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7-06
아주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만화를 보다가 마음에 드는 그림을 발견하면 뚫어지게 보곤 했다. 만화방에서 만화를 보면, 그림을 외웠다가 집으로 달려가서 바로 책상 앞에 앉아 똑같이 그려보았다. 그렇게 그리는 것이 좋아서, 만화책을 몰래 찢어 숨겨와서는 베껴 그리기도 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학교에선 늘 미화부장을 맡곤 했다. 또 전국미술대회에도 여러 번 나가 입상하게 되니, 서울예고에 특차진학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보수적인 부모님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모든 것에 흥미를 잃었었다. 나름대로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 만화가 밑의 문화생으로 들어가서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는 막연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관심 있게 지켜봐 주시던 미술선생님의
‘스토리 작가의 내용을 받아서 그림으로 옮기기만 하는 기술자가 되지 말라. 많은 것을 보고, 읽고, 체험한, 깊이를 가진 ‘의식 있는 진짜 작가’가 되라’
는 조언을 듣고 깊이 공감했었고, 대학에 가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고1때 광주 민주화운동이 있었다.
큰 형에게 광주항쟁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게 되었고, 그때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던 현실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 제대로 알고 싶은 마음에, 대학생 누나의 책장 속에 있던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 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이런 일들이, 정말 내가 살고있는 주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한참 생각했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현실들을 하나씩 하나씩 알게 되었다.
이 시기 이후, 대학에 가야겠다고 더욱 굳게 마음먹었다.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자신 있게 큰소리로 외칠 수 있는 ‘운동’을, 대학생이 되어서 제대로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해서 본격적으로 생각을 펼쳐보기도 전에, 화실에서 아르바이트로 녹초가 된 어느날 밤, 집에서 연탄가스를 맡아 그 이후로 며칠을 혼수상태로 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오른손을 포함한 몸의 오른쪽 일부가 마비되었었다. 최악의 절망스러운 날을 보냈고, 미친듯이 몸을 움직여서 겨우 기적적으로 몸이 회복되고 나서는, 또 폐결핵 말기판정을 받아 요양원에 들어가서 감옥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한 적도 있었다. 현실이 너무나 암담했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젊었고, 다시 시작 할 수 있었다.
대학 친구 중 한 명이, 집시법(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교도소에 들어가 있었다.
그 친구를 면회하기 위해 찾아가면서 만난 다른 친구와 이야기하던 중 애니메이션 일을 해 보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다.
1986년, 나는 애니메이션 회사의 ‘동화맨’으로, 그것도 인턴사원(당시 수습 3개월 간 매달10만원의 급료와 근로계약 체결 후 기본급 이외에 초과수당 지급, 야근비, 철야비, 숙소제공의 대우)으로 시작했으며 첫 작품은 ‘개구쟁이 스머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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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애니메이터들은 대부분 도제식 수업과정으로 경력을 쌓아갑니다.
동화파트에서 일하는 사람을 ‘동화맨’이라고들 부릅니다.
동화파트에서 3년정도 수업을 거치면(물론, 개인차는 있겠지요) 동화감독이 됩니다.
그리고 조금 더 경력을 쌓으면 원화를 그릴 수 있고요.
원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원화맨’ 이라고 부르지요.
원화에서 또 얼마간 경력을 쌓아야 원화감독으로 올라갑니다.
동화맨들은 대개 한달에 30만원을 법니다.
밤샘이 많고 늘 힘들게 마감을 맞추는데 좀 너무하지요.
처음 시작할 때 ‘교통비 정도 번다고 생각해라’고 하는데 그 말이 맞습니다.
