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사인 | 2015-04-09
서울 한복판에 숨이 턱턱 막히는 가파른 골목을 따라 삶의 터전이 형성된 곳이 있다. 바로, 창신동이다. 창신동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쪽방촌 일대이자, 동대문에 물량을 공급하는 봉제공장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경사를 하루에도 수십 번 옷감을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들의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최근에는 오토바이뿐만 아니라, 이 곳을 방문하는 많은 이방인들의 모습도 찾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낙후된 창신동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기사제공 | 팝사인
창신동 골목골목에 예술이 깃들다
그동안 화려한 동대문시장에 가려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창신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서민 동네이자 동대문 의류시장의 배후 생산기지이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작은 900여개의 봉제공장과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 원단을 실은 오토바이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재봉틀 소리에 마을은 분주하다. 몇 년 전부터, 예술인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면서, 창신동에 작은 변화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쇠락한 봉제마을이 문화와 예술이 깃든 마을로 재생되기까지, 주민들과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았을까.
대표적으로, 주민들이 직접 만든 ‘창신동 작은도서관 뭐든지’를 비롯하여, 주민들이 직접 방송에 참여하는 방송국 ‘덤’, 문화예술사회적기업 ‘아트브릿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청년 사회적 기업인 러닝투런에서 만든 ‘000간[공공공간]’을 중심으로 창신동의 재미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2013년에는 우수마을공동체 8곳 가운데 한 곳으로 창신동이 선정되기도 했으며, 서울역사박물관과 러닝투런의 합작으로 창신동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으며 마을을 투어 할 수 있는 ‘소리 지도’도 골목 한 벽면에 그려졌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참 재미난 동네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이 공식적으로 예술문화의 거리로 지정된 만큼, 앞으로 창신동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창신동의 변화 중심에 000간[공공공간]이 있다
창신동 주민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오고가는 곳. 바로, 특별한 사용 목적을 정해두지 않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쓰는 복합문화 공간인 ‘000간[공공공간]’을 두고 하는 소리다. 이 곳은 이용자가 사용하는 목적에 따라 공간이 형성된다는 의미에서 이름도 000으로 비워둔 재미난 공간이다. 때때로 카페, 문화센터, 전시장이 되기도 하는 이 곳은 카멜레온 같다.
청년사회적기업 ‘러닝투런(Learning to learn)’에서 만든 000간은 창신동에서 ‘000간 사무소’와 ‘000간 플랫폼’을 운영하며, 주민들의 참여와 협업을 통해 새로운 공공성을 제안하고 실험한다. 창신동에 있는 봉제공장들과 협력하여 남은 자투리 천을 활용한 예술 프로그램과 디자인 제품을 기획하고 전시한다. 이처럼 주변의 잉여물을 통해 삶을 재발견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 000간이 추구하는 공공성이다.
현재 000간은 활발하게 창신동만의 고유한 색깔을 무기로 여러 사업을 진행 중이다. 대표적으로, 인근 봉제공장에서 나온 자투리 천을 활용하여 유니크한 디자인의 셔츠, 방석, 앞치마, 가방 등을 만들어 판매 및 전시를 한다. 또한 지역 봉사 프로그램 및 교육, ‘H빌리지’라는 문화예술 지역 재생 프로젝트, 청년활동가 육성 프로그램 등을 진행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000간은 창신동의 문화를 일구어 온 것이다. 이토록 숨 가쁘게 창신동이 변화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000간이 ‘삶 속에 녹아 있는 진짜 예술’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창신동의 색이 짙게 깃든 살아 움직이는 마을 공동체, 창신동의 변화를 이끈 장본인이 아닐까.
무엇보다 큰 변화, 거리에 이름이 생기다
창신동 봉제골목에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이름이 없었던 봉제공장에 간판이 생긴 것이다. 어떻게 벌어진 것일까? 그 시작은, 문화예술 사회적 기업인 러닝투런과 현대자동차그룹의 합작품인 ‘H-빌리지 프로젝트’에서 비롯됐다.
우선, 러닝투런은 ‘제 1회 H온드림 오디션&펠로우’ 통해 현대자동차그룹의 지원을 받게 되어 H빌리지 프로젝트를 함께 기획했다. H빌리지 프로젝트는 낙후된 구도심 지역 중 하나인 창신동을 창의적인 문화예술로 도시를 재생시키고 가치를 높이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인 이름 없는 봉제공장에 간판을 만들어 주는 ‘거리의 이름들’이 창신동 골목에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그 결과, ‘거리의 이름들’을 통해 오랜 세월동안 이름이 없었던 봉제공장에 간판이 생겨 정체성이 확보됐고, 원단을 나르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한 번에 봉제공장을 알아볼 수 있게 됐다.
이를 진행한 000간[공공공간]의 공동대표 홍성재 씨는 “창신동의 소규모 봉제공장들은 대부분 하청의 하청인 곳들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동네 봉제공장들은 특별한 공장의 이름 없이 살아왔다”며 “원단을 주로 실어 나르는 40~50대를 고려하여, 간판의 디자인을 멀리서도 알아보기 쉽게 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고. 예전부터 복고풍의 간판을 수집해온 홍대표는 “솔직히 정식 간판이라고 칭하기는 어렵지만, 봉제공장들은 대부분 세입자이기 때문에 간판을 설치하기가 쉽지 않았다”며 “다행히 주민들의 반응이 좋아, 아직 간판이 없는 봉제공장들도 간판을 설치해달라는 요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000간에서 ‘키다리아저씨’로 통하는 공동대표 홍성재 씨는 예술가로 활동 중에 5년 전 사회공헌프로그램을 처음 만났다. 그 후 1년 동안 자립적으로 예술을 이어갈 수 있는 고민을 하다 공동대표 신윤예씨와 사회적 기업을 창업하여, 4년 전 창신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000간을 중심으로 창신동 지역 주민과 청년들의 힘이 모아져, 현재 봉제공장 50곳의 80%에 간판 설치가 완료됐다. 나머지 곳에도 간판이 설치되고 있으며, 추가로 종로구의 지원을 받아 더 많은 곳에 간판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창신동 골목골목에 설치된 간판들이 마을의 생기를 불어넣고, 봉제공장의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재간둥이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