고 판단한 화가들은 똑같이 그리는 것을 지양했고요. 작가주의가 반영된 겁니다. 그렇게 그림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미술관에 가면 도슨트가 설명해주는데, 설명을 들어야 그나마 작품 이해가 쉬워요. 그렇지 않은 경우, 작가의 의도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죠. 그래서 상상하며 보지만,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작품도 더러 있습니다. 현대 순수미술만 보더라도 딱 봐서 의도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림은 상품에 녹여지거나 책의 삽화로 쓰이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어요. 우리는 그림에도 충분히 이야기가 담길 수 있고, 대중의 공감대를 통해 새로운 콘텐츠가 될 거라 믿습니다.
Jungle : 그라폴리오 서비스 서비스가 계속 진화하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실험을 했습니다. 카페를 열어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하고요. 그와 함께 마켓을 만들어 작품을 판매해보기도 했는데, 생각한 것과 다르다는 걸 알았습니다. 전시를 10번 정도 했는데, 성공했다고 보기에는 지인 중심 방문이 다수였어요. 방문객들이 작품을 알아가고 공감하는 과정이 부족했죠. 실제로 제품 판매도 많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무명의 작품, 예쁘기만 한 작품을 사람들이 살 이유가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냥 지나가다 소품이 예뻐서 산 것과 같은 취급을 받는 느낌이었죠. 반면 대중문화는 다릅니다. 가령 가수가 새로운 음반을 내면 가수의 팬들은 관심을 가지고 반응합니다. 영화도 마찬가지고요.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 작품이면 무조건 보러 갑니다. 동일하게 그림도 작가의 팬이라면 전시에 가고 그 작품을 소유하려 하겠죠.
사람은 누구나 소유하고 싶은 것이 있잖아요. 그 이유가 단순히 예뻐서는 아닐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것은 ‘그림을 어떻게 취급하고 발전시켰을 때 하나의 서비스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와 ‘그렇다면, 누구와 누구를 연결해줘야 하는 것인가’ 였습니다. 포트폴리오 중심 서비스는 아니라고 판단했고요.
Jungle : 그라폴리오가 중점을 두는 전략은 무엇인가요?
지난 1년 동안 서비스를 개편했습니다. 리뉴얼 오픈했을 때는 미완성이었고요. 지속적으로 하나씩 바꿔나가면서 수정했죠. 내부적으로는 ‘Challenge(챌린지)’ 제도를 통해서 재미있는 실험을 해봤습니다. 이야기가 있는 서비스를 해야 하는데,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야 관심이 증폭될지 고민했죠. 생각보다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서비스 오픈 후에는 예상대로 대중에게 그림이 아직 익숙한 콘텐츠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어요. 우연히 네이버에서 소개된 이미지를 타고 들어와도 쓱 훑어보고 ‘좋네’ 하고 나가는 식입니다. 누군가의 팬이 되는 연결고리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대신 작가 사이에서는 서비스가 유명해졌죠. 보통 작가들은 포트폴리오 사이트를 여러 개 관리하는데, 그라폴리오에는 다른 콘텐츠를 올립니다. 한 작가가 올리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포트폴리오 사이트에 올리는 콘텐츠와 저희 쪽에 올리는 콘텐츠를 차별화 하는 거죠. 저희 사이트에는 개인 작업 중심으로 올립니다. 이는 저희가 바라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작가들의 반응은 좋지만, 대중의 반응은 아쉽습니다. 반응이 느려요. 그래서 ‘서비스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작년 하반기에 ‘스토리픽’ 개념을 고안했습니다. 스토리픽도 처음과는 달라졌는데, 형식의 제약을 없애고 안에 이야기를 담자는 명제만 가지고 챌린지를 열었습니다. 정식 연재를 대상으로 공모전을 연 거죠. 먼저는 작년 11월, 12월경 이미 많은 작가가 그림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때 알게되서 1월부터 정식 연재를 시작한 작가가 6명입니다. 동시에 3개월간 챌린지를 진행해서 3명을 추가했고요. 현재는 9명(퍼엉(Puuung), 김나훔, 꼬닐리오, 째찌(최현진), 박정은, 현현, 타그트라움, 배성규 등)으로 운영 중인데, 하반기 챌린지를 통해 연재 작가를 늘릴 예정입니다.
Jungle : 스토리픽은 말 그대로 그림에 스토리를 담는 형식인데, 서비스에 대한 반응은 어떻습니까?
작품이 쌓여야 스토리가 이어집니다. 스토리픽에 올라온 연재물은 한 장에 이미지 몇 개가 들어있는 식이에요. 짧게는 한 장씩 이미지 안에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짧지만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죠. 현재 퍼엉 작가의 경우 100개의 이미지가 쌓여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이미지를 보면서 팬이 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려고 해요. 스토리픽에 쌓인 이미지가 스토리를 형성하면서 특정 작가에 팬이 몰리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퍼엉 작가가 독주하고 있는데, 팬이 2만 명이에요. 그다음이 만 명 수준이고요. 해외 반응이 좋은데, 그들이 바라보는 시각은 새로운 콘텐츠란 인식이 강해요. 지금까지 이런 콘텐츠는 없었다고 얘기하죠. 퍼엉 작가는 글이 거의 없고, 그림으로만 얘기합니다. 해외 독자 중에는 '그림을 이어서 보다가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라폴리오 SNS의 팬 분포도 50% 이상이 해외입니다. 팬 증가도 해외에서 빠르게 늘고 있어요. 언어와 관계없이 해외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어 고무적이에요.
