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07
산업화로 급속한 성장을 거둔 대한민국 경제는 사람들의 삶의 시계를 빠르게 흘러가도록 했다. 느림의 미학을 찾을 수 있는 카페 문화가 최근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는 것은 그간 빠르게 돌아갔던 시계추를 다시 되돌리기 위한 반작용으로도 읽힌다. 앤트러사이트(Anthracite)는 각박해진 삶의 패턴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쉼의 공간이자 문화를 재생산하는 재생의 공간이다. 오래되고 방치된 공장을 카페로 재생시킨 앤트러사이트는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를 지향하면서 도시의 재생과 문화적 재생 기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글 | 한정현 기자(hjh@popsign.co.kr)
사진 | 신혜원 기자(shin@popsign.co.kr)
낡은 공장의 컨베이어벨트 위에 놓인 커피
마포구 합정동 357번지에 소재한 앤트러사이트(Anthracite)는 외관만을 보면 커피를 만들고 파는 곳이라고는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반적인 카페의 풍모와는 거리가 있다. 무채색의 외벽에 걸려 있는 ‘Anthracite’ 철제 간판이 없었더라면, 그냥 스쳐 지나갈법한 오래되고 낡은 건물이다.
‘Anthracite’는 우리말로 ‘무연탄’이라는 뜻인데, 길 건너에 있는 국내 최초의 화력발전소인 당인리발전소에서 차용해왔다. 1930년에 건립된 당인리발전소는 1980년대까지 화력발전소로서 연간 38만7500㎾의 전기를 생산해왔다. 무연탄을 사용하는 1~3호기가 철거된 뒤에는 액화천연가스(LNG)를 사용하는 4,5기가 마포, 여의도 등 6만 가구에 난방열을 공급하면서 발전소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앤트러사이트가 위치한 곳은 원래 빠징코 기계를 만들던 공장이었다. 이후 전기 부품도 만들다가 공장으로서의 기능을 마치기 전까지는 신발을 만들던 곳이었다.
낮은 인건비를 경쟁력으로 수출 호황기을 누리던 여타 신발공장처럼 이 곳 역시 공장 사람들이 빠른 손놀림으로 무수히 많은 신발을 생산해 냈을 것이다. 지금도 이 곳에는 공장의 대량 생산 체제의 상징물인 낡은 컨베이어벨트가 카페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다. 노동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원래의 기능은 퇴색했지만 앤트러사이트에서 커피를 생산해내는 커피공장의 부분으로 기능한다. 앤트러사이트는 당인리 커피공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어 ‘생산’의 개념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앤트러사이트, 소비가 아닌 문화의 재생을 상업공간에 담다
앤트러사이트를 만든 김평래 사장은 카페가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곳을 만들었다. 커피의 참 맛을 즐기는 것을 물론이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쉴 수 있는 재충전의 기능을 자신의 카페에 담고 싶었다고 한다.
김평래 사장은 “석탄을 때서 전기에너지를 만드는 것처럼, 문화적인 에너지를 만들자는 것이 카페의 키워드다”고 설명하고 “공연과 연극, 음악회 등이 열리는 문화적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양한 문화적 기능을 공간에 담기 위해서는 규모가 큰 건물을 구해야했는데 도심 속에서 그만한 공간을 찾는 것은 여러 모로 쉽지 않았다고. 김 사장은 “도심 속의 공간은 너무 비싸기도 하고, 못 쓰는 건물을 재생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방치된 공장을 카페로 변모시킨 이유를 소개했다.
앤트러사이트는 육중한 철문과 투박한 바닥 등 기존 공장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부서진 콘트리트 벽이 창의 기능으로 재생되고, 실금이 간 벽의 균열까지도 생명을 부여받아 인테리어 요소로 사용되는 느낌이다. 건물뿐 아니라 이 곳에 있는 테이블과 의자 등 대부분은 기능을 상실해 버려진 물건들을 주워와 재사용하고 있다.
김 사장은 “최소의 자본으로 기존에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거나, 직접 만들자는 재생프로젝트의 개념을 카페에 담았다”고 말했다.
김평래 사장이 생각하는 재생의 철학은 문화적 재생을 기반으로 한다. 일회성 소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재생의 개념을 문화에 접목한 것이다.
홍대 문화가 변질되고 있는 이유를 문화적 재생이 아닌 소비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으로 진단하고 “먹고 마시고 춤추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술을 먹으면서도 함께 소통한다든가 문화적으로 소비하는 풍토가 전반적으로 형성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사인에 철학을 담는 문화의 수준 향상 기대
당인리 커피공장으로도 불리는 앤트러사이트는 커피를 파는 공간만이 아니라 문화와 휴식이 있는 공간이다. 카페 벽면에 붙어 있는 작은 금속 사인인 ‘Anthracite’와 함께 MOIN(모인)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는데 이는 앤트러사이트에서 운영하는 갤러리를 알리는 사인이다. ‘Anthracite’와 ‘MOIN’ 타이포 디자인은 김평래 사장과 함께 이 곳의 콘셉트를 함께 만든 김가람 씨가 제작했다.
지역이 가지는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김 사장은 각 지역색에 맞는 문화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역의 색깔과 느낌, 지역에서 잘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당인리도 그러한 지역색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역의 특색에 대한 그의 생각은 사인물에도 이어졌다. 김 사장은 “크고 화려한 사인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사인에 담긴 생각과 철학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면서 “크기만을 강조한 단순한 사인을 거부할 수 있는 수준이 생겨야 하는데 국민들의 문화 수준이 전체적으로 높아지면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문화의 중요성을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