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4-06
한 10여년 전 일인가 보다.
별 생각 없이 길을 지나고 있는데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에 집시 풍 옷차림을 한 진한 화장의 스페인계 여성이 “운명을 알고싶지 않냐”며 팔을 잡아 끌었다.
매몰차게 “관심없다” 소리를 못 해 잡아 끄는 곳으로 가보니 책상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는 화려한 일러스트레이션 카드들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한 구석에는 ‘타로(Tarot)’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서울 한 복판에서도 뿔테 돋보기 안경에 흰 수염을 늘어뜨린 백발의 노인이 ‘사주, 관상, 궁합’이라 쓴 표지판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아오던 터라 외양만 다르지 한마디로 ‘타고난 팔자를 알려주는 점술’이구나 여기면 될 일이었다.
헌데 자꾸 책상 위에 있던 카드들의 생생한 그림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를 않고 하루 종일 찜찜한 기분을 들게 하더니 급기야는 그날 밤 꿈에까지 나타나 뭔지 모르지만 생생한 비주얼 (한마디로 악몽)로 사람을 시달리게 하는 것이었다.
무슨 이유로 그런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잠시나마 괴롭힘을 당했는지 지금에 와서 자세하게 알 길은 없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 다음 날로 깨끗하게 사라져 버려 까마득히 잊고 지낸 지도 오래 된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기억하게 된 것도 순전히 얼마 전 우연히 보게 된 HBO 연속극 시리즈인 “카니발 (Carnivale: 작년 9월에 시작해 현재 12회째 방영되고 있다)”의 메인 타이틀 탓이다.
평면 일러스트레이션을 3D 공간에 배치한 후 실제 역사적 사건을 담은 영상과 교묘하게 합성한 작품인데 컬러와 흑백, 2D와 3D, 그림과 영상을 대비시키는 재주에 감탄을 절로 하게 만들더니 새삼 기억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그 “악몽”의 느낌을 되살려 내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이 재주꾼은 로스앤젤레스 기반 회사인 A52 (www.a52.com).
1997년 설립되어 주로 뮤직비디오, 광고, 타이틀 등을 제작해 왔으며 극사실적인 비주얼로 클리오상 (The Clio Awards)을 비롯한 각종 상을 몇 년째 휩쓸어 온 재능의 회사였다. [그림 1]
드라마 “카니발”은 대공황을 맞아 연명하는 것만도 벅찼던 1930년대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한 농장마을을 배경으로 척박한 환경 속에서 별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으로 살고 있지만 운명적인 초능력을 가진 특별한 사람으로서 예언되는 주인공 벤 호킨스 (닉 스탈: 터미네이터 III)와 타로점술가 소피 (클리에 듀발)를 포함한 서커스단 “카니발” 인물들의 주변이야기다.
이에 따라 드라마 프로듀서인 타드 런던 (Todd London)을 비롯한 A52 타이틀 제작진은 그 컨셉을“ 황량했던 오클라호마의 1930년대 현실을 표현하되 시대를 초월해 늘 존재해 온 선과 악의 기운을 느끼게 하고 그것을 역사적 사실과 연결해 보자”로 정한다.
프로듀서: 스콧 보야한 (Scott Boyajan) 및 제작 프로듀서: 다아시 레슬리 파슨스 (Darcy Leslie Parsons)를 중심으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앙구스 월 (Angus Wall), 디자이너: 보네타 테일러 (Vonetta Taylor), 그리고 사이몬 브루스터 (Simon Brewster) 및 패트릭 머피 (Patrick Murphy)를 포함한 10여명의 2D/3D 아티스트들이 기획단계부터 참여해 4개월에 걸쳐 완성해 낸다.
이 타이틀은 마지막 10초 라이브액션 시퀀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CGI인 총 프레임 수: 2579, 길이: 1분 25초짜리로 타로 카드의 일러스트레이션과 그 일러스트레이션들 사이를 마치 시공간 여행을 하듯 전·후진하는 카메라가 어우러져 ‘살아 움직이는 듯한’ 영상을 연출해내고 있다.