한참 일 하던 중 회사가 무리한 사업확장 등의 이유로 사정이 악화 되었고, 사장은 직원들의 임금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은 생태로 잠적해버렸다. 난감한 직원들이 악에 받쳐 수소문 끝에 사주를 겨우 찾아내어 어렵게 형사고발을 했고, 마침내 사장은 임금을 약속한대로 지불하겠다는 ‘지불각서’까지 썼으나, 날짜가 명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국 직원들은 임금을 받지 못했다. 그 후, 사장은 연줄과 인맥을 동원해서 어이없이 풀려나게 되었다.
그 뒤, 1987년 ‘동화맨’ 으로 계속 일을 해오면서, 애니메이션 노조를 만들어보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50명 정도가 모여 논의를 시작해 보았으나 안타깝게도 별로 진전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일 하고 있는 애니메이터들의 현실은, 여전히 개선되지 못하고 계속 악화되는 듯 보였다.
90년대 초반, IMF 외환위기로 국내 경기가 바닥을 치고 있을 때, OEM방식으로 미국의 작품을 수주해 오는 대부분의 국내 애니메이션 회사들은 엄청난 환차익 특수를 만났다. 달러환율이 원화에 비해 가치가 급상승 했으므로, 달러로 결제 받아 원화로 환전하며 생기는 플러스 알파의 이윤을 회사가 그대로 남길 수 있었다.
많은 이윤들을 애니메이터들에게 되돌려 주기는커녕 사주의 배만 불려준 꼴이 되었다. 또한, 오히려 말도 안 되는 구실을 붙여가며, ‘IMF의 고통분담’의 차원이라며, 애니메이터들의 기존 단가를 깎았다.
이 밖에 수 많은 불공정한 사례들이 계속 되었으며, 이러한 현실속에서 직접 일하는 동안, 노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조를 만들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감독급으로서 경력을 키운 다음, 구심점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2년이 흐른 뒤, 비로소 1999년 7월, 애니메이션 노조를 만들게 되었다.
애니메이션 노조는 민주노총 전국문화예술노조, 애니메이션 지부로 편재되어 있다. 문화예술인 노조에는 여러 가지 분야가 있는데, 무용인, 연극인, 음악인 합창단 등 다양하다.
현재, 본인은 애니메이션 노조의 위원장과 동시에 민주노총 서울본부 남동지구 협의회(강남, 강동, 서초, 송파) 의장을 겸임하고 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2001년 9월, 당시 민주당 문화관광위원회 정범구 국회의원과 함께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노동 실태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정범구 의원의 비서관은 ‘전국 애니메이션 제작자협회’와 ‘한국 애니메이션 예술인협회’에 공식적으로 협조의뢰를 했지만 다들 회피하는 바람에 함께 조사작업을 할 수 없었고, 애니메이션 노조만이 협조하여 조사작업을 마치게 되었다.
조사결과로 애니메이션 산업의 열악한 환경과 부당한 대우들에 대한 사실이 드러났고, ‘전국 애니메이션 제작자협회’와 ‘한국 애니메이션 예술인협회’ 등과 같은 경영자들을 중심으로 한 협회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야기시킨 장본인들로서 그들이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협조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다음해인 2002년 7월3일,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와 민주당 정범구 의원실과 함께 ‘애니메이션 산업 기층인력의 근로환경과 복지정책에 대한 토론회’를 여의도 흥국생명 빌딩 대 회의실에서 개최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제작자협회나 예술인협회에서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애니메이션 경영자들의 그러한 안일하고 소극적인 태도, 현실적 문제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들이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애니메이터들이 느끼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인가?
- 하루평균노동시간 11.8시간, 연평균 소득은 1157.21만원에 불과.
위의 조사는 2001년 결과이지만, 3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 나아지지 안았다고 본다. 평균노동시간은 11.8시간이지만 마감시간에 맞추기 위해 밤샘작업이 일상화되어 있으며, 휴일근무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애니메이터들은 산재보험이나 건강보험에 가입된 적이 없다는 의견도 95.6%로 높게 나타나있다. 뿐만 아니라 연평균 소득은 1157.21만원에 불과한 것을 나타냈으며, 임금체불의 경우도 많은 편이었다. 이에 애니메이터들은 근로기준법(찬성 79.23%)과 최저임금제(찬성77.34%)가 적용되어 기초생활이 보장되길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애니메이션 노조활동으로 보람을 느낀 적은?
