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양(tyna@jungle.co.kr) | 2015-06-23
인터넷 시대를 달리 표현하면 ‘정보 과잉의 시대’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클릭 한 번에 모든 것이 해결될 듯했지만, 물밀듯 쏟아지는 정보 속에 웹서핑은 손가락을 끝없이 고문하는 과정이 되어버렸다. 영감을 갈구하는 디자인 종사자들에게도 정보 가려내기란 여간 성가신 문제가 아니다. 셀 수 없는 디자이너들이 웹 상에 포트폴리오를 게재하는 가운데, 볼 것이 너무 많아 무엇을 봐야 할 지 모를 지경이다. 이에 국내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해외 디자이너들을 선별해 그 작업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에디터 | 나태양(tyna@jungle.co.kr)
영국 런던 소재의 ‘컵 스튜디오(Cub Studio)’는 광고, 홍보, 방송, 브랜딩 영상 콘텐츠 창작을 전문으로 하는 애니메이션&모션 그래픽 스튜디오다. 애니메이터이자 감독 프레이저 데이비슨(Fraser Davidson)과 벤 스키너(Ben Skinner)가 공동 창립한 이래 ‘소규모(Boutique) 모션 그래픽&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표방해왔으나 런던에 이 정도의 스튜디오는 이미 차고 넘친다! 컵 스튜디오는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 린 프리츠(Linn Fritz)를 새로운 ‘*컵 멤버’ 로 영입하며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 ‘컵(cub)’은 곰, 사자, 여우 등의 새끼를 의미한다. 컵 스튜디오의 로고가 귀여운 곰돌이 형상을 띤 것과 관계가 있을 터. 고로 ‘컵 스튜디오’는 우리말로 ‘새끼 곰 스튜디오’쯤 되겠다.
창립자 프레이저 데이비슨은 스포츠 아이덴티티 및 브랜딩 전문가다. 애니메이션 제작사 ‘메인프레임(Mainframe)’에서 6년간 경력을 쌓은 뒤, 동료들과 공동 애니메이션 제작소 ‘스위트 크루드(Sweet Crude)’를 차렸다. 이후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한 ‘스위트 크루드’ 멤버들이 ‘사이먼 팁스(Simon Tibbs)’, ‘디나 매캔지(Dina Makanji)’, 그리고 ‘컵 스튜디오(Cub Studio)’로 각각 갈려져 나온 것. 데이비슨과 함께 컵 스튜디오를 세운 스키너는 십수 년 경력의 온라인 마케터로, 디자인 관련 분야의 사용자경험(UX)과 프로젝트 매니지먼트에 힘쓰고 있다.
7 STEPS TO ANIMATION
컵 스튜디오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영상은 ‘애니메이션의 7단계’다. “마카레나를 추려면 여덟 동작을 마스터해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7단계만 있으면 됩니다!”라는 대사와 함께 시작되는 이 유머러스한 비디오는 컵 스튜디오의 작업 프로세스를 단순하게 요약한다. “애니메이션과 모션 그래픽 문외한에게 컵 스튜디오의 제작 방법론을 빠르게 개괄해드립니다!”라는 설명처럼 애니메이션 캠페인 경험이 없는 클라이언트를 겨냥하는 듯하지만, 일단 영상을 보고 나면 진심인지 의심스럽다. 장난스럽게 직직 그린 캐릭터와 욕설로 보는 이를 키득거리게 하기 때문.
1단계, 브리핑(Briefing)
“당신의 목표를 듣습니다! 타깃, 마감, 비용과 함께 전달하고 싶은 스토리를 이야기해 주세요. 핵심적인 정보는 각본, *트리트먼트, 프레임 디자인에 반영됩니다.”
*트리트먼트: 각본 창작의 가장 초기 단계인 시놉시스(synopsis)에서 발전, 시놉시스보다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기술하는 단계다.
2단계, 각본 쓰기(Scripting)
“프로젝트가 밟아나갈 최초의 단계입니다. 자체적으로 제작한 스토리가 있건 우리에게 각본을 의뢰하건, 각본은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각본이 승인되고 나면 목소리를 입히는 과정으로 들어갑니다!”
3단계, 프레임 디자인&트리트먼트(Style Frame&Treatment)
“브리핑에서 나온 브랜드 가이드라인에 맞춰 키 프레임(key frame)을 제작합니다. 단순한 스케치 보드 수준이 아닌, 영상이 갖추게 될 모습을 정확히 담은 키 프레임입니다. 동시에 서면으로 트리트먼트를 작성하여 결과물이 무엇을 포함하고 어떻게 보일지 이해시킵니다.”
4단계, 목소리 입히기(Voice over)
“브랜드와 예산 조건에 적합한 성우를 찾아드립니다. 자체 음성을 보유하고 있거나 CEO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싶은 경우에도 기꺼이 도와드립니다. 아이폰으로 녹음한 음성만 빼고요!”
5단계, 애니메이션(Animation)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단계입니다! 음성의 길이에 따라 몇 주가 소요될 수도 있으니, 이전 단계에서 신중하게 승인해야 해요.”
6단계, 오디오 믹스(Audio Mix)
“모든 종류의 음향 효과가 추가됩니다. 성우의 거친 숨소리를 제거합니다. 음악 트랙을 얹습니다.”
7단계, 최종 승인(Sign off)
“클라이언트의 기술적 요구에 맞춰 애니메이션을 방영합니다. 이제 저흰 커피나 한잔 하면서 쉴게요!”
