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3-08
얼마 전 삼성생명의 지면광고 촬영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삼성생명은 중장년의 성공한 사람들을 주고객으로 삼아왔기에 기업 이미지도 젊은층과는 왠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생명보험 자체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경제적 여유를 갖고 노후를 설계하는 중장년층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상품이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러나 요즘 이러한 보험업계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층을 고객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죠.
“20대 사망원인 1위는 교통재해”, “30대 사망원인 1위는 암” 등의 공격적인 문구를 사용하는 광고들이 대부분인데, 삼성생명은 다른 경쟁사 광고처럼 직접적이고도 공격적인 접근방식보다는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를 젊게 바꾸어 훗날 더 많은 젊은 고객층을 확보하겠다는 세련된 방법을 선택했고, 그런 컨셉과 목적에 따라 이번 광고를 기획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 촬영에서 사진적인 촬영 테크닉은 의외로 간단했지만 ‘자질 있는 모델의 선택’과 ‘표정을 이끌어내는 진행 능력’이 제법 부담스러운 과제로 다가왔습니다. 그럴듯한 얼굴의 선남선녀는 많지만 연기력이 있으면서도 촬영 컨셉에 어울리는 모델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모델 에이전시를 통해 건네 받은 프로필 사진들 가운데 1차로 서류심사를 통과한 6명의 모델들을 스튜디오로 불러 컨셉을 설명해 주고 테스트 촬영을 통해 얼굴 윤곽, 헤어스타일, 표정, 연기력 등을 꼼꼼히 살펴본 후 남녀 각각 한 명씩을 선택했습니다. 모델 선정시에 주의할 점을 덧붙이자면, 에이전시 측이 제시하는 프로필 사진은 단지 참고 자료일 뿐이므로 반드시 직접 모델을 만나고 가능하다면 가급적 카메라 테스트까지 해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프로필 사진과 실제 모델의 현재 모습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직접 만났다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모습’과 ‘사진에 찍힌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의 경우 '정적이고 결코 가볍지 않으며 희망적이고 건실한 대한민국 남자'가 기본 컨셉이었습니다. 꽤나 추상적인 이 컨셉을 구체적 사진의 모습으로 이끌어 내기 위해 많은 표정을 주문해야만 했고 모니터를 통해 이에 맞는 얼굴 표정을 점점 좁혀가는 작업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 했습니다. 컨셉에 걸맞는 표정이 나왔는가를 바로 확인해가며 확신을 가지고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이 디지털 촬영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봅니다. 제가 슬라이드 필름이나 인화작업을 제쳐놓고 디지털 촬영을 고집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조명은 소프트 박스를 좌측에서 비추어주고 반대편에는 반사판이나 다른 보조광 없는 어두운 섀도우로 컨트라스트가 강한 사진을 만들었고, 이후 강한 하일라이트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있어서 후방 45도 좌측 위에 스팟 라이트를 하나 더 사용하고 오른쪽에 약한 반사광이 생기도록 멀찍이 흰색 우드락 보드를 반사판으로 사용했습니다. 고속 촬영을 염두에 두고 엘린크롬 250R과 500R 모노헤드 스트로보를 사용했는데 이 제품들은 발광 속도가 1/6000초 정도 된다고 하더군요.
여자의 경우 남자와는 약간 다른 컨셉으로 ‘밝고 적극적이고 자신감에 넘치는 신세대 젊은 여성’을 표현해야 했고 1차와 2차로 나누어 약간 다른 방식으로 촬영에 들어갔습니다. 1차 촬영에서는 '정적인 표정 연기’를 주문하고 그 가운데 컨셉에 어울리는 표정을 다듬어가며 범위를 좁혀 나갔고 2차로는 머리를 일정한 방향으로 빠르게 흔들도록 주문을 하고 그 움직임 가운데서 한 순간의 표정을 잡아내는 방식으로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머리가 흩날리도록 고개를 돌린다”, “끝나는 지점은 정확히 어느 지점이고 이때의 표정은 어떠해야 한다” 등의 주문이 이어졌고, 반복되는 촬영 속에 긴장감 있으면서도 예상하지 못한 생동감이 곁들여진 절묘한 표정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늘 겪는 일이지만 촬영을 앞두고는 긴장하게 마련입니다. 컨셉에 맞는 사진을 얻기 위해 모델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표정을 주문하고, 상황에 맞게 순발력 있는 아이디어를 내야 하며, 최적의 조명은 기본이고 얕은 심도에서 정확한 초점을 맞추기 위해 확인에 확인을 거듭 해야 하는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이 모든 것이 촬영을 맡은 사진가의 몫입니다. 저는 솔직히 일이 없을 때보다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을 어떻게 잘 소화해 낼까에 대한 고민이 더 크게 느껴 집니다.
목요일에 촬영 회의가 있었고 금요일에 모델 오디션을 하고 주말을 보낸 후 월요일에 촬영이 진행되었습니다. 촬영 회의 때 고객에게 농담 섞인 푸념 한마디를 했죠. “제 주말을 또 망쳐 놓으셨군요”라고. 그만큼 일에 대한 부담감이 주말 내내 저를 누르더군요. 월요일의 촬영이 끝나고 모처럼만의 3박 4일 휴가가 잡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얼마간의 긴장된 시간들이 흐른 뒤 안도감과 성취감 속에 홀가분하게 떠나는 휴가는 진정한 자유를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