그림 장르는 다양합니다. 그만큼 작가들도 다양하고 좋은 작가들도 많죠. 그런데 일러스트는 대중의 관심을 못 받은 경우예요. 우리는 좋은 작가를 계속 추천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고자 합니다. 물론 시간은 걸리겠죠. 하지만 그림이 좋을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좋아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어요. 그림 한 장이 사람들에게 수많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죠. 과거 기억부터 현재 나와 주변 사람들의 모습까지 더듬어볼 기회를 제공합니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소설을 볼 때 느끼는 감정과 동일해요. 그라폴리오는 그런 요소를 그림에 담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조금씩 반응을 보이고 있어요.
Jungle : 활동하는 작가 규모는 어느 정도 되나요? 그들이 어떤 식으로 활동하는지 궁금합니다.
현실적으로 작가에게 많은 것을 지원해주지는 못하고 있어요. 연재 작가들은 계약을 맺고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을 상담해줍니다. 출판사 제의가 들어오면 계약서를 검토해주기도 하고요. 그라폴리오에서 활동하는 작가 규모는 8천 명 정도 됩니다. 처음 서비스를 시작할 때 작가 중에는 ‘내 작품을 올려놨을 때 누가 도용하면 어떻게 하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간 경험을 통해 답하자면, 공식적인 공간에 조금 더 빨리 올리는 게 저작권 보호를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홈페이지에 작품을 올려놓고 어느 날 도용당한 사실을 알았다면, 법적으로 보호받을 장치가 없습니다. 반면, 공식적으로 기업에서 만든 서비스는 기록들이 남기 때문에 저작권이 보장되는 셈입니다. 날짜를 따라 역추적이 가능하죠. 우리는 제발 서랍 속에만 넣어놓지 말고 꺼내놓으라고 조언합니다. 최근에는 CCL 개념을 도입해서 작가가 작품을 컨트롤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일러스트는 산재해 있고, 우연히 좋은 그림을 봤는데 그 그림을 찾을 방법이 없죠. 그러면 결국 도용의 사례가 생기는 겁니다. 그림도 공개된 장소에서 대중성을 갖기 시작하면, 감히 카피할 생각을 못 할 거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챌린지 할 때 ‘카피한 것 같은데요?’라는 댓글이 달려서 확인하고 참여를 저지한 경험이 있습니다.
Jungle : 그라폴리오가 초기에는 다양한 아트웍 소개를 염두에 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러스트 외 분야도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작가를 크리에이터라고 소개합니다. 일러스트만 다루려고 했다면 ‘크리에이터’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을 거예요. 가까운 미래에는 그림책을 서비스할 예정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와 그림책 작가는 다른 영역이죠. 시각적인 매체이긴 하지만 좀 더 문학적 요소를 띠는 게 그림책입니다. 서비스는 e북 형태가 될 겁니다. 많은 작가들이 출판을 미루고 서랍 속에 작품들을 쌓아놓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런 작품을 수면 위로 올려서 그림책 보는 방식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동영상 서비스도 지금은 옵션인데, 좀 더 많이 만들 계획입니다. 동영상은 영역이 매우 넓습니다. 라이프드로잉으로 제작 과정을 찍어 올릴 수도 있고, 그리는 과정을 보여줄 수도 있죠. 그밖에 강의도 가능하고요. 동영상은 작가와 팬이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수단, 작가와 지방생이 만날 매체입니다. 현재는 실험단계라서 천천히 진행할 계획입니다.
Jungle : 그라폴리오의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인스타그램에 ‘러브’를 테마로 일러스트 이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림은 보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오죠. 전 세계 사람들의 다양한 공감 댓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이에 SNS 테마를 가져와 6월 19일부터 8월 30일까지 에버랜드 장미원에서 ‘Love on Grafolio’ 전시를 개최하게 됐습니다. 공식적인 그라폴리오 첫 전시입니다. 에버랜드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라폴리오를 모를 텐데, 그들에게 동감할 좋은 그림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장미원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연인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그라폴리오를 각인시키고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독려할 생각입니다. 작품은 52점 정도 전시합니다.
그라폴리오의 향후 계획은 작품의 해외 반응이 좋아서 해외 마케팅, 홍보를 강화할 생각입니다. 해외 작품의 경우 감정선이 느껴지지 않는 편인데, 우리 작품에는 감정선이 드러나요. 외국인도 그런 감정선에 반응하고 실제 다양한 언어로 댓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그림은 국경이 없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어요. 사실 네이버 서비스로서 ‘그라폴리오’ 명칭을 그대로 쓴 이유는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그라폴리오 서비스는 해외 7개 언어를 지원하고 있고, 작가 중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분도 있죠. 앞으로는 해외 출신 작가도 나올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라폴리오는 글로벌 서비스가 목표입니다. 지금까지 경험을 통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제 첫 단추를 끼웠습니다. 그라폴리오의 이런 행보가 일러스트 작가의 자존감 회복과 작품의 가치를 회복하는데 도움주기를, 나아가 일러스트가 문화 콘텐츠로서 인정받는데 일조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