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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 퍼플맨

2013-01-23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라는 필름이 상영되면서 영화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 영화의 가장 원초적인 형식미는 사실성이었다. 그것은 열차가 도착하는 과정을 그대로 담은 3분 분량의 필름으로, 이후에 조르주 멜리에스 감독이 ‘달세계 여행’을 만들기 전까지 지배적인 영화의 흐름이었다. ‘달세계 여행’에는 애니메이션 기법인 스톱모션 기법이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영화가 가진 환상을 가장 잘 표현해줄 수 있는 제작 기법이었다.

글│박재옥 애니메이션 감독( okyi98@naver.com)
에디터 | 정은주(ejjung@jungle.co.kr)

영화의 역사가 계속되면서 영화가 가진 사실성과 환상성의 경계에서 수많은 중간지대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가운데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극단에 있는 두 가지 장르가 있으니 그것이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이다. 어떻게 보면 물과 기름이라고 할 정도로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두 장르, 그러나 영화 형식의 발전은 결국 두 가지를 결합해낸다. 그 이름은 애니멘터리. 애니메이션이면서 다큐멘터리인 이 장르는 사전에조차 나오지 않는 신종장르이다.

이미 외국에서는 ‘라이언’이나 ‘바시르와 왈츠를’처럼 세계적인 영화제를 통해 잘 알려진 작품들이 있지만 국내에서는 그 역사가 깊지 않다. 작년에 영화제를 통해 선보였던 ‘퍼플맨’이나 ‘소녀이야기’ 같은 작품들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퍼플맨’은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가 굉장히 독특하고 의미 있게 결합된 작품이다.

‘퍼플맨’은 탈북자 김혁에 관한 이야기이다. 동시에 김혁은 이 영화의 나레이터이자 목소리 배우이기도 하다. 클레이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실제 주인공 김혁의 목소리가 덧입혀지면서 이야기가 가진 진실이 빛을 발한다.

김혁이 북한을 탈출한 이유는 간단하다. 배가 고파서이다. 하지만 남한 사람들은 배가 고파서 온 그를 자신들과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빨갱이란 말로 쉽게 정의해버린다. 김혁 자신은 빨갱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파랭이도 아니다. 우스꽝스럽게도 김혁은 자신을 ‘그럼 보라돌이가 아닌가?’라고 생각해본다. 빨갱이도 파랭이도 아닌 김혁은 원하든 원하지 않는 퍼플맨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퍼플맨’에서 교실 시퀀스는 매우 인상적이다. 남한에서 자란 회사 동료와 퇴근하는 버스에서 김혁은 어린 시절의 북한 교실을 떠올린다. 미국을 승냥이로 묘사하던 북한의 교실은 “공산당이 싫어요!”를 가르치는 남한의 교실로 이어진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미워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두 교실 공간의 대립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이 시대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대립은 공산당원과 사장으로 대표되는 지배자들에 대한 묘사로도 연결된다. 공교롭게도 김혁의 손을 못으로 내리찍는 공산당원과 컨베이어 벨트에서 김혁이 손을 다칠 때 천사처럼 내려와 “공장에서 다친 거라고 하지 말아라.”라고 말하는 사장의 얼굴은 같은 얼굴이다.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김혁은 여기가 북한보다 낫다고 말한다. 북한처럼 배가 고프지는 않기 때문이다.

‘퍼플맨’을 기획하고 제작한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의 김탁훈 교수는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를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미국 M-TV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의 수퍼바이저로 일할 때에도 정치풍자나 사회비판을 소재로 한 상업물을 많이 제작한 바 있는 그는 한국에 오면서 자연히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이데올로기를 다룬 작품 ‘퍼플맨’이 가장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 인물 김혁을 다룬 점은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배고파서 북한을 나왔다는 김혁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퍼플맨으로 변해버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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