1999년 노조를 만들자마자, 동화작감 한 분이 퇴근 후, 돌연사 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분은, 반 프리(내지는 반 정직원)로서 기본급을 받고 초과수당을 받는 엄연한 근로자였으며, 회사 (H 주식회사)는 출퇴근 카드를 찍는 회사였다.
노조가 퇴직금 지급 고소, 고발을 하자마자 회사측이 즉시 카드체크기를 치워버렸으며, 애니메이터는 "개인사업자 산분"이므로 퇴직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뻔뻔한 논리로 대응했다.
결국 세 번에 걸친 회사측의 항소로 인해 대법원까지 가서 승소하고야 말았다.
그 당시, 그 회사의 사장은 제작자협회의 회장이었는데 그 사건을 계기로 그 자리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예손 스튜디오"를 시작으로 애니메이션 제작방식이 디지털로 작업방식이 바뀌면서, 기존의 셀칼라 애니메이터들을 대규모 정리해고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것은 다른 회사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는데,
도저히 묵과할수 없다는 판단하에 12명이 집단으로 퇴직금신청을 회사측에 요구하고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는 회사를 상대로 법정투쟁에 들어갔다. 이 사건은 2002년 10.24일 형사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퇴직금 지급 적법, 근로자 인정) 연이어 2003년 7.24일 민사대법원에서도 승소했으며, 이러한 판례가 남아있으므로 이제는 퇴직금이나 임금체불의 문제해결이 애니메이터들의 입장에서 훨씬 용이해졌다.
그 당시 법적절차를 밟기 위해 회사의 전세 보증금을 가압류로 걸어놓고 일을 시작했는데, 소송에서 이기자마자 은행에서 돈을 찾아 변호사 수임료를 뺀 나머지를 각자 나누어 가진 그 액수가 꽤 되었다. 애니메이터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돈(당연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이 생기게 되었었다.
이와 같은 퇴직금 투쟁의 배경에는, 90년대 초 애니메이션 제작방식이 기존의 셀 애니메이션에서 디지털방식으로 바뀌면서 드러난 셀 애니메이션 계통의 칼라 부 애니메이터들이 잔인하게 정리해고 되는 상황과 연관이 깊다. 노조 측의 요구사항은 셀 칼라 부 직원들을 디지털 재교육을 통해 재입사 시키라는 것이었지만 사측은 거부 했고, 그래서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기 시작했었다.
앞의 돌연사 한 작감은 근로자인데도 사측이 근로자 인정을 안 해서 벌어진 재판이었고, 뒤의 칼라부 직원들은 나라에서도 근로자인정을 안 해왔던 프리랜서 노동자들을 재판을 통해서 근로자인정을 받게 만든 사례로서,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쾌거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노조가 없었을 때는 체불이 발생하면 형사고발이 아닌 민사고발 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차일피일 끄는 민사소송에 지쳐 포기하는 사례가 대부분이어서 너무나 안타까웠었다. 그러나 노조가 생기고 나서는 여러 차례 승소한 판례가 남게 되었다.
이제는 형사고발과 민사고발이 동시에 가능해졌으며, 사측의 대표나 위임자가 노동부에 출석하게 되면 체불임금은 그 당장 나오게 되었다.
못 받은 임금에 대해 포기하거나 인정상 끌려 다니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현업에서 일하는 애니메이터들은 대부분 꿈을 위해 힘든 일을 마다하지않고 뛰어든 대단한 용기를 가진 반면, 순수하고 젊기 때문에 비양심적인 관행에 이용당하는 사례가 많다.
