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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온 건축 디자인

2008-05-20

우리나라에 지어지는 건축물이라고 해서 모두 한국의 다자이너가 디자인한 것은 아니라는 것쯤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건축물 가운데 외국의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건축물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국경을 넘어온 건축디자인을 만나보자.



건축 법규가 만든 사선, SK-T 타워의 디자인이 됐다
아론 탄

아론 탄(Arron Tan)은 OMA를 거쳐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렘 쿨하스의 제자이자 협력자 중 하나다. 렘 쿨하스는 막강한 꼬리표 때문에 ‘OMA 디아스포라(diaspora)’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들의 강점은 현대 도시와 사회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조사를 바탕으로 한 OMA의 실험적인 건축의 맥을 잇는다는 것. 싱가포르 출신의 건축가 아론 탄 역시 1994년 OMA 아시아를 설립해 출발했으며, 2001년부터 RAD(Research Architecture Design)로 설계사무소 이름을 바꾸고 아시아 주요 지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을지로의 구 SK빌딩을 재개발하려던 SK텔레콤은 기업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하길 원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건축가가 바로 아론 탄이다. 커뮤니케이션과 새로운 콘텐츠 제공을 통해 정보사회화를 추구하고 있는 SK텔레콤의 기업 이미지는 살짝 고개를 숙이는 듯한 제스처를 보여주는 절묘한 굴곡으로 형상화되었다.
도시, 사회와 소통하려는 의지를 표현한 이 굴곡은 사선 제한, 최고 높이, 건폐율 등 건축 법규의 제한 조건을 디자인으로 활용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 불규칙한 각도로 만들어낸 입면 커튼월이 선사하는 경쾌한 패턴은 밋밋한 박스형 오피스가 밀집된 을지로에 새로운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다만 역동적이고 인터랙티브한 빌딩을 기본 개념으로 아론 탄이 계획 설계했지만 기본 설계와 실시 설계는 한국의 정림건축과 진아건축이 진행해, 2005년 초 완공한 건물은 초기안과 차이가 있다. 공사 과정에서 건물이 넘어진다는 민원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이제는 익숙한 이 생동감 있는 빌딩의 사선이 한때는 다소 생소할 만큼 과감한 오피스 이미지로 비친 것은 당연지사. 도시와 사회, 개인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다양하고 새로운 콘텐츠 제공을 통해 정보사회화를 추구하는 SK텔레콤의 기업 이미지는 을지로에 자리한 SK-T 타워의 존재만으로도 어느 정도 성취된 셈이다.



교보생명의 새로운 표준을 만들다
마리오 보타

마리오 보타와 교보빌딩의 인연은 고 신용호 교보생명 창업자의 그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시작된다. 건축주가 직접 건축가를 선정, 오랜 시간 설계안을 검토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경우다. 심지어 신용호 회장은 강남 교보타워의 설계안을 결정하기까지 마리오 보타의 계획안을 15번이나 돌려보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건축주 입장에서 보면, 기존 시저 펠리의 설계로 완성한 광화문 교보 사옥을 전국에 무한 복제함으로써 굳어진 교보빌딩의 건축적 이미지를 마리오 보타를 통해 새롭게 업그레이드하는 듯하다.
지역성에 근거한 태도, 기하학적 대칭성, 빛이 주는 극적인 효과, 그 지역의 재료에 주목한 특유의 벽돌 마감 등 마리오 보타를 설명하는 많은 수식어는 오랫동안 이어진 그의 건축 특징이지만, 한국의 부산 교보빌딩을 거쳐 강남 교보빌딩을 통해 재현된 이 건축 어휘들은 안타깝게도 그 이상의 해석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대구 교보빌딩에 이르면 주변 지역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하고 반복되는 그의 건축 어휘가 슬쩍 진부해 보일 수도 있다. 지역적 아이덴티티를 강하게 드러내며 자신의 건축적 이름을 각인시킨 건축가이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표현적 특징만이 오브제처럼 자리한 것은 아닌가라는 평가다.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강남 교보타워는 높은 시공비를 감내해서라도 완성도 있는 건축물을 짓고자 한 건축주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강남대로의 상징적인 건물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이 준 특권을 충분히 누린 거장
다니엘 리베스킨트

