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22
책가도의 은은한 풍경
공간의 새로운 변화는 도시의 즐거운 표정이다. 도시의 변해가는 속도감에 맞추어 낡은 기능을 제거하고 탄력 있는 모습으로 탈바꿈하려는 건축적 시도는 그 자체가 유쾌한 몸짓으로 다가온다. 점차 변화하는 흐름을 빠른 모습으로 담아내는 논현동 거리, 그 도로 한편에 지어진 지 20여 년 넘어 점차 퇴색되어 가던 무표정한 건물이 금융기업의 용도에 맞게 새롭게 변모된다. 그 드러난 모습은 다분히 정해진 틀 속에서 안정된 면모를 유지하려는 금융업무의 근엄함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매끈한 U글라스의 표면질감을 외벽으로 구성하고. 건물 하부를 낮게 둘러싼 게비온(돌망태)의 담장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선함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겉으로 보기에 은행이라기보다는 감각적인 옷으로 갈아입은 패션숍이나 문화시설로 오인하게 만든다. 이 건물은 그 동안 공간디자이너로서 다분히 건축적인 면모를 보여 온 르씨지엠의 디자인이다.
수직으로 패턴화된 건물의 표면은 불투명한 재질의 속성상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고 시간에 따라 살포시 내부의 표정이 겉으로 드러난다. 마치 부끄러움을 머금고 나타난 새색시의 불그스레한 얼굴을 보는 듯 적나라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보다는 한 단계 걸러주는 방식으로 내부공간의 움직임은 외부에 전해진다. 이러한 입면 표현방식은 책과 서재의 일상용품을 그림으로 담아 표현한 민화 책가도(책거리)에서 끌어온 것으로, 어릿어릿한 표정으로 건물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낸다. 외부에서 볼 때 비춰지는 건물의 입면은 사람들의 움직임, 가구들의 배열된 모습, 뚫려진 틈새로 보이는 자연, 오브제, 사인물 등의 다채로운 풍경으로 또 다른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하게 된다. Art Piece, Nature, Work, Rest로 계획된 입면의 다양한 영역구성은 면의 투명함을 통해 디자인 의도를 선명하게 표출한다. 높낮이를 달리한 투명함과 불투명함, 뚫려있음과 채워있음, 수직패턴과 수평의 날렵한 선으로 형성된 리듬감 있는 패턴감은 랜덤 하게 배치된 창과 어우러져 책가도의 새로운 건축적 면모를 이끌어내고 있는 훌륭한 건축적 장치인 셈이다.
소통의 언어와 느림의 풍경
건물은 기존보다 2개 층이 높아져 전체적인 볼륨감이 확장되었고 그로 인해 마련된 5층과 6층은 한껏 넉넉한 공간구성을 제시한다. 내부공간 구성은 기존의 시설들을 활용하고 필요한 부분만 덧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하부층은 전체적으로 화이트한 색감을 배경으로 레드와 블랙을 통해 포인트를 주었고 부드러운 자연광을 유입시켜 밝고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증축되어진 상층부의 바닥은 데크로 처리하여 자연스러움을 더했고 높낮이를 달리한 층을 계단과 브릿지로 연결함으로써 공간의 레벨차를 원활하게 이어주었다. 서로 다이나믹한 관계성을 갖는 상부층의 보이드된 공간과 건물사이의 빈 공간, 데크의 영역에는 느티나무, 팥배나무, 배통나무와 같은 친숙한 나무들이 조성되어 풍성한 자연의 기운을 곳곳으로 퍼뜨리고 있다. 이는 도심 속 옥상공간을 조경 처리함으로써 후면의 산자락과 연속성을 가져감으로써 서울의 녹지축에 일조하게 함이었다. 이렇게 도심에 깃든 여유로움으로 조성된 옥상 데크는 휴식의 공간이자 만남의 공간으로 사무공간의 쾌적함을 유도하고 있다. 그 건물 사이로 비어있는 틈 사이로는 도심의 풍경이 프레임화되어 들어오고 전망 데크 한쪽에 옥상 조경된 나무를 배경으로 멀리 도시의 원경과 산자락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느림의 풍경은 내부공간으로 잔잔히 스며들어 업무공간에 활력을 불어넣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렇듯 새롭게 증축된 빌딩 공간은 효율적이면서 기능적인 입면계획,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공간계획을 통해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멋스러움이 유지되는 부드러운 업무공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디자이너가 W뱅크에서 강조하고자 것은 건물의 새로움 속에 배어있는 오래됨이다. 이는 무조건 새로운 것으로 채우고 기존의 낡은 것을 잘라내기 보다는 과거의 흔적을 유지한 채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을 표출할 수 있다는 지혜를 보여준다. 그것은 급변하는 도시환경에서 반드시 오래된 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교체하기보다는 과거를 존중하고 재구성함으로 통해 공간디자인의 의미를 찾아가고자 하는 디자이너의 깊이 있는 생각을 보여준다.
“우리는 대부분 본 것을 말하고 기록하고 그 의미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여짐(Reality)에 너무 집착하면 상상력이 결여되기 쉽고 결국 공허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본다는 것은 눈을 마주하고 소통하는 것이기에 그 본질을 꽤 뚫고 이를 디자인의 주축에 세워두고자 한다고 디자이너 구만재는 강조한다. 그 동안 여러 분야의 디자인으로 실험적인 시도를 보여 온 디자이너이기에, 또한 공간디자인 작업이 사회와의 관계성에서 이루어지는 산물이기에 계속적으로 경험하고 소통하려는 참신한 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한 디자이너의 창의성은 금융권의 고정화된 사고와 마주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현실적 제약을 딛고 당당히 자신이 읽고 추구하는 디자인적 가치를 반영하게 된다. 그 작업과정에는 장소가 가지는 의미와 지금이라는 시대성을 세세하게 갸름하고 더욱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도가 배어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디자이너의 ‘본다는 것과 보여 진다는 것’의 해석과 디자이너가 공간에 담고자 한 중첩된 시간과 책가도의 오롯한 풍경언어를 읽어볼 수 있게 된다.
취재ㅣ김용삼 사진ㅣ박완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