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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 리뷰

디자인 호텔 애니; Design Hotel Any

2003-09-02

경제생활의 여유로움과 자동차 문화의 폭발적인 확산으로 도시의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나려고 한다. 그 떠남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만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설레임과 고민을 함께 가지고 그들만의 여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비록 잠시 동안이라고 할지라도 낯선 땅, 낯선 환경에서 여행객들은 어쩔 수 없이 머무름과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타지에서 느끼게 되는 일종의 낯설음과 얼마간의 휴식과 환희를 기대하며…. 길고 넓게 펼쳐진 백사장, 갈매기의 비행이 일품인 아름다운 바닷가, 해운대는 그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관광명소이다. 1.8km에 달하는 백사장 뒤편으로는 각종 숙박시설들이 즐비하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수많은 호텔과 모텔들이 밤이면 연실 “내게로 오라”며 화려한 불빛으로 손짓하고 있다. 가히 모텔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숙박공간들은 무늬만 최고이지 뚜렷한 개성미를 지니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어쩔 수 없이 하룻밤 자다가는 그저 그런 곳. 비록 편리한 시설들로 중무장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겠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특색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 속에서 여행객들이 갖게 되는 설레임과 소중한 추억을 도외시한 지극히 상업논리(객실 수 늘리기)와 편의주의(몰개성적인 공간)를 쫓는 모텔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호텔애니(이하 애니텔)는 “그저 그런류의 모텔이 하나 더 늘어났네”라는 모텔흐름에 조용히 반기를 들고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애니텔은 숙박시설지구 안쪽 블럭 골목 변에 조용히 자리를 틀고 있다. 높다란 주변건물들로 삼면이 둘러싸여 언뜻 보기에 잘 눈에 뜨일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요란하지 않은 깔끔한 외관과 사인, 은은하게 비추는 조명, 그만의 특별한 디자인 컨셉으로 장소의 제약성을 역으로 극복하고 있다(디자인이 반영되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차량동선과 고객동선을 적절하게 분리하고 진입부는 컨베이어벨트로 처리되어 자연스럽게 건물로의 출입을 돕는다. 아담한 로비에는 각 실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월이 마련되어 있다. 엘리베이터 앞 천정부분에서 떨어지는 유리장식은 조명을 받아 한껏 빛나며 안락과 환희의 장소로의 초대를 축하하는 듯 하다. 재미있고 아름다운 공간에 자주가고 싶은 것처럼 훌륭하게 디자인된 공간 역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그곳을 찾고자 하는 여행객들을 불러들인다. 공간과 장소가 뿜어내는 매력은 대중의 자연스러운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겠지만 그 공간의 특별함과 미적 공간틀을 동반한다면 그 빛은 배가되는 것이다. 더구나 휴식과 환희의 집약공간인 모텔공간에서 나름대로의 특별한 장소성을 갖기 위해서는 무언가 차별화 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다. 물론 그것이 바로 여행객들에게 추억의 장소로 인식되게 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그 모텔만이 가지는 특별한 디자인 컨셉을 함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뜻 깊은 장소로 여행객들의 가슴 속에 기억되며 이는 수익성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여행에 대한 소중한 기억. 디자이너 유정한은 모텔을 디자인하면서 자신의 경험과 감성에 차곡차곡 쌓인 오래된 흔적들을 곱씹어 보고 이를 디자인 모티브로 끌어들인다. 각 나라의 일정한 풍물을 그대로 흉내 내어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미니어쳐와는 사뭇 다르다. 나라마다 간직하고 있는 고유의 토속성, 색채와 향기를 시각적·감성적으로 끌어들이고 어느 정도 여과를 통해 이를 디자인에 반영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중국(화양연화), 일본(게이샤), 프랑스(물랑루즈), 지중해(카프리), 모로코(페즈), 아프리카(마사이), 인도(카마수트라)의 일곱 나라 일곱 컨셉룸 애니텔인 셈이다. 애니텔은 어줍지 않은 여느 모텔들과 달리 그만의 특별한 향기가 풍겨진다. 각각의 컨셉룸은 나름대로 완성도가 높고 깔끔하게 정제되어 있다. 요란하지도 군더더기도 많지 않다. 비록 웅장하거나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모텔이란 극도의 제한된 공간 내에서 여행객들이 직접 보고 느끼며 체험할 수 있는 공간색을 발하고 있다. 마치 길지 않은 하룻밤이지만 피곤에 지친 여행객들에게 잠시나마 이국정취를 느껴보도록 하는 것이다. 금빛 액자틀로 처리된 객실 입구의 프레임을 통해 애니텔의 공간체험은 동화 속 그림같이 시작된다. 흡사 이국적인 향연으로 초대를 의미하는 듯. 모텔의 기능성에 따라 처리된 육중하고 화려한 원색문을 열고 들어서면 다시 한번 호기심을 유발하려는 듯 내부로 통하는 여닫이문이 객실로의 시선을 걸러준다.


