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5-04
도산공원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 그랑 씨엘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는 중. 파릇한 나무 잎새와 잘 어울리는 이 선명한 노란색 공간은 이미 봄 냄새에 젖어있는 나를 더욱 설레게 만든다. 최근들어 감각적인 공간들이 잦은 빈도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그랑 씨엘도 그런 공간 중 하나. 과거 일부 알려진 디자이너들에 의해 디자인 되던 공간들이, 아직은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조금씩 빛을 보고 있는 듯. 어디서 혜성같이 나타났나 했더니 옴니와 모노 콜렉션에서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4년 전 홀로서기한 nrdesign의 김나리 실장. 지난 4년간 그녀의 활동이 사뭇 궁금해졌다.
취재 | 호수진 객원에디터 (lake-jin@hanmail.net)
도산공원 앞 골목에 시원한 감색과 따뜻한 노란색의 파사드가 예사롭지 않은 그랑 씨엘은 그녀의 최근 상업공간 프로젝트중 하나이다. 유난히 색에 민감한 김나리 디자이너는 가능한 공간에 많은 색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이유 없이 그냥 좋단다. 사무실에 다양한 색상의 패브릭들이 가득해지면 웬지 부자가 된 듯 기분이 좋아진다며 밝게 웃는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공간에 즐겨쓰는 로우 머테리얼(raw material)들은 색이 더해짐으로 그 매력을 발산한다.
그랑 씨엘의 컨셉은 하우스 키친 + yellow wonder. 일반 가정집 안주인의 손길에 닳은 주방에서 홈메이드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는 공간을 디자인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높은 하늘이라는 뜻의 그랑 씨엘. 태양을 상징하고 해바라기를 연상하게 하는 노란색으로 높은 하늘의 태양과 그 아래 해바라기가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는 그녀. 만난 지 얼마 안되 자신의 감성을 담을 수 있는 일을 계속해서 하고 싶다는 말이 듣는 이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큼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디자인 컨셉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녀가 난데없이 ‘날아다니는 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우연히 TV 다큐멘터리에서 본 내용인데 얼마 전 프로젝트의 컨셉트가 되었었다고. 순간 그녀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 온 마법사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나 나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문득 문득 떠오르는 순간의 이미지에 생각을 멈춘다. 이같이 그녀의 디자인은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시작된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도 그녀의 감성을 두드리는 즐거운 무엇에 착안한단다. 그렇다고 아이디어가 숲 속의 샘물마냥 마구 샘솟는 것은 아니다. 앞선 트렌드를 반영하는 패션, 하나의 컨셉으로 진행되는 영화, 소설 그리고 여행…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탐구하며 상상의 샘을 깊게 만든다.
그러한 까닭에 그녀는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을 스쳐 지나는 법이 없다. 유난히 색감이 눈에 띄는 마르니는 그녀가 좋아하는 패션 브랜드 중에 하나. 여행을 통해 패턴이나 색을 구상하는 디자인 방식 또한 맘에 든다고. 그녀 역시‘여행’이 디자인의 중요한 해결점을 찾아준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은 재충전의 기회라고들 하지만, 그녀에게 여행은 하나의 숙제와 같다. 밤을 새워 여행 계획을 세우고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설 때까지 걷는다. 밤새 스크랩한 자료들을 토대로 여행하는 도시의 골목 골목을 누비는 것이 그녀의 스타일. 문득, 그녀의 여행 스크랩이 탐나는 이유는?! 여행에서 돌아올 즈음에 그녀의 가방은 감성으로 가득 찬 가슴만큼이나 푸짐해진다.
특히, 일본과 이탈리아를 좋아하는 그녀. 골목 골목이 재미난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 곳 젊은 이들의 열정과 감성. 구멍가게처럼 작은 가게 하나라도 돈과 명예를 위해 일하기 보다는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을 느끼는 젊은이들의 에너지가 그녀의 모습과 닮아있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전통을 잊지 않고 자신의 작품에 녹여내는 것은 배울만하단다. 그녀가 이탈리아를 좋아하는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반듯하지 않은 자연스러움, 어딘가 모르게 정이 가는 도시 형태와 그네들의 음식에서 그녀는 디자인 아이디어를 얻는다. 디자인은 총체적인 경험의 발산이다. 음식도 다양하게 경험하다 보면 훌륭한 디자인의 도구가 된다. 이탈리안 레서피가 디자인 컨셉이었던 아트센터 나비.