1989년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설계자로 당선되면서 유명해진 다니엘 리베스킨트. 파편화된 건물에서 느껴지는 조형적 긴장과 파격,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시적 숭고함은 방문객에게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경험하게 한다. 이런 건축을 만든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한국 상륙기에는 우여곡절이 있다.
당시 이 건물은 다른 건축가가 일반적인 오피스 형태로 설계한 상태였다. 이후 사옥으로 변경되면서 현대산업개발 측은 세계적인 건축가에게 자사 사옥의 디자인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니엘 리베스킨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1.4m 폭의 입면 설계와 옥외 공간, 옥상 정원뿐이었다. “파사드 디자인 역시 흥미로운 작업이며, 모든 것이 결정된 제약 안에서도 창의력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한 그는 아이파크타워의 입면에 탄젠트라는 기하학적 요소를 과감히 그려 넣었다.
기술을 상징하는 직선, 자연을 상징하는 원, 그리고 그 접선에 해당하는 탄젠트가 과감한 사선으로 건물을 관통해 말 그대로 사옥은 그의 캔버스가 됐다. 이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건물을 서울 어디에 세울 수 있을까라는 측면에서 폭 1.4m의 입면을 다루는 리베스킨트의 거장다운 솜씨가 드러나지만, 동시에 ‘표피적인 건축으로서 조형물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비평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도시에서 거장만이 누리는 이 특권에 마냥 박수만 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당시 준공과 더불어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스타성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니, 현대산업개발의 건축 마케팅은 꽤 성공한 셈이다.



한국에 21세기를 선포한 디지털 건축가
UN스튜디오

벤 반 베르켈과 캐롤라인 보스가 설립한 유엔스튜디오(UN Studio)는 렘 쿨하스 이후 세계 건축의 주류를 이루는 네덜란드 건축가의 대표적인 후속 주자다. 이들은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디지털 툴을 활용해 기하학적인 구조를 발전시키거나 재료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하는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갤러리아백화점의 경우는 후자다.
2003년 ‘노블에서 노블까지’라는 마케팅 전략을 내세우며 독특하고 트렌디한 느낌을 유지하면서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던 갤러리아백화점은 유엔스튜디오에 건물 전면과 인테리어 디자인을 의뢰했다. 그리고 유엔스튜디오는 건물 외관에 4330개의 유리 디스크를 부착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덕분에 입면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 보이는 효과를 냈다. 특히 밤이 되면 일조량에 따라 역학적인 반사로 빛을 내뿜도록 설계한 유리 디스크 때문에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빈약한 예산에도 안양의 열정이 불러온 건축 거장
알바로 시자

알바로 시자는 20세기 마지막 모더니즘의 거장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의 건축은 단순히 모더니즘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건축가 김종규는 그의 건축 특징을 유럽 고전 건축의 정수와 포르투갈의 지역색에 모더니즘이 결합된 형태로 보아야 하며, 그런 이유로 알바로 시자의 건축은 지역적인 한계를 너머 동시대에 세계적인 입지를 갖는다고 설명한다. 1987년 알바알토상, 1992년 미스 반 데어 로에 재단으로부터 유럽건축상을 거쳐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이 거장은 콘크리트, 돌, 흰색 페인트와 같은 평범한 재료로 건축을 만들지만, 주변 대지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평범치 않은 공간을 펼쳐놓는다.
아시아 지역에서 그의 첫 프로젝트인 알바로시자홀은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낙후된 지역 유원지를 새로운 개념의 공공 예술 공원으로 만 들고자 한 안양시와 조직위원회의 열정은 빈약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건축가와 예술가를 한자리에 모았으며, 여기에 알바로 시자라는 거장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당시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 방문이 용의하지 않았던 시자는 자신의 파트너이자 보좌관인 건축가 까를로스를 안양으로 보내며 “내 귀와 눈이 되어 돌아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전시장으로 사용할 알바로시자홀은 유원지 진입로와, 넓게는 삼성산 자락의 자연경관에 반응해 ‘다양한 경관에 촉수가 뻗어나가 듯’ 유기적으로 구성된다. 기둥 없는 셸 구조로 단일한 내부 공간을 만들었지만, 움직임과 시선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풍요로운 공간 미학은 알바로 시자라는 건축가의 힘을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한정된 예산과 빠듯한 공사 일정으로 디테일과 천장 구조에서 원안을 완벽하게 실현하지 못했고, 안타깝게도 현재는 부분 보수공사에 들어간 상태다.
안양아트파크로 불리는 안양유원지의 공공 예술 프로젝트에는 알바로 시자뿐만 아니라 MVRDV, 비토 아콘치, 디디에르 피우자 파우스티노, 사미 린탈라, 구마 겐코, 엘라스티코를 비롯, 수많은 건축 예술가들의 재기발랄한 구조물과 설치 작품이 포함된다. 4km에 달하는 유원지에 이야기와 기능이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 전 구간을 연결하는 구성으로, 이는 조각공원과 같은 근대적인 감상공간이 아니라 시민의 참여와 경험을 유도한다는 탈근대적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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