예술과 패션의 중심지 프랑스를 모티브로 한 프랑스방은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침실과 레벨차를 둔 욕실은 개방감이 한층 강조되어 있다. 욕조가 실 밖으로 나와 있고 침대 라운드형 헤드보드 반대편이 세면대가 자리한다. 침실은 가히 도발적이다. 원형의 침대 천장에는 금색 테두리의 볼록거울이 매달려 있어 침실의 은밀한 행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천정면에는 침대헤드보드 상부에서 업라이트된 조명등과 욕실을 비추는 브래킷, 침실을 비추는 촛불모양의 스탠드조명이 한껏 운치를 더한다. 욕실의 흰색 타일과 꽃무늬 문양의 실크벽지도 밝고 화사한 공간색을 추구한다. 지중해의 파란 하늘과 농도 깊은 바다를 연상케 하는 지중해방은 파란색 여닫이문을 통해 시작된다. 내부는 파란색과 흰색의 색채 대비로 시원스럽기까지 하다. 흰색의 회벽마감 벽체에는 4개의 유리장식을 걸친 촛불모양 브래킷이 공간전체를 밝게 비춘다. 침실 머리맡의 파란색 이미지월과 욕실공간의 파란색 타일이 화이트한 공간과 대비되어 산뜻한 느낌을 연출한다. 침대의 갈색 스틸프레임 상부에 걸쳐진 흰색의 천개는 짙은 황토색의 타일바닥으로 싱그럽게 흘러내린다. 각 나라마다 처한 기후와 토양색을 통해 이끌어 낸 황토색의 타일바닥은 모로코방에서도 연한 색채에로도 이어진다. 마스지드(이슬람교 사원)의 건축양식을 현대적으로 적용한 모로코방은 아치형틀, 회벽으로 마감된 벽면의 아트페인팅으로 처리되어 아랍문화의 공간색을 느낄 수 있다. 레드풍의 강렬한 유혹으로 표현된 중국방은 애초부터 특실로 계획된 공간이다.


침실 이미지월은 붉은 색의 장식벽지가 시선을 자극하고 중국 전통등을 형상화한 브래킷이 내부공간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욕실과 접한 벽면 또한 붉은색 장식유리로 처리되어 분위기를 더하고 침실 맞은편에는 붉은 색상의 쇼파와 현대적인 중국여인의 그림이 공간을 풍성하게 한다. 레드포인트는 욕실벽면에서도 연속되어 에로틱한 공간색에 일조한다. 그 방 한가운데는 양면을 통해 TV장과 화장대로 이용할 수 있는 가구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가구만으로도 공간을 적절히 분할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방은 다다미식 분위기가 느껴지도록 침대를 없앤 점이 특징이다. 침대 이미지월에는 전통의상을 입고 악기를 타는 요염한 이미지가 실사로 부착되어 있고 바닥에서 우러나오는 빛에 의해 조도를 부드럽게 유지한다. 벽면 한쪽에 부착된 베개모양의 패브릭 조명 은 에어콘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며 바람이 불면 하늘하늘거리는 조명색을 통해 공간의 역동감이 연출된다. 인도방은 글래스 위 이슬람건축 문양과 카마수투라 그림을 실사하여 장식한 이미지월이 유독 눈길을 끈다. 고대 인도인의 성애에 관한 경전을 담은 카마수트라를 통해 은밀하고 즐거운 유희와 성애의 길을 표현하고자 한 것일까. 성애의 기교, 소녀와의 교접, 아내의 의무, 남의 아내와의 통정, 유녀, 미약 등에 관해 논술한 카마수트라. 그 노골적인 그림을 통해 이 공간이 바로 성의 공간임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사막과 열대우림 사이의 열대초원을 컨셉으로 끌어들인 아프리카방은 원시적이고 자연그대로의 분위기를 선사한다. 침실과 세면대 영역의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호피무늬 벽화는 흡사 사바나지역의 맹수 표범의 무늬를 연상케 한다. 욕실과 침실 사이에는 형형색색의 구술에 구멍을 뚫어 엮은 비즈(Beads)가 상부에서 바닥까지 수직으로 월을 형성한다. 비즈월을 통해 보여지는 움직임은 사뭇 토속성과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듯하고 실내에서 벌어지는 동적 움직임은 더욱 육감적으로 다가온다.

이번 모텔디자인은 디자이너가 선보인 첫 번째로 선보이는 숙박공간 작업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그 곳에서 일곱 번은 가서 체험해 보아야 그 느낌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디자이너의 말처럼 애니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공간색은 특별하고 색다르다. 때론 도발적이기도 하고 파격적이기도 하다. 언뜻 본다면 기존의 그가 해오던 수많은 작업과 사뭇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재료의 물성을 한껏 질감있게 표현하고자 한점이나 절제하고 함축시켜 자연스러움을 묻어내는 그의 언어를 볼 때 디자인의 연속성을 지켜볼 수 있다. 하지만 예산상으로 인해 재료의 물성적 효과를 드러내는데 다소 미흡했던 점, 애초 계획대로의 디자인의도가 반영되지 않은 점, 평면상 내부공간 표현의 제약성 등은 아쉬움으로 남는다.디자이너는 이번의 일곱 나라에서 굳이 한국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여행객들에게 이국적인 공간체험을 맛보게 한다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자신의 추후 디자인 작업에 반영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의 정서가 흐르고 전통공간이 담긴 숙박공간을 미정으로 남겨놓은 것이다.
처음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은 그 즐거움에 탄성을 자아낼 것이다. 애니텔만이 자아내는 이색공간에서 낯선 환경의 어색함은 어느덧 환희로 뒤바뀌게 될 것이고, 애니의 공간은 하루의 땀과 노고를 씻는 청량제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제 여행객들이 떠나고 그들이 머물던 시간은 어느덧 과거의 기억 속에 묻혀지게 된다. 그리고 여행 중에 느꼈던 공간에 대한 기억과 다채로운 꺼리들은 잊혀지지 않는 소중한 추억이 되어 여행객들의 가슴 속에 깊게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디자이너가 이 공간에 담고자 했던 추억과 환희의 공간색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기사제공 : MARU interior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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