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18
문자메시지를 받고, 백화점의 전단지를 보고, TV를 보며, 미니홈피를 꾸미는 동안, 우리는 무의식 중에 헤아리기 힘든 수의 폰트를 만난다. 일상생활 곳곳에 숨어있는 폰트들은 이제껏 사람들에게 무언(無言)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고 있다. 사진식자체에서 출판, 인쇄, 웹, 모바일 폰트까지 그 입지를 넓혀,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강화시키는 새로운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까지 성장한 폰트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글 │ 편석훈 윤디자인연구소 대표이사
1960년대 초반, 일본의 모리사와에서 발명한 사진식자기가 우리나라에 도입되면서 주조, 문신, 조판의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한 활자의 시대는 지나갔다. 사진 조작에 의해 한 글자씩 인화지에 검게 인쇄되어지는 이 조판방식은, 렌즈를 사용해 정체 외에도 장체(condensed), 평체(extended), 사체(italic) 등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사진식자는 형태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크기 조절과 작업의 간편성, 인쇄과정의 편의성 등 기능성 면에서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이러한 사진식자기 활자의 글꼴은 우리나라 최고의 한글 디자이너라 불리는 최정호(1916~1988) 선생님에 의해 만들어졌다. 선생은 가로 세로 각각 5cm 크기의 종이 위에 글자본을 그린 다음, 자모조각기를 활용해서 납 활자부터 사진식자기에 사용되는 한글의 모든 원도를 디자인했다. 또한 현존하는 명조체, 고딕체, 궁서체 등의 원형 골격을 갖추어놓은 장본인이다. 그가 만든 한글 원도들이 현재 본문용으로 쓰이는 명조와 고딕의 전형이다.
이후 급격히 변화된 정보화 사회는 글자에 디자인을 덧입힌다. 특히 1990년대 이후 고밀도의 도트, 고해상도의 레이저 프린터의 출력기와 탁상용 출판 시스템(DTP: Desk Top Publishing), 전산조판 시스템(CTS: Computerized Typetting System) 등의 개발로 인해 전자출판 분야가 매우 활발해져, 글꼴 시장의 변화를 이끌었다. 초기에는 최정호의 명조체, 고딕체 등을 스캔하여 디지털화한 것이 활자꼴 개발의 전부였다. 근본적인 글꼴의 형태는 사진식자체와 같았고, 오히려 옮겨 그리는 과정 중 조형적인 완성미는 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폰트의 질과는 무관하게 전산활자체의 등장으로 사진식자체의 활용은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편리함과 변화무쌍함, 조판 가격의 경제성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전산활자체로의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붓글씨 문화에서 비롯된 명조체의 견고한 조형적 위치는 아직까지 절대적이지만, 컴퓨터라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서 폰트 디자이너들은 한글 폰트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89년 윤체를 필두로 머리정체, 아이리스, 솔잎체 등 전에 없던 한글 글꼴의 조형적 변화는 신선하게 다가왔고,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정사각형 틀 안의 폰트를 벗어나 새로운 개념의 글꼴을 모색하면서 한글 폰트는 빠르게 변화했다. 이는 제목용 폰트뿐 아니라 본문용 폰트에도 적용되어윤고딕 200번 처럼 사각틀을 벗어 던진 폰트까지 나타나고, 이 역시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전자출판 쪽에만 치우쳤던 폰트 환경이 점차 웹이나 모바일 폰트 디자인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출판편집용 폰트가 온전히 디자이너를 위한 폰트라면, 웹•모바일 폰트의 경우는 일반 개개인이 소유하는 개념으로 전개되었다. 이렇듯 디자이너에서 일반 사용자로 확대됨에 따라 폰트의 발전 방향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미니홈피나 블로그 등에서 폰트를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일반 소비자들이 폰트의 효과를 알게 된 것이 주효했다. 폰트 시장은 얼른 글꼴 제작 방향을 전자출판에서 웹•모바일 쪽으로 돌린다. 가독성을 중시하는 기본개념이 무너지고, 이미지나 아이콘 등을 폰트에 넣었다. ‘ㅇ’꼴에 하트, 별 등을 넣는다든지 아랫줄 맞춤한 민글자의 윗 공간에 특정 캐릭터나 이미지를 넣어 글꼴의 성격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웹폰트의 바람이, 지금은 점점 모바일 환경으로도 옮겨지고 있다. 애니콜랜드를 시작으로 모바일용 폰트 다운로드 서비스가 시작되었고, 그 시장은 점점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폰트는 점점 스타일로서의 성향이 강해진다. 개인의 취향을 반영하는 아날로그적 느낌의 손글씨체가 각광받으면서, 손글씨 위주로만 폰트를 국한시키는 경우도 있다. 또한 광고, BI, 영화 포스터 등에도 캘리그래피 스타일 폰트가 인기를 끌고 있다. 폰트 디자인의 기본으로 인식되어 온 정사각형 박스(EM박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들이 스크립트 폰트 시장을 형성시키고, 캘리그래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감성이 전해지는 아날로그 폰트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상승세다.
이렇게 폰트의 인식이 변화되면서, 기업 및 공공기관에서 자신들의 고유 이미지를 담은 전용서체를 만드는 사례가 늘고 있다. 기업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전용서체를 지속적으로 노출시키고, 시각적으로 일관된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자연스레 기업의 정체 성을 쌓는 것이다. 즉, 문자정보의 통일된 스타일로 브랜드의 이미지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최초의 기업 전용서체는 영국 지하철이 기업 이미지를 위해 만든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서체다. 이 전용서체는 1930년대 런던 우송국의 지하철 사인시스템 정비계획에 따라 에드워드 존스턴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후 1980년대 현대의 사용 요구에 맞게 보완해, 뉴 존스턴 이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 지하철 노선도와 일반적인 정거장의 표지판, 후원자들에 의해 발행되는 인쇄물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영문서체 중 세리프 서체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Times’체는, 영국의 대표적인 일간지
<더 타임스>
가 스탠리 모리슨에 의뢰해 만들고, 기업의 이름을 붙인 기업 서체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견고하고 사무적인 느낌으로 디자인되었기 때문에 신문뿐만 아니라 일반 서적의 본문 타이포그래피에까지 적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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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의 경우 국내 최초로 개발된 뉴스자막용 전용서체로서 기존 서체와는 달리 신속한 보도, 주목성, 전달성 등 뉴스의 특성에 초점을 맞춰 개발되었다.
삼성생명 전용서체는 균형감 있게 짜여진 공간배분과 특징적인 ‘ㅇ’ 꼴의 표현으로 시장을 선도했다. 글로벌하며 신뢰감을 주는 삼성생명의 이미지를 잘 드러낸 서체이다.
비씨카드 전용서체는 새롭게 제작된 비씨카드사 CI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새로운 스타일의 감각적인 영문과 숫자로 비씨카드만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고, 탈네모꼴 구조의 한글로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기존 로고타입을 바탕으로 젊고 현대적이면서 동시에 모던한 느낌을 주는 하나금융그룹 전용서체는 하나금융그룹만의 정체성과 그룹 전체의 통일성을 주고 있다.
현재 국내 폰트 시장은 다각화되고 고객중심적인 면모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인쇄, 출판에서 웹•모바일로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시장진입장벽이 낮아져 폰트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고, 상대적으로 전용서체는 사용자 중심적이고 전문화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폰트에 대한 인식변화는 아직 시작일 뿐이다. 예측해 보자면 앞으로 시장의 변화만큼 폰트디자인은 발전할 것이고, 상호 긍정적인 관계가 트렌드를 만들어 갈 것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