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12
글 │ 임병호
1992년부터 임병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는 광고 사진가. 삼성전자, SK텔레콤, 스카이, KTF, CJ 등 대기업들의 광고 사진을 촬영해 왔으며 홈페이지(www.limphoto.com)에서 그간 연재되었던 광고 사진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커피, 부드럽고 싶어서…”, “우유, 향기롭고 싶어서…” 맥심 라떼디토 커피믹스의 출시를 알리는 포스터의 카피 문구입니다. 어찌 보면 커피와 우유가 만난다는 것은 이미 커피 크림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테마로 여겨집니다만 아무튼 기존의 커피믹스와는 확실히 다른 부드러운 맛이 느껴지는 커피라고 합니다.
촬영의 시안은 러프 스케치 한 장. 경쟁이 치열해지고 디지털카메라가 보편화되면서 원고 같은(완성도 높은) 촬영 시안들을 몇 개씩 제시하는 경우가 많아진 요즘입니다. 큰 기대감이나 실제 촬영에서의 충분한 타당성 검토 없이 간단한 그림만으로 제시된 아이디어가 채택된 이번 경우, 더군다나 시즐감을 살려야 한다는 걱정과 함께 촬영이 진행되었습니다.
실제로 커피 잔에 커피와 우유를 동시에 부어 보았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한 컷의 사진으로는 만들기 힘든 이미지였고 각각의 파트를 나누어 따로 촬영하는 쪽으로 촬영이 이루어졌습니다. 커피와 우유 줄기, 커피 줄기의 소용돌이치는 표면과 우유 줄기의 울렁이는 표면 시즐, 그리고 섞이는 경계면의 시즐과 거품들, 흰색 머그잔과 짙은 색 머그잔들, 그리고 배경까지. 상당히 복잡한 합성용 소스들을 필요로 하며 각각의 상황에 맞는 자연스러운 시즐감을 표현해 내야 하는 까다로운 촬영이었습니다.
먼저 머그잔보다 넓은 그릇(밥공기 정도)에 도자기용 드릴로 구멍을 뚫고 계속 부어도 흘러넘치지 않고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도록 해 주어야 하며 이때 구멍의 크기와 위치를 잘 선정해야 합니다. 깔때기를 이용하여 구멍을 통해 흘러나온 커피가 다음 사용을 위해 용기로 모이도록 세팅을 해 둡니다. 커피와 우유를 따를 적합한 용기가 필요하며 입구의 형태가 다른 주전자들과 여러 크기의 비커들을 준비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커피 줄기의 형태는 위가 굵고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며 약간은 꽈배기 형태를 띠는 것이었고 이런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따르는 용기의 입구 형태와 크기, 그리고 따르는 양과 셔터 타이밍이 중요한 변수가 된다는 것을 알기까지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주전자의 목이 길수록 늘씬하고 매끈한 형태가 나왔고 짧고 굵을수록 울퉁불퉁한 줄기가 나오며, 커피에 비해 점도가 높은 우유는 비교적 매끄럽고 굵은 형태의 줄기가 자주 나왔고 1리터 우유팩 용기를 사용해 따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습니다. 우유에 비해 상대적으로 점도가 낮은 원두커피는 물처럼 거칠었고 울퉁불퉁 부드럽지 않습니다. 2리터 플라스틱 비커에 담아 거품이 생기지 않도록 한 후, 처음에는 얇고 나중에는 굵게 되도록(메조 포르테mf에서 포르테f 정도로) 흔들림 없이 따르고 막 굵게 되는 시점(전체 따르는 시간을 3초 정도로 잡고 2초 정도)에 셔터를 누르는 것이 요령입니다.
조명은 음식 촬영을 할 때처럼 소프트박스를 탑 위치에서 필 라이트로 설치하고 반 역광의 위치에서 2개의 허니컴 스폿을 효과광으로 사용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플래시 조명의 섬광 지속 시간이 짧아야 한다는 것. 일반적인 플래시의 지속 시간은 1/60초에서 1/250초 정도로 생각보다 느린 경우가 많고 이 섬광 속도가 빠른 조명일수록 가격이 비싸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정도의 촬영을 하기 위해서는 1/2000초 이상의 빠른 섬광이 필요하며 광량을 줄일수록 빠른 빛이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지속 시간이 빠른 플래시를 최소 광량으로 줄여 1헤드 1파워(1개의 파워팩에 1개의 헤드만 사용)의 개념으로 여러 개의 1헤드 1파워팩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번 촬영에서도 필 라이트와 효과광들을 각각의 파워팩으로 분리하여 ‘약하지만 빠른 빛’을 여러 개 사용하여 필요한 광량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라이팅을 구성하였습니다.
모든 촬영이 그렇습니다만 특히 이런 촬영의 경우에는 실제 촬영을 시작하기 전, 미리 미리 준비하고 테스트 촬영을 해 두어야 합니다. 촬영 일정을 잡을 때도 ‘어떤 촬영이고 어떤 준비가 필요한 촬영인가’를 빨리 예측하고 그에 대해 준비할 시간을 고려해야 합니다. 출고 시간에 쫓기며 급하게 진행되는 경우에라도 어떻게든 준비할 시간을 확보하려 애써야 하고 예비 촬영이라기보다는 아예 본 촬영의 연속이라는 개념을 가지는 게 좋습니다.
테스트 과정을 통해 실수를 혼자서 마음껏 해 보고 광고주 앞에서는 최소한 “이런 방법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정말로 시간이 부족할 때는 가까운 스튜디오 실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러 이러한 촬영이 있는데 어떻게 찍어야 할지를 의논하여 자신이 진행하려는 방식들을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연습하고 버리고, 또 아닌 것들을 잘라 나가다 보면 사진도 삶도 어느덧 바라던 좋은 것들을 소유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