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헌 뉴미디어 아티스트(http://heavenlydesigner.com) | 2015-07-03
오랜 시간 우리는 과학의 ‘발견’이 공학의 ‘발명’으로 이어지고, 시간이 지나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는 과정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제 공학 또한 발견의 영역이 되어가는 듯하다. 공학의 산물인 테크놀로지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발견에서 발명으로, 나아가 일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크리에이터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기회를 누리기 위한 준비는 이제 어느 정도 갖춰졌다.
글 ㅣ 신기헌 뉴미디어 아티스트(http://heavenlydesigner.com)
게임 엔진 활용의 대중화
올 초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막 내린 GDC 2015(Game Developer Conference 2015)에서는 전 세계 게임 개발자들을 열광케 하는 소식이 전해졌다. 게임 개발의 핵심 도구라 할 수 있는 유니티(Unity), 언리얼(Unreal), 코로나(Corona), 소스2(Source2) 등 주요 게임 엔진들이 무료로 개방된 것이다. 과거 게임 엔진은 고성능 PC 환경에서 실행되는 묵직한 게임 개발을 위해 주로 사용된 도구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저가의 모바일 폰에서 실행되는 캐주얼한 게임은 물론, 도심 속 키오스크의 인터랙티브 디지털 광고나 미술관에 전시되는 미디어아트 작품에 활용되기도 한다. 실시간 인터랙션 가능한 물리 엔진이자 렌더링 엔진으로 최고의 성능을 보여주기 때문에 디지털 환경 작업 도구로는 가장 강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자가 많지 않았던 이유는 최고 수십억에 이르는 높은 비용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게임 엔진 개발사들이 서로 앞다투어 전면 무료화를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지금부터 또 다른 경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모두에게 동일한 도구를 사용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므로 앞으로는 누가 더 좋은 크리에이티브를 보여줄 것인지가 관건이다.
가상현실 경험을 위한 디바이스 대중화
이러한 흐름과 함께 오큘러스 VR(Oculus VR)이 개발한 HMD(Head Mounted Display)인 오큘러스 리프트(Occulus Rift)를 시작으로, 속속 등장하고 있는 가상현실 플랫폼은 게임 엔진의 대중화와 만나 새로운 기회들을 만들어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3세대 버전인 크레센트 베이(Crescent Bay)를 공개한 오큘러스 VR은 얼마 전 페이스북에 2.5조에 인수, 가상현실과 소셜이 만나게 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켰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세계 최대의 스마트폰 제조사인 삼성과 협업을 통해 삼성 스마트폰과 결합하여 구동되는 기어 VR(Gear VR)을 선보임으로써 최초로 소비자들이 가정에서 즐길 수 있는 가상현실 콘텐츠 플랫폼이 되었다.
가상현실 콘텐츠 생태계
우리가 가상현실 플랫폼에 주목하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새롭고 자극적인 경험이어서 만은 아니다. 물리적으로 한정된 공간과 경험만 있는 현실 세계와 달리 가상세계는 무한한 공간과 새로운 경험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과거 세컨드 라이프가 성공을 거두자 현실 세계의 도요타, 나이키, 아디다스 등 수많은 기업이 세컨드 라이프의 가상세계 속으로 달려와 매장과 광고판을 세운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지금의 게임 엔진과 HMD가 만들어내는 1인칭 시점의 몰입감은 세컨드 라이프를 보며 언캐니 벨리를 경험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게다가 스마트폰에서 시작된 앱스토어 유통망은 오늘 공개한 최신 콘텐츠를 누구나 구매하여 경험할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했다. 한번 구매한 콘텐츠는 업데이트를 비롯한 추가적인 DLC를 통해 끊임없이 소비자와 공급자 간 관계를 이어준다. 소비자들은 스스로 능동적인 크리에이터가 되어 자신이 만들어낸 콘텐츠를 또 다른 소비자들에게 공급한다.
*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 2003년 처음 선보인 가상현실 플랫폼으로 그 안에서 다양한 방식의 만남과 창작 활동, 경제 활동이 이뤄지며 가상현실이 가진 가능성을 확인시켜줌.
* 언캐니 벨리(Uncanny Valley): 로봇이 인간에 가까워질수록 호감도가 증가하다가 어느 정도에 도달하면 갑자기 그것이 강한 거부감으로 바뀌어 버리는 지점. 디지털 프로세싱을 통해 제작된 CG 속 캐릭터들로부터도 유사한 반응이 발생.
