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3-07
얼마 전 모교인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영화제에 다녀왔다.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영진위 산하의 국립 영화 학교로서, 영화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도 우수한 감독, 작가를 양성해 왔다. 독립 애니메이션계의 기대주로 우뚝 서있는 장형윤 감독을 비롯하여 ‘먼지아이’로 칸영화제에 초청되었던 정유미 감독, 2009 인디애니페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한 홍학순 감독 등 꾸준히 활동하는 많은 작가들이 이 곳 출신이다.
올해는 어떤 기대주가 배출되었을까 하는 기대감 속에 영화관을 찾은 나는 자못 눈길을 끄는 작품 하나를 발견하였다. 애니메이션 전공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을 들어봤을 법한 기법, 페인트 온 글라스. 그러나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그 기법 고유의 특성 때문에 큰 영화제에서 조차 찾아보기 힘든 기법 중에 하나이다. 이번에 관람한 장유경 감독의 ‘당신들이 사는 나라’는 이 기법으로 제작된 5분 분량의 단편 애니메이션으로서 상당히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준 페인트 온 글라스 작품이었다.
글 | 박재옥 애니메이션 감독(okyi98@naver.com)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페인트 온 글라스(Paint on Glass)는 말 그대로 유리 위에 그림을 그리는 기법이다. 유화처럼 비교적 빨리 마르지 않은 물감을 사용해 유리 위에 그림을 그리고 카메라로 촬영한 후 다음 프레임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얼핏 보면 단순한 제작 공정이지만 실제 제작에 들어가면 다른 애니메이션 기법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른 애니메이션 기법들은 공정상에서 ‘분업’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클레이나 퍼핏, 3D라면 모델제작과 애니메이션 작업이 분업이 될 수 있다. 2D애니메이션이라면 그림을 그리는 과정도 원화와 동화로 분리되어 더 세분화된 분업작업을 진행 할 수 있다. 하지만 페인트 온 글라스에서는 그런 것들이 허락되지 않는다. 한 장 한 장 작가가 애니메이션 타이밍까지 생각하면서 그려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에 대한 웬만한 열정 없이는 해내기 힘든 작업이다.
장유경 감독의 도움을 받아 페인트 온 글라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였다. 우선 페인트 온 글라스가 제작되기 위해선 위와 같은 애니메이션 스탠드가 필요하다. 애니메이션 스탠드가 없다면 비슷한 작업 환경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카메라 기법인 팬이나 틸트, 트랙 인 아웃 등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스탠드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겠다.
우선 스탠드에는 그림을 그려낼 캔버스가 되는 유리판이 멀티 레이어로 설치되어 있다. 배경과 인물의 움직임이 따로 애니메이팅 될 때 이러한 멀티 레이어가 종종 사용되기도 하는데 멀티 레이어를 사용하면 카메라의 초점을 이동시켜가며 작업을 할 수도 있다.
조명기기 또한 필수적이다. 작업은 주로 빛이 들어오지 않는 암실에서 진행되므로 유리 위에 그려지는 그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선 조명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여러 번 테스트도 거쳐야 하거니와 노출이나 색온도 등 전문적인 카메라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이런 부분은 필요하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또한 한번 셋팅해 놓은 데이터가 변경되지 않도록 카메라와 조명기기 등을 잘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사항이다.
카메라는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하고 있다. 페인트 온 글라스의 거장 캐롤라인 리프나 알렉산더 페트로프가 작업했을 시기에는 35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겠지만 디지털 카메라가 많이 발전된 지금, 작업의 효율성과 제작비 문제로 많은 작가가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고 있다. 장유경 작가 또한 5D Mark2 카메라로 촬영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디지털 카메라를 컴퓨터와 연결해 사용하면 촬영한 이미지를 바로 확인 및 편집할 수 있다.
물감은 빨리 마르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에 유화물감이 애용되지만 작품의 성격에 따라 포스터물감이나 과슈 등에 글리세린 같은 지연제를 희석시켜 사용하기도 한다. 장유경 감독에 의하면 유화는 색을 발하게 하는 것 같고 과슈나 포스터 물감 등은 색을 흡수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약간 탁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장유경 감독은 주로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붓이나 면봉으로 세밀하게 다듬는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에 기름(장유경 감독은 뽀삐유라고 불리는 것을 사용한다고 한다.)을 바르면 다음 그림을 그려나가기가 수월해진다고 한다. 기름을 적당히 머금은 물감은 수정하기도 비교적 용이한 상태가 된다는 것. 이렇게 한 장 한 장 그려나가는 동시에 카메라로 촬영을 해 나가면 한편의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그림이란 것이 컨디션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고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페인트 온 글라스의 속성상 작업 시에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컷 내의 작업은 되도록 한 번에 끝내는 것이 좋다. 물감도 마르거니와 애니메이션 타이밍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때문에 어두운 암실에서 작업하다 보면 밥 먹는 시간도 잊을 때가 부지기수이다. 또한 냉, 난방도 환기도 잘 되지 않는 공간에서 유화물감의 고약한 냄새를 맡아가며 작업을 하다 보면 몸에 무리가 가기 마련이다. 이런 공간에서 5분짜리 작품을 만들기 위해 2400장~ 3600장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야말로 자기와의 싸움이 아닐 수 없다.
졸업심사에서 김준양 평론가는 장유경 감독에게 앞으로 5-6년은 이 기법으로 계속 작업해주길, 아니 계속 작업해 달라고 약속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만큼 페인트 온 글라스 작업이 쉽지 않고 반면에 계속 해 나간다면 그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순수 미술 작가로 그 이력을 시작한 장유경 감독은 이제 그의 회화를 움직이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막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그녀의 그림처럼 작품활동도 꾸준히 이어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