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03
지금처럼 아트북을 쉽게 접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아티북이나 잡지 그리고 서적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지금처럼만 있었다면, 과거의 우리들은 분명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 시작점인 포스트 포에틱스가 이태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에디터 | 이안나(anlee@jungle.co.kr), 사진 l 스튜디오 salt
한팔 너비만한 입구는 통유리문이다. 재끼고, 3층까지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포스트 포에틱스라는 작은 현판이 보인다. 자연광을 오롯이 받은 흰 벽과 표지가 보이도록 열 맞춘 서적들. 창 밖은 가로수 나무의 무성한 잎만 보인다. 그저 계단을 올랐을 뿐인데 공중에 붕 뜬 누각에 온 듯이 느껴지는 이 생경한 공간은, 상수동서 이태원으로 자리를 옮긴 포스트 포에틱스다.
포스트 포에틱스는 2006년 봄, 동경을 여행하던 조완 디렉터의 상상에서 시작됐다. 그는 우연히 나카메구로 지하철역 근처의 작은 중고 아트북 전문 서점 ‘아트 버드 북스(Art Bird Books)’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일본에서 유명한 독립 배급사 유트레흐트(Utrecht)를 보았다. 당시에도 동경은 이미 전문 서점이나 갤러리 외에도 편집 매장이나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아트북을 볼 수 있었으며 특히, 작은 규모의 배급사들이 음반이나 서적, 의류 등의 활로를 개척해 나가는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그 후 약 6개월이 지난 2006년에 포스트 포에틱스는 문을 열었다.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정기 간행물과 아트북 등 해외의 창작물을 선별해 온지 3년 남짓 흘러 오늘까지 왔다.
포스트 포에틱스의 아트북을 떠올려보면, 그들은 이태원과 참 잘 어울린다. 사실은 아주 우연적인 만남이었다. 물망에 오른 지역 중 한 곳이었던 이태원에 들러 잠시 쉴 겸 가로수에 기대었는데 무심히 올려다 건물이 바로 지금의 자리다. 창문에 임대라고 적혀진 작은 종이가 팔랑거리고 있었으며,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외관에 주변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하지만 3층에 오르니, 건물 높이와 비슷한 가로수가 앞뒤로 서 있어서, 창 가득히 나뭇잎이 무성했다. 이태원의 포스트 포에틱스를 들른 사람이라면 안다. 나란히 선 가로수 사이에 늘어진 그물침대 같은 나른함과 생경함.
건물의 공간에 들어서면 큰 자릴 차지하는 나무가 있다. 야자나무의 일종으로 개업 당시 선물 받은 것이란다. 오랜 시간 화원에서 판매되지 않아서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멋이 있다. 아직은 옥상이 텅 비었지만 곧 작은 정원을 꾸밀 계획도 있다. 평소 원예나 조경에 관심이 많아, 정기적으로 화원을 방문하거나 직접 채집하기도 하기에 큰 무리는 없을 거라고.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카펫이다. 인조석 물갈기(도끼다시) 바닥을 보존하기 위해 궁리를 하던 중에, 집에서 쓰지 않는 카펫을 깔아 봤다. 사실 사진으로 본 포스트 포에틱스에서 가장 감각적이라 여긴 부분 중 하나가 카펫이었다. 직물이 주는 따뜻한 느낌으로 콘크리트 바닥을 덮은 것이 인상적이라고 하자,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카펫을 본 중년의 고객이 대뜸 이 카펫은 구하기 어려운 고가로 보이니 잘 보관하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어느 외국인 고객은 카펫에 영감을 받아 집에 카펫을 깔았다고 말하며 사진까지 보여줬다고 한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카펫이지만, 사실은 집에서 가져와 시험삼아 깔아보고 나쁘지 않아 주변에서 기증을 받은 것들이다. 포스트 포에틱스의 안락함은 그들의 별스럽지 않은 ‘감각’ 덕이었다.
이전을 정하고, 다시 찾은 포스트 포에틱스 공간은 아주 황량했다. 3층은 오랜 시간 비어 있었고, 천정 마감과 여러 겹의 페인트 그리고 벽지가 지저분하게 발라져 있었다. 작업은 우선 복도의 벽을 허물어 계단을 노출시키는 것부터 진행 되었고, 철거 이후 모든 과정은 포스트 포에틱스 가족과 친구들의 솜씨다. 전기 배선, 미장, 도색 등의 기초적인 작업부터 매장에 쓰일 가구까지 손수 디자인하고 제작했다. 엄두가 안 나는 대공사였지만 재단에서 조립, 마감까지 전 공정을 손보고 나니, 완성도를 떠나 뿌듯 할만했다.
포스트포에틱스는 그들이 가진 아트북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우선 그들은 서적을 선정하는데 모두 영문 혹은 영문 병기로 되어 있어야 하고, 지나치게 전문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기반으로 깔려있다. 그 외에는 특별히 제한을 두지 않고, 개방적인 시각으로 책을 선정한다. 다만 사업 초기보다 개인적인 취향을 뒤로 미뤘다. 지속적으로 일을 꾸려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서재와 포스트 포에틱스를 분리해야 했다. 그것이 옳은 판단이었음은, 꾸준히 오름세인 그들의 성장 속도로 미루어 알 수 있다. 현재 그들이 기대하는 게 있다면, 상업적 성공이나 발전보다는 예술 서적에 대한 인식이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포스트 포에틱스 같은 배급사가 많아 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덧붙이자면, 이들같이 규모가 작은 출판• 잡지사들은 서적의 견본을 받아보고, 검토한 후에 배급을 결정한다. 책을 사러 외국엘 나가기도 하냐고 물으니, 낭만적인 배급과 배포는 지속적인 사업을 방해한다고 못 박는다. 환상은 금물, 그들은 성실하게 보고 읽고 따져 보면서 책을 가져오고, 알맞은 가격에 판매한다. 보통의 서점과 다를 것 없다. 기가 막힌 책들을 파는 것 빼고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