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9-09
저는 향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천연물질이 원료라고는 해도, 화학성분이 가미된 인공향이란 느낌이 강하고, 누군가 독한 향을 풍기며 지나가기라도 하면 불쾌(?)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향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향수에 별로 관심도 없었고요.
심지어는 향수패키지에 있는 ‘TOILETTE’이라는 글자만 보고, “화장실용(?) 방향제치곤 병 디자인이 참 예쁘군. 어이구 가격 좀 봐! 뭐 이렇게 비싸.” 라며 나온 적도 있었답니다.
왜 향수광고나 향수병 디자인은, 그렇게도 최고급 명품 이미지에 집착하는 걸까요? 병이라고 말하기엔 아까울 만큼 형이상학적인 디자인에, 세련, 섹시, 화려, 본능, 육감, 파격 등 끝도 없는 추가되는 새로운 컨셉까지 - 향수를 둘러싼 비주얼들은 왜 그렇게 새롭고, 야하기 이를 데 없을까요? 왜 한다 하는 해외 명품 브랜드들은 너나없이 향수에 손을 대려 할까요? 그렇게 돈 되는 사업이라면 왜 삼성에서는 향수를 만들지 않는 걸까요?
형태나 빛도 없이, 오직 후각으로만 상대를 자극하는 향수를 ‘유혹’이라고 합니다만, 오히려 저는 향수의 향 자체 보다도 향수광고나, 향수병의 디자인에 더 유혹당하곤 합니다. 절세가인들의 육감적인 포즈나 무언가를 갈구하는 게슴츠레한 눈빛, 엑스타시와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비주얼은 향수 자체보다 더 PER FUME한 향으로 짜릿짜릿하게 마음을 두드립니다.
의상, 메이크 업, 헤어스타일과 더불어 향은 나를 표현하는 제4의 패션! 숨겨진 나의 본능을 깨우는 향수 속으로 잠시 빠~져 봅시다.
불가리 불루, 불가리 오파르퓨메 익스트림, 돌체엔가바나 라이트 불루, 엘리자베스아덴 선플라워 우먼, 달리 플라워, 지방시 베리 이레지스터블, 에스티로더 플레져, 캘빈클라인, 헤라, 랄프로렌, 랑콤 미라클, 휴고 다크불루, 그리고, 나오미 캠벨, 셀린 디옹, 스틸 제니퍼 로페즈, 포에버 엘리자베스등 스타의 이름을 딴 향수, 각각의 브랜드와 향은 그것이 쓰여지는 상황이나 장소, 사람에 대해 구체적이고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클래식 연주회의 로열석에 선 세련되고 감각적인 그녀, 로맨틱한 드레스와 어우러진 신비로운 루미너스 오린엔탈 향 ‘에스티로더 인튜이션’>
<첫사랑과 만나기로 한 날엔 청순 상큼을 기억하게 하는 ‘겔랑 아쿠아 알레고리아’>
<침실로 향하기 10분 전 톱 노트로 오감을 자극하고 머스크와 앰버의 깊은 관능으로 몰아가는 ‘이브생로랑 누’>
침실로>
첫사랑과>
클래식>
위와 같은 이미지가 어느 정도 호감을 갖게 하고, 어느 정도 욕망을 자극하는지, 또 일단 입력된 이미지가 선택의 순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향수 브랜드가 자기만의 특정한 이미지를 가지고, 거기에 고유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해 보입니다. 팔려는 사람이나 소유하려는 사람이나, 모두 다 향수의 ‘이미지’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물건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향수라면, 브랜드도 모르고 이미지도 없는, 거기다 광고마저 없는 제품에 돈을 투자하지 않을 겁니다.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디자인의 가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닫는 이때, 이제 마지막 남은 디자인 영역은 ‘후각 디자인’이라 합니다. 인간의 후각은 겨우 20%정도만 발휘 되고 있을 뿐이니, 생활 속에서 잊고 살던 80%의 후각감성을 되찾는다면 디자이너뿐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감성이 확대 되어 더 폭 넓고 깊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도 하구요.
눈으로 보이는 독특한 개성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자기만의 개성을 찾아나가는 일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자기만의 향기’를 찾는 일이 바로 그런 일이 아닐까 싶은데요 - ‘나’라는 인간이 말없이 사라져가는 의미 없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남을 수 있는 독특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일에, ‘제대로 쓰여진’ 향수는 분명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향수(香水)는 유혹이라는 본능의 향수(鄕愁)를 불러 깨우는 마약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잊고 살던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끌어올리는 매개체, 상대를 자극하든, 유혹을 하든, 사랑을 향수(享受)하게 만드는 페로몬 같은……
어느 멋진 자동차 광고의 헤드라인 카피가 생각납니다.
“유혹한 자, 유혹 당한 자, 누가 더 중죄인인가?” -William Shakespe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