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02
㈜제이엠 애니메이션이 최근 확장, 이전한 사무실로 정 미 감독님을 찾아가 보았다.
사무실은 디지털파트를 포함하여 원. 동화 파트가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배치된 여유 있는 공간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 안에서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드는 개성 강한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고 있었다.
드라마에서 보이는 것처럼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현실. 그러나 꿈을 향해 그룹을 리드해 나아가는 것, 애니메이션 회사를 이끌어 가는 일이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라 생각되었다.
제이엠미디어를 설립하고 회사를 경영하면서 가졌던 계획은 어떤 것이었나?
1997년 처음 회사의 문을 열었을 당시, ‘회사의 존재를 알린다’ 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 이듬 해 목표는 ‘차별화 된 이미지를 갖는 것’ 이었는데, 회사의 이름을 본인의 이니셜로 정한 것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자’ 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세 번째 되던 해에는 ‘내가 원하는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회사가 되기를 바랬다. 그것이 3개년 계획이었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피해의식이 없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기분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늘 염두에 두려고 했다.
애니메이션 일을 시작했을 당시 특별히 어려웠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애니메이션 회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5년 대원동화에 입사하면서 시작됐다.
처음, 애니메이션의 제작부에서 ‘진행’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때서야 생애 처음으로 우리나라에도 만화영화를 만드는 회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철저히 분업화되고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작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몸으로 부딪쳐 극복해 내려는 불굴의 의지로-소위 ‘노가다(?)’ 정신이라고 말하는- 작업에 임했던 것 같다. 어쩌면 오늘날 이만큼이나마 애니메이션의 붐이 일어나게 된 것도 다 그들의 피땀 어린 노력의 결실이 아닐까….
일본에서 온 아케히 감독(도에이 애니메이션 감독, 천년여왕 등 다수의 애니메이션을 감독)과 일하면서 인상깊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입사초기 소위 왕 초보인 시절, 일본 도에이 애니메이션사의 아케히감독님의 작품의 제작 진행을 맡게 되었는데, 워낙 까다롭고 무섭기로 소문난 감독이어서 제작에 들어가기 전부터 초긴장 상태였다. 아케히 감독의 에피소드를 너나 할 것 없이 내게 충고하듯 얘기해 주는 것이었다.
한 컷을 가지고 열번이 넘도록 리테이크(수정)를 내다가 결국은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였는지 본인이 직접 그 컷을 들고 담당자에게 찾아가 설득해서 끝내왔다는 일화였다. 그런 감독의 작품 진행을 아직 왕초보인 애송이가 맡게 되었으니 주변에서 보기에도 안타까웠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충고 반 걱정 반 여러 조언들 듣고 아케히 감독과 대면하게 되었다.
실제로 나는 그 3일 동안 30분 정도 의자에서 겨우 졸듯이 눈을 붙이고 일을 했던 것 같다. 긴장한 탓도 있었고 젊고 건강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3일 동안 뜬눈으로 일을 한다는 것이 머리는 슬로우 모션의 필름이 지나가는 것처럼 사고가 느려지고, 두 발을 허공에 붕 떠있는 것 같이 감각이 없는 느낌이었다. 오로지 무서운 감독님께 혼나지나 말자는 일념으로 본능에 의지해서 작업에 몰두했다. 문득 이러다 갑자기 죽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조차 들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막상 악명 높은 감독과의 첫번째 만남은 내 일생 일대의 커다란 지표를 제시해 주었다. 당시에는 꽤 나이가 드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카히 감독은 보통 사람들의 3,4배는 되는 일들을 거뜬히 동시에 처리했다.