언뜻 흘려 듣기에 난데없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트센터 나비는 그녀의 기억에 가장 남는 프로젝트. 디자인과 시공을 다른 두명의 디자이너와 컨소시움 형태로 진행한 이 프로젝트의 컨셉은 정확하게‘mat + Italian food recipe + high contrast’. 기능적인 면에서 다양한 규모의 전시, 퍼포먼스, 세미나, 워크숍을 모두 수용하되 각각의 목적에 충실할 수 있도록 공간이 자유자재로 변해야 한다는 클라이언트의 단한가지 요구를 판(mat)이라는 개념으로 풀어 모듈화 시킨 가구라든가 움직이는 대형 벽체와 문, 상하로 움직이는 철망 문 등으로 구체화 시켰고, 공간의 흐름은 안티 파스토, 앙트레, 디저트와 같이 이탈리안 요리의 순서대로 풀어 조닝(zoning)했다.
또한 디지털과 아날로그, 하드와 소프트, 차갑고 따뜻한 소재의 극대비로 공간의 긴장감과 흥미를 주어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이 프로젝트는 여럿이 함께하며 서로 시너지 효과를 주고 받은 점, 클라이언트의 평이 좋았던 점, 무엇보다 처음에 디자인한 컨셉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 두고 두고 좋게 기억할 수 있는 프로젝트였단다.
그녀의 자유로운 감성은 아무래도 자연과 함께했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녀의 고향은 예상치도 못했던 울산. 어릴 적 산에 위치한 스킵 플로워 형(skip floor: 경사지에 지어진 집의 형태) 주택에 살았던 탓에 2층이자 3층인 이상한 집의 구조가 평면도가 무언지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평면을 보며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싶어할 정도로 집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고, 방문 바로 밖에 피던 초여름 밤의 밤꽃, 개구리, 개구리알, 꿩, 심지어 무서워 했던 꽃뱀까지도 그녀에게 디자인에 대한 영감과 자연의 색감을 선물하는 최고의 스승이었다.
아직도 가을이면 방문을 열고 잠자리 채로 밤을 땄던 기억, 산에 나뭇가지로 집을 지어 본부 놀이를 했던 기억들이 그녀의 지친 일상에 활력소가 되어준다. 한번은 2층이자 3층에 위치한 자신의 방의 외벽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 부모님은 물론 사택 관리 아저씨에게 혼난 적이 있다는 그녀. 창문 끝에 매달려 그 시절 가슴에 넘쳐나는 감성을 손끝으로 표현한 고교 소녀는 엉뚱하지만 순수함에 젖어있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된 데에 특별한 계기나 기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연한 기회에 옴니 디자인의 이종환 사장님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직급에 관계없이 일대일로 일을 주는 방식 덕분에(?) 힘겹지만, 남 뒤치다꺼리로 보내는 세월 없이 처음부터 굵직한 프로젝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맡게 되었던 프로젝트는 휘닉스 파크. 지금 와 생각해보면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사원에게 주어진 일이라기엔 너무나 거대하고 험난한 프로젝트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멋모르고 여름 내내 그린 도면과 추운 겨울 강원도 현장에서 눈물로 뛰며 보낸 1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와 되돌아보면 고생한 것보다 강원도에서 두 달간 보낸 순박한 전원 생활만 생각나니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가. 덕분에 젊음이 기쁜 줄도 모르고 보낸 시절이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그 시절 감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지나고 나니 쉽게 느껴지지만, 사실 인테리어 회사에서 우직하게 버티기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있다 해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꿈이 있다면 3년 이상 한 회사에서 버티며 스스로를 시험해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힘들어도 즐거워지려고 노력하며 버텼다는 그녀. 그것이 지금의 그녀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닐까.
무언가 내 것이 하고 싶다는 고집이 생기는 순간 독립하게 되었다. 독립만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한마디로 나만의 집을 짓고 그 속에 머무른 자의 오해였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경영 관리 그리고 금전적인 손익을 책임져야 하는 디자인 외적인 문제들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렇지만, 지시된 일을 하느라 받던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어 원하는 만큼의 일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을 더욱 자유롭게 해주었단다. 자유를 얻었기 때문인가? 그녀의 감성은 더욱 그 깊이가 깊어진 느낌이다.
특별히 남에게 자신을 알리려고 노력하지는 않지만 그녀의 끼와 에너지에 매료된 클라이언트들은 계속해서 그녀를 찾고 있다. NY뉴욕의 인연이 그랑 씨엘로 이어졌고, 아트센터 나비의 인연이 그녀에게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낼 기회를 주었다.
그녀의 꿈은 세월에 깊어진 감성을 모두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그녀만의 호텔을 짓는 것이다. 인테리어뿐만 아니라, 음식 패션 생활전반에 관심이 많은 그녀의 모든 것을 쏟아낼 수 있는 그러한 공간말이다. 아직은 숲 속의 마법사처럼 홀로 꿈을 먹고 살지만 언젠가는 그 마법사의 오랜 꿈이 담긴 공간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으리라. 잠시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그녀는… 저기 먼 숲 속에서 요술 빗자루를 타고 날아온 마법사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