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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영상 | 리뷰

기하학적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절제된 상징언어

2002-06-19


너나 잘해!(Mind your own business!)

독립 애니메이션 상영회에서 여성감독의 작품을 만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지난번 인디포럼 영화제 행사기간 중 있었던 ‘독립 애니메이션 작가의 밤’ 행사에서도 여성감독들이 수적으로 우위를 점하며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94년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데뷔한 김현주 감독의 ‘오래된 꿈’ 이후 유진희, 손정현, 김정화, 김경숙, 박현주, 이애림으로 이어지는 국내파 여성감독들의 활발한 작품 활동은 향후 한국 독립애니메이션계에서 여성의 위상과 역할이 적지않을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배움과 창작의 열정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을 넘어 세계 애니메이션에 다가서려고 자기개발을 게을리하지 않는 신영재 감독의 작품 중 ‘너나 잘해!(Mind your own business!)'라는 작품을 중심으로 그 제작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너나 잘해!’는 CINANIMA 2001 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 파노라마부문 본선상영(2001, 포르투갈), 2001 Pisaf 부천국제대학애니메이션 페스티발 Trend Prize 수상, 제3회 전주국제영화제 애니메이션비엔날레 부문 초청상영(2002)등 국내외 경쟁, 비경쟁 부문에 오르며 주목을 받았던 필름으로 제작된 몇 안되는 단편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창작의 열악한 현실을 감안할 때 필름으로 제작된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것 또한 매우 고무적인 일로 그 동안 대부분의 작품들이 컴퓨터로 작업, 최종 비디오 포맷으로 제작되었던 것은 개인의 접근이 용이한 제작 시스템을 선호하다 보니 제작비의 부담이 크고 제작기간이 길고 복잡한 필름제작 시스템에 대한 창작자들의 이해와 접근이 쉽지 않았던 때문이다.

한국 애니메이션 아카데미 졸업작품이기도 한 ‘너나 잘해!’는 ‘사이(between)'와 ‘구멍맞추기’ 에 이은 신영재 감독의 3번째 작업으로 이전 작업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사실적 형상으로 그려낸 반면 이번 작업은 사람에 대한 관계를 보다 추상화된 기하학적 이미지로 다루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단순한 조형이미지의 움직임에 의한 감정과 의미의 전달을 위해 타이밍 연출에 주된 초점을 맞추어 제작하였다’는 대목이 작품을 보며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다루는 재료나 물성이라는 촉감적 질감과 카메라 움직임 등 대상 이외에 요소들의 현란한 표현은 절제하면서 정육면체라는 단순하고 평면적인 대상의 움직임을 통해 의인화된 캐릭터를 정확히 잡으려는 감독의 의도가 잘 표현된 작품인 것이다.

[작품개요]
연출, 시나리오 및 제작 : 신 영 재
음악 : 김 민 규
사운드 : 김 수 덕
Assistant animator : 이 경 원, 김 혜 진, 국 경 진
형식 : 35mm, color, mono
제작방식 : Drawing on paper
상영시간 : 5분
제작기간 : 기획 -3개월, 제작 -5개월, 후반작업 - 1개월로 총 9개월 소요

[작품 기획의도]

사람 사이의 관계는 항상 의도처럼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이 이야기는 간섭하는 사람과 간섭받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극명하게 겉으로 드러난 문제들보다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너무나 미묘하여 말로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보다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시놉시스]

텅 빈 공간에 하얀 종이가 떨어진다. 종이는 정육면체로 변하고 혼자서 재미나게 논다. 갑자기 등장한 물체가 정육면체의 색과 모양을 바꾸려고 한다. 정육면체는 본래의 모양과 색을 되찾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예쁘게 리본이 달린 채 구겨지게 된다.