촬영된 애니메이션의 최종 연출을 점검하는 것이 나와 했던 일이었는데
그 외에도 다음작품의 스토리보드를 짬짬이 그리면서, 이미 진행중인 또 다른 작품의 원화를 체크하는 일까지..정말로 열정적으로 작업하셨다. 그러면서도 작업 중엔 언제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열정적인 감독님을 보면서 나는 더욱더 최선을 다 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필름을 현상소에 보내고서 나는 책상에 고꾸라져 깊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 이미 아카히 감독은 일본으로 들어갔고 내 책상에 명함이 한 장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명함 뒷면에는 수고했다는 짧은 인사말과 함께 감사하다는 말이 적혀있었다. 아직까지도 아카히 감독이 보여주었던 일에 대한 열정과 즐기는 모습은 내게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고, 나 자신을 추스릴 수 있게 해주는 지짓대이다.
아케히 감독은 일본으로 돌아간 뒤 후배들을 호통칠 때마다, 내 이름을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그것은 일을 잘 해서라기보다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었을테지만, 그 말 한마디가 당시 어려운 환경에서 처해있던 내게 크나큰 힘이 되었다. 이 사건 아닌 사건을 계기로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몸소 체험했다.
그 후로도 대원에서 다양한 업무들을 진행했다.
1987년도에는 저작권이란 화두가 새롭게 떠오르던 시기였다. 일본에서 저작권을 가져와 법무사를 통해 일을 정리했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걸작 애니메이션, 토토로에 관한 일을 포함하여 직접 발로 뛰며 시장조사와 백화점의 구매담당을 만났다.
그러던 중, 같은 자리에서는 정체될 수 밖에 없다고 여겨져 발전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3D 애니메이션을 배워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운좋게도, 대원 사장님의 배려로 일본의 ‘레인보우 조형기획’이라는 회사로 연수를 가게 되었다. 그곳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가면라이더블랙’ 등 어린이용 SFX영화용 특수 이펙트 작업을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소위 특수 분장을 배우게 된 것이다.
91년까지 대원에서 일하다가 게이브미디어로 옮겼는데 참여한 작품은 무엇이 있는가?
1994년 당시 국내에는 애니메이션에 디지털을 접목시키는 전문가가 국내에 전무했다. 그런데 ‘게이브미디어’란 회사에 새로운 디지털 전문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요청을 받아 그곳을 찾아갔다.
게이브미디어에서는 ‘통통이 삼총사’라는 어린이 영어학습용 비디오 시리즈의 애니메이션 제작 준비가 한창이었다. 2편 분량의 동화가 끝난 컷들이 즐비하게 앵글에 쌓여있었고 단 두 사람이 그림을 스캔 받아, 여러 색상들을 칠해보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 수많은 컷들을 스캔받아서, 어떠한 방법으로 연결과 연출이 이루어질지 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황을 보고 마치 운명처럼 그것이 내 일이라고 느껴졌던 것 같다.
그렇게 ‘게이브미디어’에 입사하여 디지털 애니메이션 작업을 처음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그 작품이 아마도 국내 최초로 제작된 디지털 애니메이션 작품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불과 2,3년만에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회사들이 후반 작업에 있어서 디지털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이후, MBC방송국의 ‘귀여운 쪼꼬미’ 시리즈, KBS방송국 ‘TV유치원’의 ‘짱이와 깨모’ 시리즈, SBS방송국의 ‘가스안전’ 애니메이션 등을 필두로 많은 작품들을 작업해왔다.
그밖에 1998년 천계영씨의 HOT 뮤직비디오와 1999년 제일기획의 WOW 풍선껌 CF 등을 제작한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역시 천계영씨와 함께 작업했떤 WOW 풍선껌 CF 에서는 특히, 섬세하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노력했다.
1998년 즈음, 피터 정과의 함께했던 작업이야기
Honda 자동차의 미국판 CF를 만드는 일이었다.
거래처의 제작부 사람이 어느날 CF작업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함께 온 사람이 ‘피터 정’ 감독이었다. 처음에는 ‘피터 정’ 감독인줄 모르고 함께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원래 그 CF는 우리보다 훨신 규모가 큰 업체와 작업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실제 ‘피터 정’ 감독의 컷을 본 작업자가 카메라 웍이 어려워서 할 수 없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처음 피터정 감독의 그림을 펼쳐본 순간, 호흡이 멎을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그림이 너무나 좋았다. 그때까지 한번도 볼 수 없었던…그리고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그림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나는 정성껏 작품의 라인테스트를 했고, 그것은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왔던 그림에 대한 찬사이기도 했다. 그 후 작품이 끝나기까지 한달 정도의 기간은 지금까지 내가 이 일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 해왔던 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한 마음과 행복감을 느꼈었는지….