국내 경기의 불황이 꽤 오래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모두가 어렵겠지만, 현실을 자기 탓으로 비관하지말고 좀 더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노조를 운영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때는?
2000년도에 “남북한 노동자 축구대회”에 참가해서 강적 지하철노조를 꺾고 당당히 서울대표로 뽑힌 전적이 있다. 애니메이션 계통에는 축구팀이 13개가 있고, 나름대로 춘계, 추계 축구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축구에 대한 애정들이 많다. 그 팀들 중에서 잘하는 애니메이터만 골라 드림팀을 만들어 대회에 참가했으니 좋은 결과가 나온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애니메이션 노조 조합원 구성은 애니메이터뿐만 아니라 단행본 만화작가와 게임 프로그래머, 3D애니메이터 등 다양하다.
후배에 대해 조언을 한다면?
제일 어려운 부탁이다.
현재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관련대학의 수가 약 170개가 넘는다. 그리고 요즘도 계속 실업계 고등학교에 애니메이션과가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다. 거리거리 마다 애니메이션 관련학원도 많이 생겨났다. 교육부에서는 애니메이션의 ‘애’자만 들어가도 무조건 인가해주는 분위기 같다.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에 대한 이해 없이, 갑자기 불어난 애니메이션 학과들이 제대로 된 커리큘럼이나 장비들을 갖추고 있을지 의문입니다. 또 막상 그 많은 학생들이 졸업해도 취업이 되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유능한 인재들이 대학 이라는 곳에 들어가서, 썩어버리는 현실이다. 현업에서는 바로 일 할 수 있는 미싱사를 원하고 있는데, 열심히 재단만 배워서 나오면 뭘 하는가? 대부분 학생들은 졸업 후 당장 취업하기가 어렵다. 답답한 현실이다.
그래도 한 마디 조언을 한다면,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하라고 전하고 싶다. 식상한 이야기로 들릴 수 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력하라고……
언제 어디서든 그림을 열심히 그리시고, 스토리나 카메라 테크닉 같은 것도 연구해두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철학체계를 세우기를 당부하고 싶다. 인간애나 환경, 그리고 체재에 대한 고민 같은 것들 말이다.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을 보면 환경에 대한 고민에서, 다시 환경에 대한 환기로 끝난다. 상품화하기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순히 상품화에 대한 고민이라기보다 인류 보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호한다고 생각한다. 그런고로 소재발굴에도 주력하시면 좋을 것이다.
대개의 유명 감독들은 자신이 직접 스토리를 쓰곤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능력배양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애니메이션 노조는 앞으로도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의 민주화와 전체 비 정규직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힘차게 노력할 것을 다시 한 번 약속 드리고 싶다..
더 이상 바라만 보고 있지 말고 노조와 함께 이 난관을 뚫고 나갔으면 한다.
애니메이션 노조에는 젊은 피와 개혁적인 머리가 필요하다. 애니메이션 노조에는 한 달에 천원의 조합비를 내는 조합원들도 많이 있다.
이제 애니메이션 산업의 주체로 우뚝 서는 후배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후배님들!
같이 합시다.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 종사자들은 약 2만 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문화관광부 2002)
전체 200여 업체 중에서, 오직 10개만이 300여명을 거느린 대규모 업체이며, 15개 내외의 업체가 100여명을, 나머지는 50명 이하의 중소 영세 업체이다. 문제는, 애니메이션 관련 학과에서 매년 배출하는 졸업생이 4,500 여명이라는 사실이다. (문화관광부 추산 4,522명 2001년 기준) 여기에 해마다 사설학원을 졸업하는 수료생들을 합치면 꽤 어마어마한 수가 될 것이다.
상상이 되는가?
얼마되지않는 국내의 애니메이션 업체가 해마다 몇 명을 신입사원으로 뽑아야 그 많은 졸업생들이 다 소화가 될지? 어떻게 해야 모두 현업에 뛰어들 수 있을 것인가?