미켈란젤로나 라파엘과 같은 거장의 명화 이미지들을 타로 카드의 일러스트레이션으로서 이용한 것도 기발하거니와 그 명화 이미지들을 3D 공간 속에 재배치시킴으로써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일루전을 자아내는데 그 느낌이 어찌나 생생한지 마치 총천연색 악몽처럼 쇼킹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이들 타로 카드 이미지들은 실제 현실 사건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전이되면서 벌어지고 있는 악몽이 일루전이 아니라 바로 현실일 수 있음을 시사해 다시 한번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데…
이 생생 쇼킹 영상을 잠시 그려보자면…
바람결을 느끼게 하며 뒹굴 듯 떨어지는 타로 카드를 따라 서서히 클로즈업 하는 카메라.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이미지들이 그려진 The World 카드를 향해 초점을 맞추며 살짝 멈추는 듯 하더니 이내 전진해 들어간다. [그림 2]
계속 클로즈업 되는 인체 이미지.
카메라와 부딪힐 만큼 가까워지는 순간, 인체를 둘러 싼 평면 공간이 순식간에 3차원 공간으로 변하며 카메라는 마치 군중 속을 헤쳐 나가는 듯 이미지들 사이를 헤집으며 깊고 깊은 공간 속으로 빠르게 전진해 들어간다. [그림 3]
짙게 드리워졌던 구름 사이를 지나는 카메라.
비행기가 착지하듯 공중에서 내려오며 지상 정경을 향해 클로즈업 해 간다.
서서히 흑백 사진으로 변하는 지상 정경.
카메라는 전진을 멈춘 채 1930년대 공황 시절 사람들의 모습을 담긴 다큐멘터리 영상들을 보여준다. [그림 4]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카메라.
이번에는 후진하며 이미지들 사이를 빠져 나가더니 Ace of Swords 카드 이미지 사이를 빠져 나온다 싶자 이내 Death 카드를 향해 다시 전진해 들어간다. [그림 5]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카메라는 차례로 King of Swords, Temperance, The Magician, The Tower, Judgment 카드들과 1930년대에 일어난 주요 역사적 사건이 담긴 영상을 번갈아 비추다 악마 (악을 상징)가 그려진 Moon (무의식 세계를 의미)과 신 (선을 상징)이 그려진 Sun (의식 세계를 의미) 카드 두 장을 비춘다.
바람이 느껴지며 날아가는 Moon과 Sun 카드.
이어서 바람에 흩어지는 모래들 사이로 “Carnivale” 로고가 서서히 드러난다. [그림 6]
2.5D 일루전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이 타이틀의 일루전은 기술적으로 ‘2D 이미지의 3D 공간화’ 테크닉에 힘입은 바 크다.
단순히 평면 그림으로서 현실 세계와 분리되어 존재했던 2D 이미지를 3D 공간 속에 놓아 마치 이미지 자체가 입체화되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들게 만든다.
반면 이 착각을 생생한 체험으로 느껴지게 하는 데는 세계적인 명화로 이루어진 타로 카드들의 일러스트레이션과 다큐멘터리 영상의 힘이 컸다.
세계 걸작으로서 이미지 자체만으로 영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데 그 낯익은 이미지를 3D 공간 속에 넣고 그것을 현실 사건과 연결시키니 예기치 않은 운명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과 같이 느끼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명화를 타로 카드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만들고 3D 공간에 재조합 하는 일은 사용될 작품 및 다큐멘터리 영상에 대한 연구 및 준비 과정에서 시작했다.