[작품 스토리보드 1]

[작품 스토리보드 2]


등장하는 유일한 캐릭터인 정육면체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자유자재로 기방식의 놀이를 한다. 이를 시기하듯 이상한 물체가 등장하여 간섭하고 통제하려들면서 정육면체는 벗어날 수 없는 틀과 리본에 묶여 자신을 상실해 간다.
작품은 일반적인 네러티브적 방식에서 탈피하여 상징적이고 기하학적인 도형을 활용하여 제스처와 움직임으로 많은 의미를 대신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미덕은 디지털 기술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100% 전통적인 아날로그 방식의 수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기법은 종이 위에 채색(Drawing on paper)방식으로 초당 24프레임(필름기준)을 평균 2콤마로 하여 초당 12장 작화로 매장 배경과 동화를 함께 그려주는 쉽지 않은 방식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단편 애니메이션이 대부분 개인작업 방식을 택하듯이 이 작품도 감독 자신을 제외한 3명의 어시스트만을 두었는데 이들은 주로 원, 동화가 끝난 후 채색부분에만 집중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후반제작공정인 사운드작업을 제외한 촬영과 편집까지 감독 1인이 책임지고 가는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였다. 물론 제작비가 여유롭지 않아 선택한 방식이겠지만 연출자가 목표로 한 가장 최선의 완성도를 낼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필름 제작공정은 디지털 방식보다 제작단계에서 작은 실수로도 다시 작업하거나 촬영을 하는 등 안정된 작업이 쉽지 않다. 특히 타이밍의 경우 디지털방식에서는 쉽게 수정이 가능하고 다양한 효과와 기능으로 커버가 가능하겠지만 아날로그 방식에서는 매우 철저한 계획에 의한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너나 잘해!’의 경우 유일하게 디지털 방식을 사용한 곳이 라인테스트 공정으로 디지털의 기능을 활용하여 아날로그 방식의 단점을 보완한 경우라 하겠다.


아래는 ‘너나 잘해!’의 필름제작공정을 도표로 정리한 것이다.


즉, 원, 동화 작업을 한 후 스캐닝을 거쳐 컴퓨터에서 프리미어로 각 장면별 타이밍을 조절하여 전체 타이밍을 정한 후 부분적으로 수정하며 타임시트(Time Sheet)를 작성하였고 이를 촬영할 때 사용함으로써 불필요한 편집과정 및 촬영 후 수정사항을 최소화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를 통해 보다 좋은 타이밍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채색재료는 도화지 위에 먹과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였으며 육면체의 경우 로트링 펜과 색연필로 작업하여 깔끔하게 라인이 두드러져 보이게 하였다. 또한 반전된 배경은 검은 도화지를 사용하였으며 반전된 도형의 외곽선 형태는 흰색 색연필로 그려 넣었다.
이를 통해 무엇보다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이야기에 잘 맞는 조형적 스타일을 창출 할 수 있었으며 대상의 움직임 그 자체에 집중하게 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너나 잘해!’는 아카데미 작품으로 영화진흥위원회의 후반제작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면서 부족한 부분은 외부 인력과 시스템을 적절히 활용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촬영은 아카데미 35mm 애니메이션 스탠드 카메라 장비를 활용하였으며 노출을 맞추기 위해 색 온도계를 사용하여 화면 떨림을 막고 Drawing on paper기법의 특징인 level구분을 하지 않고 한 장씩 촬영하였다.
촬영이 끝나면 네가필름을 현상하여 16mm 러쉬필름(Rush film)을 만들어 감독이 편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네가 편집을 외부 프리랜서에게 의뢰했다. 이어 이를 텔레시네 (29.97, non-drop)를 떠 영화진흥위원회 녹음실에서 Foley음 위주로 한 사운드 작업을 DAT에 담아 광학녹음을 거치면 Sound Film이 탄생하게되고 색보정과 Sound Film과 네가필름을 합쳐 하나의 필름으로 Print 하면 최종 ‘Composite Film'이 완성되는 것이다.

‘너나 잘해!’ 는 애니메이션의 순수한 움직임의 특성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주 단순한 조형요소를 가지고 이처럼 시각적 흥미와 사고의 자유로운 유희를 통해 즐거움을 선사하는 작품은 국내에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타이밍의 연출과 사운드의 조화는 매우 뛰어나며 구체적인 형상과 서술적인 방식이 아닌 매우 절제된 단순한 조형언어로 간접 표현함으로써 자칫 진부할 수 있는 내용을 신선하게 표현하고 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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