컵 스튜디오는 그린피스, 벤츠, 트위터, 페이스북 등 세계적인 기업들과 작업해왔지만, 그중에서도 스포츠 관련 콘텐츠에 유독 두각을 드러낸다. 데이비슨의 속도감 있는 애니메이션과 명랑한 유머 감각은 럭비, 미식축구, 크리켓, 농구 등 남성적인 스포츠와 찰떡궁합이다. 거기다 컵 스튜디오와 함께 작업해온 음향 전문가 모르간 사무엘(Morgan Samuel)의 센스 넘치는 사운드를 얹으면 화룡점정. 스포츠 방송 전문 채널 ESPN 같은 대형 클라이언트를 비롯하여 NCAA(미국 대학 체육 협회), RFU(영국 럭비 협회), NFL(미국 미식축구리그) 등 다양한 스포츠 관련 업체들이 클라이언트 목록을 장식하고 있는 이유다.
주요 작업
〈꽃에 부치는 송가(Ode to a Flower)〉
출처: BBC Horizon
목소리: Richard Feynman
애니메이션: Fraser Davidson
오디오: Morgan Samuel
BBC Horizon 시리즈의 일부로 제작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Richard P. Feynman)의 인터뷰 ‘사물을 발견하는 즐거움(The Pleasure of Finding Things Out, 1981)’을 활용한 개인 작업이다. 프랙털 구조를 응용한 연출로 만화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ARC 2012 TOUR〉
클라이언트: ARC(Alternative Rugby Commentary)
감독: Fraser Davidson
애니메이션: Fraser Davidson
오디오: Morgan Samuel
ARC의 2012년 투어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1990년대에 유행했던 16bit 그래픽 게임 스타일을 차용, 레트로풍의 영상을 제작했다. 데이비슨 특유의 유머 감각이 잘 드러난다.
〈자유주의자, 숙녀, 영국인을 위한 미식축구 가이드(Guide to Football: for Liberals, Ladies&Limeys)〉
감독&애니메이션: Fraser Davidson
각본: Fraser Davidson
목소리: Billy Baumann & Mark Brickey
오디오: Morgan Samuel
미식축구의 룰과 진행 방식을 설명하는 애니메이션으로, 컵 스튜디오의 장기이기도 한 ‘해설 영상(explanatory video)’의 대표적 예다. 마케팅이나 홍보 예산의 도움 없이 20만 건 이상의 뷰를 달성했다. 데이비슨은 이 작품으로 BASS 어워드에서 동상을 받았다.
〈VANAPALOOZA〉
클라이언트: High Gear Media/ Mercedes
제작: Tiny Toy Car
감독: Cub Studio
애니메이션: Pluto
100년 전 두 독일인이 맥주를 배달하기 위해 자동차를 고안해낸 시점부터 현재에 이르는 밴의 역사를 1분 30초 분량으로 압축한 프로모션 비디오다. 타이니 토이 카(Tiny Toy Car)와 메르세데스의 협조로 실제 모델을 참고, 영화 및 TV에 등장했거나 우리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던 상징적인 밴들을 담았다. 컵 스튜디오는 각본, 트리트먼트, 프레임 디자인, 최종 테스트에 참여했다.
〈과민성 미식축구 증후군(Irritable Bowl Syndrome)〉
출처: Bill Maher, 〈The New New Rules〉
연기: Bill Maher
감독, 애니메이션: Fraser Davidson
오디오: Morgan Samuel
데이비슨이 빌 마허(Bill Maher)의 에세이 〈새롭고도 새로운 규칙(The New New Rules)〉에 존경을 표하기 위해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빌 마허의 오디오북 음성을 사용하였으며, 인포그래픽 요소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리드미컬함이 돋보인다.
〈폴 스미스의 위대한 영국(Paul Smith - Great Britain)〉
클라이언트: Mother
제작: Joyrider
감독: Mother
애니메이터: Marcus Moresby, Fraser Davidson, Antonin Herveet
마더(Mather)사에서 ‘위대한 영국’ 캠페인을 위해 제작한 필름이다.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폴 스미스의 생각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애니메이션 시퀀스를 삽입했다.
컵 스튜디오는 글로벌 브랜드부터 소규모 신생기업(start-up)에 이르는 광범위한 클라이언트들과 협업해 왔다. 한동안은 해설 영상을 위주로 작업했으나 이제는 코미디 등 다양한 프로젝트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2013년에는 영국 BBC3의 풍자 코미디 TV쇼 〈혁명은 텔레비전으로 방송된다(The Revolution Will Be Televised)〉에 모션 그래픽 애니메이터로 참여, 영국의 영화 및 텔레비전 예술상 ‘바프타(BAFTA)’ 수상의 영예를 거머쥔 바 있다.
“아이디어의 소통, 개성 있는 모션 그래픽, 그리고 노력의 힘을 믿습니다.” 컵 스튜디오는 ‘클라이언트의 행복’을 지향한다. 열심히, 정직하게 일해 클라이언트의 기대를 능가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겠다는 목표다. 센스와 성실함을 겸비한 스튜디오, 어느 클라이언트가 마다하랴!
새끼 곰들이 빚어내는 유쾌한 애니메이션 세계를 더 깊이 탐험하고 싶다면 컵 스튜디오의 공식 홈페이지(www.cubstudio.com)를 방문해보자. 군더더기 없이 정리된 포트폴리오 목록만으로도 참고할 가치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