‘피터 정’ 감독 주변에는 늘 추종자처럼 많은 애니메이션 종사자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른다. 그리고 피터정 감독을 ‘엔돌핀 메이커’라고 말한다.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처럼 자신의 작품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붓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단지 함께 일을 하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다. ‘피터 정’ 감독과의 만남은 내게 또 다른 일생 일대의 사건이었다.
작업이 끝난 이후, 나는 또 한명의 ‘피터 정’ 추종자이기를 자처하며 아주 행복했다.
애니메이션을 사전에 기획하고 상품으로 ‘잘’ 포장할 수 있는 전문적인 에이전트가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실상 국내에는 대부분 애니메이션 감독이 작품제작을 하면서 홍보나 마케팅작업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일본의 경우, 그러한 부분에서 우리나라보다 훨씬 분업화되고 발달되어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일본에서의 경험은 어떠한가?
일본은 풍부한 컨텐츠를 가지고 있는 만큼 애니메이션의 역사가 오래되었고 수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대부분의 유명한 프로듀서들은 애니메이션 감독 출신들이 많다. 감독출신이 아니라도 애니메이션의 제작에 직접적인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해박한 지식, 넓은 인맥 등을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의 시장성을 넓혀왔다. 그것이 애니메이션 강국의 일본의 실제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나라에 전문프로듀서가 부족한 현상은 당연히 오리지널작품과 함께 경험이 부족한 이유도 있겠지만, 애니메이션이 어린이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져왔던 문화적인 인식의 부족에 기인한다. 좁은 시장성 또한 커다란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책적인 지원과 투자도 필요하겠지만, 문화적인 코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내야 하는 애니메이터들의 사명과 의무감이 절실하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들꽃처럼 자생력을 갖춘 몇 편의 작품들이 산업의 붐을 조성해 주었던 영화와 음악산업들의 예를 보더라도 애니메이션 종사자인 나 자신조차도 환경을 탓할 것이 아니라 우선 스스로가 좋은 작품을 향한 열의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일본 업체와 일을 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일본 사람들의 (일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우리 나라의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는지..
디지털 애니메이션에 있어, 국내에서는 선두 주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한 애니메이션 업체가 우리를 찾아왔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일에 대한 개념의 차이라면, ‘좋아하는 일에 대한 소중함과 가치관’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 애니메이터 중의 많은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배고프고 열악한 상황들을 놀라울만큼 잘 참고 견디는 것 같다. 돈을 벌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돈을 버는 배고픈 애니메이터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요즘도 초보 애니메이터들 중, 애니메이션에 관계된 일이 아닌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병행해 가면서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 애니메이터들을 볼 수 있다. 그것이 그다지 낮선 일이 아니라는 주변사람들의 말을 듣고 보면, 애니메이션이 좋아서, 또 이 일이 하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극복하려는 의지가 배가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의 천국이라는 말이 있는 것일까. 어쨌든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며 복잡한 마음이 든다.
한국의 애니메이터들이 일본으로 유학이나 일을 위해 가는 경우가 많은데…어떻게 생각하는가? 어쨋튼 넓은 환경에서의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커다란 재산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직접 보고 느껴서 스스로 걸러낼 것들은 걸러 낼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도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젊어서 많은 경험은 인생을 보다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윤활유 같은 것이 아닐까….
㈜제이엠 애니메이션의 5년, 10년 후의 앞으로의 청사진은 어떤 것인가?
모든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노력의 대가가 공정히 분배되는 회사를 만들어보고 싶다. 원화, 동화맨들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도 노력하고 싶고, 피해의식이 없이 기분 좋게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