새로운 방식의 네트워크 경험
: 클라우드 게이밍 서비스의 강력한 콘텐츠 경험
이러한 콘텐츠를 구동하기 위해 필요했던 고성능 하드웨어는 네트워크 속도를 충분히 보완할 수 있었다. 엔비디아(Nvidia)의 GRID나 가이카이(Gaikai)와 같은 클라우드 게이밍 서비스들은 게이머의 컨트롤에 따른 모든 연산을 클라우드 서버에서 처리한다. 이후 시각적인 결과물만을 스트리밍으로 게이머의 스크린에 보여주는데(애플의 음성인식 서비스 Siri나 IBM의 인공지능 서비스 Watson Developer Cloud와 유사한 원리),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게이머가 전혀 의식하지 않을 만큼 서비스 품질이 확보되고 있다. 이제 네트워크 속도만 충분하면 게이머가 거실에 있든 길을 걷고 있든 상관없이 저사양 하드웨어에서도 서버의 강력한 연산 능력으로 생성되는 결과물을 만나볼 수 있다.
* 클라우드 게이밍 서비스(GaaS, Gaming as a Service): 콘텐츠 사용 권한을 가진 사용자들이 고성능의 서버상에서 구동되는 게임을 스트리밍을 통해 어떤 환경에서나 플레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서비스.
세컨드 스크린 환경의 양방향 콘텐츠 경험
이러한 테크놀로지는 N-스크린을 넘어서는 세컨드 스크린 개념을 통해 전에 없던 다수의 크로스 플랫폼상 콘텐츠들이 긴밀하게 인터랙션하는 새로운 방식의 크리에이티브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 세컨드 스크린(Second Screen): 추가적인 스크린을 통해 콘텐츠에 대한 맥락적인 정보나 부가 기능을 제공해주는 서비스
몬테로사(Monterosa)의 LViS 같은 서비스는 TV 생방송이나 공공 영역의 스크린 상에서 실시간으로 시청자들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통해 콘텐츠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기능을 제공한다. 콘텐츠를 경험하면서 퀴즈, 예측, 투표, 공유 등에 직접적으로 참여,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 BBC 인기 드라마 닥터 후와 AT&T이 함께 제작한 퀴즈 게임(http://www.monterosa.co.uk/cases/att-doctor-who-sponsorship-activation)이 LViS가 제공한 API 기반 HTML5 라이브러리의 웹앱 개발로 AT&T에 큰 광고 효과를 거둔 사례이다. 과거 단방향 커뮤니케이션의 대표 미디어였던 TV와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고 실행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던 스마트폰은 HTML5라는 기술을 통해 빠르게 연결되고 있다.
발견에서 발명으로, 그리고 일상으로
오랜 시간 우리는 과학의 ‘발견’이 공학의 ‘발명’으로 이어지고, 시간이 지나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는 과정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제 공학 또한 발견의 영역이 되어가는 듯하다. 공학의 산물인 테크놀로지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발견에서 발명으로, 나아가 일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크리에이터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기회를 누리기 위한 준비는 이제 어느 정도 갖춰져 있는 듯하다. 소프트웨어 영역의 오픈소스, 하드웨어 영역의 해킹, 빠른 실험과 검증을 위한 프로토타이핑, 거기에 강력한 동기의 근원인 메이커 무브먼트와 실행을 위한 크라우드 소싱,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하는 인프라나 플랫폼이 더해져 한없이 높기만 한 크리에이티브를 위한 테크놀로지의 장벽이 낮아졌다. 당장 우리가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발명이 아니라 그 가운데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들을 어떻게 연결해서 가치를 만들어낼지를 발견하는 일이다.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성공적인 인터랙티브 디지털 광고들이 매일 수 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 성공 사례들을 열심히 분석하는 것도 유용하지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테크놀로지를 만들고 사용하고 또 그것에 열광하는 대중 속으로 나부터 몸을 던져 보는 과감한 시도이다. 새로운 변화를 따라가려고 애쓰기보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자연스레 흘러가다 보면 어느덧 도달하고 싶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의 시작점에 도착해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나부터 변화의 시작점에 서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변화는 나를 넘어서 우리의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