(단순히 수학적으로, 전체를 2만 여명으로 보고 위의 집계된 직원 수를 근거로 비례식을 만들어 계산해 보았다. 직원 수 300명의 대규모(?) 업체의 경우, 업체 당 한해에 67.5명의 신입사원을 뽑으셔야만 한다. –ㅁ-;; 말도 안 되는 숫자다. 너무 단순 무식한 계산식이기는 하지만 쉽게 이해해보기 위해서 한번 해 보았다.)
뜬금없지만, 아래의 표는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다가 발견한, 산업연구원의 2002년 조사 자료이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 한눈에 볼 수 있다.
위의 도표에서 프로덕션(제작) 부분에 있어 한국의 점수가 높은 이유는 하청제작 때문이다.
국내 애니메이션 종사자 중에서 하청이 79%, 창작이 12.1%, 재하청이 8.6%를 차지하고 있으며, 매출액 측면에서는 창작업체가 12개 업체로, 평균 7억4천만원(총 80억원으로 전체대비 5.2%), 하청제작업체가 41개사로 전체에서 66%를 차지하고 있으며 매출액은 평균 35억원이다. (하청제작업체 전체 매출액은 1,436억원으로 천제대비 92.4%) 재하청 업체는 10개 업체이며 평균매출액이 3억 6천이고, 이들의 전체매출액은 36억 정도로 추정된다. (문화관광부 2002)
다행히 2002년부터 2004년 현재까지, 많은 애니메이션 창작 작품들이 나왔고, 국제 페스티벌에서 수상도 했다. 위의 조사내용과 지금의 현실에는 또 많은 변화가 있었으리라 기대한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든 일본의 미야자끼 감독이 처음 ‘스튜디오 지브리’를 만들게 된 동기는, 애니메이터들이 안정적으로 작품에 전념 할 수 있는 작업실을 만들고 싶어서 였다고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급여수준은 그리 높지 않고 능력에 비하면 오히려 한국보다 더 적은 보수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지만 ‘스튜디오 지브리’나 ‘선라이즈’ 같은 회사의 경우, 애니메이터들에게 높은 수준의 안정적인 고정급을 준다. ‘선라이즈’는 성과배분제도 실시하고 있으며, 애니메이션의 흥행은 스타급 감독이나 프로듀서의 역할이 크다는 판단으로 고급인력을 철저히 키우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일본의 산업현장과 한국의 전반적인 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에 조직구성이나 모든 면이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제작사와 제작 인력들 사이에 ‘신뢰’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침체되어있는 국내 경기로, 더욱 안정적이지 못한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
월급 체불 문제, 카드 값 독촉에 시달리면서 연필 선을 제대로 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무실 시멘트 바닥의 침낭 속에서 휴일도 없이 새우잠자며 일하는 애니메이터들, 아무리 젊고 건강하다고 해도, 그렇게 버티다 보면 병을 얻기 쉽다.
재능 있는 애니메이터들에겐 그에 맞는 대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힘든 상황속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문제점들을 알리고, 제작사와 제작 인력간의 ‘신뢰’를 회복하고 관계를 개선하는데 애니메이션 노조가 힘을 쏟고 있다.
이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 또 애니메이션을 꿈꾸는 학생들이라면 조금 더 신중하고 깊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문제들이 많다.
이제는 애니메이션의 그림과 기술에 관심을 가지는 것과 더불어 애니메이션의 현장, 현장 속의 여러 문제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함께 숙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참고자료] 다음은 인터뷰의 이해를 위해 참고한 주요 자료들입니다.
애니메이션 제작종사자의 조직구조에 따른 직무만족에 관한 연구논문.
홍익대학교 광고홍보대학원 양준열 2003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구조적 특징에 대한 연구논문.
경희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박보경 2003
애니메이션 기층인력의 근로환경과 복지정책.
국회문화관광위원회 정범구 국회의원실/전국 애니메이션 노동조합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