동원된 인원 및 기관 만도 10여 군데. 여기에는 리서처 수잔 닉커슨 (Susan Nickerson), 프리어 (Freer) 갤러리, 워싱턴 국립 공문서 보관소 등을 비롯해 코비스 (Corbis) 스탁이미지 회사 및 이미지의 직접 제작을 위한 일러스트레이터 지미 야마사키 (Jimmy Yamasaki)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 제작은 선정된 작품의 슬라이드를 고해상도 스캐너를 통해 스캔해 컴퓨터 이미지 정보로 만들면서 시작한다. 총 20여개 작품이 쓰였으며 드라마가 HD 용이었기에 특별히 고성능 스캐너인 파워하우스 이미징 (PowerHouse Imaging)을 사용해 이미지당 300MB 이상 이미지 파일로 저장되어야 했다고 전한다.
한편 3D 타로 카드들은 인쇄된 카드를 오래되고 낡은 느낌이 나도록 직접 채색하거나 비비고 구기고 그것을 스캔해 후디니의 엘레먼트 (element)로 저장한 다음 애니메이트 하고 조명과 그림자를 적절히 더하는 과정으로 만들어냈다. [그림 7]
도큐멘터리 영상들은 텔레시네 (Telecine) 과정을 거쳐 저해상도 및 고해상도 24p D5 패스(Pass)로 저장해 사용되었으며 특히 고해상도 패스는 명화 이미지 시퀀스들을 연결하는 부분에 이용되었다. [그림 8]
2.5 차원 일루전 연출에 사용된 기법은 우선 저장된 고해상도 명화 이미지들을 전경 이미지와 배경 이미지로 일일이 분리해 이미지 조각들로 만들면서 시작한다. 포토샵을 사용해 분리된 이들 이미지 조각들은 (대략 90여개 이미지) 후디니 레이어들로 저장되어 3D 공간 속에 재조합 된다.
재조합된 후디니 이미지들은 렌더맨 (Renderman)을 통해 렌더링되어 인페르노 (Inferno)로 보내진 후 카메라의 움직임과 그림자, 라이팅 등을 조정하는 과정을 거쳐 다큐멘터리 프레임 및 라이브액션 시퀀스에 전이 또는 합성되면서 2.5 차원 일루전 영상을 연출해 내었다. [그림 9]
비주얼에서 받은 인상이 놀라워 그 속에 숨은 CG 테크닉을 캐다 보면 늘 느끼는 바가 한가지 있다.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CG 테크닉이지만 테크닉 그 자체는 창작 활동에 있어 그야말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타이틀의 경우도 제작 과정만을 살펴 보자면 특별한 테크닉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2D 이미지를 스캔하고 전경과 배경을 일일이 분리한 다음 그들 이미지를 3D 공간에서 재조합해 합성한 것이니까.
하지만 76개 주제를 가진 타로 카드의 일러스트레이션으로서 실제 명화 속 이미지들을 사용하면 멋질 것 같다는 그 “짐작”이 없었다면 이렇듯 강렬한 느낌을 전해줄 수 있었을까 의문해 보면 제작진의 아이디어가 얼마나 기발한 것이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2D 이미지를 3D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한낱 그림에 불과한 타로 카드의 추상성에 구체적 현실감을 더할 수 있을 거라는 그 “짐작”이 없었다면 이 타이틀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생 영상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임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그 생생 영상을 실제 사건과 연결시킨다면 가벼운 심심풀이 이야기거리에 지나지 않는 타로 카드의 주제와 의미에 무게를 주며 운명의 힘을 느끼게 할 수 있겠다는 그 “짐작”이 없었다면 이 타이틀에서 풍기는 악몽과 같은 극적 긴장감은 불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나 생물을 만들어내고 존재하는 것을 지우는 것이 CG를 통한 비주얼 이펙츠라고 한다면 존재하는 이미지를 이용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체험하게 하는 이 타이틀의 CG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생각해 본다. 그저 “비주얼 이펙츠”라고 하기에는 뭔가 충분치 않기에…
Thanks to Roger Darnell (www.darnellworks.com/a52) and Scott Boyajan (the Producer) for helping me better understand the CG techniques implemented on the main title of “Carniva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