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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앞 둘러보기

2013-02-01


경복궁을 자금성의 축소판 또는 자금성을 모방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중국의 자금성은 명나라가 세워지고 영락제가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기면서인 1406년부터, 1420년까지 지어졌다. 이에 반해 조선은 개국한 이듬해 종묘와 사직단을 만들기 시작해 1395년에 완공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경복궁의 공사도 뒤따라 완공하였으니 자금성보다 대략 11년 정도 앞선다.

기사 제공 | 도서출판 담디(www.damdi.co.kr)
원작 | 최동군의 나도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다 궁궐편
사진 | Rohspace, 담디

경복궁은 조선의 궁궐 중 건국과 동시에 제일 처음 기획하여 건설한 궁궐로 조선의 가장 교과서 적인 궁궐이다. 성리학을 나라의 근간으로 삼았던 조선은 궁궐을 세울 때 먼저 좌묘우사 제도에 의해 좌측에는 종묘를 그리고 우측에는 사직단을 건설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서양의 관찰자적 시각과 달리, 조선에서의 방향은 주인의 시각에서 결정된다는 점이며, 특히 궁궐에서 방향설정의 기본은 군주남면이다. 군주(왕)는 남쪽을 바라보면서 자리를 잡으라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주인인 군주의 좌측은 동쪽이 되고 우측은 서쪽이 된다. 그래서 경복궁의 동쪽에 종묘가, 서쪽에 사직단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또한 제후국(왕의 나라)인 조선에서는 궁궐을 만들 때 삼문삼조를 기본배치로 했다. 삼문삼조의 삼문은, 궁궐의 정문에서부터 궁궐의 정전(최고 건물-경복궁에서는 근정전)까지는 3개의 문을 거친다. 삼조는 궁궐전체를 3개의 구역(외조, 치조, 연조)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경복궁의 경우 3개의 문은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 중문인 흥례문,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으로 삼문이 줄지어 서 있다. 그리고 3조는 궐내각사(관청)로 채워진 공간인 외조, 왕과 신하의 정치공간인 치조,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인 연조로 구획된다.


궐외각사

궁궐도 나라의 일을 하는 곳으로 소관 업무에 따라 여러 관청들이 외조영역에 들어차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정부 부처들이다. 하지만 궁궐 내의 공간은 한정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궁궐 밖에도 많은 관청이 있었다. 따라서 궁궐 안에 있는 관청들을 궐내각사, 궁궐 밖에 있는 관청들을 궐외각사라고 한다.

광화문 사거리에 있는 고종즉위사십년칭경기념비는 궐외각사의 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많은 관청들이 건춘문과 광화문 앞에 몰려 있었다.


경복궁 방화의 진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에 불이 나서 전소된 뒤로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었다. 선조실록이나 류성룡의 서애집에는 임진왜란이 나자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가 자기만 살겠다고 백성을 버리고 야밤에 도주했고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난 백성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불을 질러 노비 문서를 태우고 보물도 약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노비문서가 보관되어있던 곳은 궐외각사인 장예원이었다. 그러니 노비문서를 없애려면 궁궐이 아니라 장예원을 태워야 했다.
또한 왜군의 종군승려인 `샤쿠 시타쿠`가 임진왜란 당시에 기록한 조선일기를 보면 왜군이 한양에 입성했을 때, 온전한 경복궁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경복궁이 불탄 시점은 선조가 도주한 이후 왜군이 오기 전에 백성들이 방화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의 개입으로 후퇴하던 왜군이 한양성을 불태울 때 종묘와 궁궐을 비롯한 모든 도성 시설들을 불태웠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게다가 우리의 기록 대부분은 불에 타는 것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불타고 난 후 폐허를 목격한 것이다. 또한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대부분 집권하고 있던 양반들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들 양반계급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무능함으로 전쟁이 일어났고 외적의 침입을 대비하지 못해 궁궐이 불탔다고 하는 것보다는 일반 백성들이 폭도가 되어 궁궐에 난입, 방화했다고 하는 편이 정치적으로 훨씬 부담이 적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동십자각과 서십자각 터

광화문에 들어서기 전 오른쪽(인사동쪽)을 바라보면 예전엔 궁궐의 일부였던 동십자각이 보인다. 그런데 동십자각은 궁궐의 담장이 아니라 섬처럼 도로 안에 고립되어 있다. 왜일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경복궁은 일본에 의해 극도로 훼손되었는데, 광화문도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로 옮겼다.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세우면서 정면방향을 남산에 있던 조선 최대규모의 신사로 맞추었고, 이에 따라 경복궁 궁궐 담장의 방향도 바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원래 궁궐담장의 가장 모서리에 있던 동십자각은 담장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길 가운데 섬처럼 홀로 서있게 되었다.
그래도 흔적도 없어진 서십자각보다 형편이 나은 편이다. 동십자각의 반대쪽인 왼쪽으로는 서십자각이 있었지만 지금은 표지석만이 그 흔적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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