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16
0 잠에서 깨어 눈을 비비며 침대 발치를 내려다보았더니, 언제 들어왔는지 아이가 누워 있다. 새로 사준 하얀 옷을 입고는 어제 하루 종일 밖을 쏘다니더니 오늘도 그 옷차림이다. 그런데 아이의 하얀 옷에 어제 보지 못한 무언가 검은 것이 묻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맙소사! 바퀴자국이다. 너무 놀라 아이에게 물어볼 틈도 없이,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보기 위해 옷을 걷어 올리려고 황급히 손을 뻗는다. 하지만 손은 아이의 옷 위에서 자꾸만 미끄러질 뿐 옷자락을 쥐지 못한다. 섬뜩하게도 아이는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아이를 흔들어 보려 하지만 역시나 손은 아이 옷 위에서 자꾸만 미끄러질 뿐이다. 힘겹게 아이 이름을 내뱉으며 안간힘을 다해 마침내 움켜쥔 것은 아이의 옷자락이 아니라 사진자락! 구겨진 사진 위 바퀴자국은 그녀의 손톱자국에 이미 지워지고 없다. 그때서야 거실의 요란한 텔레비전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문을 열었더니 아이는 휴일 아침부터 사진과 자동차 마니아인 남편과 함께 자동차 경주를 보고 있다. 제 머리만한 장난감 자동차를 바닥에 굴리던 아이가 묻는다. 엄마, 나 불렀어?
글, 사진 | 현린
기사제공 | 월간사진 2010년 5월호
1 사진을 본 적이 없는 오지의 한 여인에게 그녀의 아이를 찍은 사진을 보여줬더니, 그녀는 사진 속 자신의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실제와 사진의 닮음이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래 전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학습한 탓에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 못하듯 대개의 사람들은 기억 못하지만, 사진을 보는 법 역시 학습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문명세계의 여인은 적어도 실제와 사진의 닮음은 인식하고 있었으니, 사진에 있어 완전한 문맹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실제와 사진을 혼동하지 않는다. 학습이 필요할 만큼 실제와 사진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와 사진을 구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녀 역시 오지 여인의 경우와는 다른 의미에서 잠시나마 사진문맹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재현력의 발달로 인해 별도의 학습이 필요 없을 만큼 실제와 사진이 닮게 된다면, 이는 더 이상 그녀만의 일이 아니게 된다. 너무 닮았으니 오지의 그 여인도 별도의 학습 없이 사진 속 아이를 알아보겠지만, 너무 닮았기 때문에 실제의 아이와 사진 속 아이를 구별하기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오래 전부터 즐겨왔던 입체사진을 이제 우스꽝스러운 보조장치 없이 맨눈으로도, 그것도 활동사진으로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침대 발치에 놓인 대형스크린에서 재생되는 아이의 모습에 홀리는 일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실제와 사진이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닮았다는 것이 또 다른 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진의 가치는 그것이 실제와 닮았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의 흔적이라는 점에 있다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오래된 지적이 더욱 호소력을 얻고 있다. 실제와 얼마나 닮았는가를 기준으로 본다면 사진보다 뛰어난 가상 이미지도 많지만, 실제와 얼마나 직접적인 그래서 믿을 만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본다면 제아무리 뛰어난 가상 이미지보다도 나은 것이 사진인 까닭이다. 그리하여, 초등학교에서 다들 한 번씩 따라해 보았을 만 레이(Man Ray)와 모홀로-나기(Laszlo Moholy-Nagy)의 포토그램(Photogram)이야말로, 절박해진 이른바 ‘인증사진’의 특성을 군더더기 없이 보여주는 사진의 원형이 된다. 사진이라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실제와 닮지 않았지만, 그것 역시 실제 자체가 남긴 부정할 수 없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흔적으로서의 사진이라는 관점이 절대화될 경우, 닮음이건 다름이건 사진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또 다른 사진문맹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사진이 실제와의 닮음 자체를 부정하면서까지 흔적으로서의 사진의 특이성을 주장하며 ‘예술’의 지위를 탐하는 경우, 사진에 홀릴 뿐 아니라 아예 눈머는 사태가 발생한다. 크라우스(Rosalind Krauss)와 뒤봐(Philippe Dubois)는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기호학(semiotics)을 참조하여 이 문제를 탁월하게 분석한다.
사진의 종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상의 사태가 실제로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실제보다도 더 감각적인 가상 이미지들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다름 아닌 그때 그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경험의 가치와 이 경험을 ‘인증’하는 사진의 가치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이 아우라를 내뿜는다면 그것은 이미 자연적 아우라가 아니라 사회적 아우라, 즉 스펙터클이기 마련이다. 무소유를 수행한다는 승려들도 이 ‘인증사진’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소유라기보다는 존재에 가까워 보이는 탓이리라.
2 먼저 퍼스의 논의를 사진과 관련하여 간단히 정리하자면, 기호는 표상체(Representamen)와 대상체(Object) 그리고 해석체(Interpretant)로 구성된다.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기표(Signifiant)와 비교할 수 있는 표상체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체와의 관계에 따라 다시 도상(Icon)과 지표(Index) 그리고 상징(Symbol)으로 나뉜다. 도상은 그림처럼 대상체와 무관하게 그 자체의 성격 덕분에 대상체를 지시하는 표상체이고, 지표는 발자국이나 풍향계처럼 실제로 대상체의 영향을 받아 대상체를 지시하는 도상이다. 그래서 모든 지표는 도상이기도 하지만, 모든 도상이 지표인 것은 아니다. 도상과 달리 지표는 대상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한편 상징은 낱말, 문장, 책처럼 대상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련의 관습과 법칙, 즉 해석체를 가진 지표이다. 그래서 모든 상징은 지표이기도 하지만, 모든 지표가 상징인 것은 아니다. 지표와 달리 상징은 해석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엄밀한 논리학으로서 기호학을 연구한 퍼스에게 있어 정상적인 의미와 이해 그리고 소통은 오직 이러한 상징에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사진이라는 표상체는 그 대상체와 닮았다는 점에서 분명 그림과 같은 도상이지만, 그것이 대상체와의 물리?화학적 관계에 의해서만 생성된다는 점에서 지표이다. 그리고 해석체와 더불어 상징이 되지 못하면 사진은 정상적인 소통을 위한 기호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그런데 오랜 동안 사진에 대한 평가는, 그것이 열광이건 비난이건 지표로서의 특성을 간과한 채 도상과 상징으로서의 특성에만 치중해왔다.
크라우스의 ‘사진, 인덱스, 현대미술’(Le Photographique, 1992)에 따르면 이는 사진이 미술이 누리던 ‘예술’의 지위를 탐해 왔던 데서 기인한다. 하지만 지표로서의 사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사진을 미술의 관점에서 평가할 것이 아니라 미술을 사진의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 사진의 탄생 후 오히려 미술이 사진의 영향을 받아 점점 사진적인 것, 즉 추상에서 흔적으로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거꾸로 사진에 의해 변해가는 미술의 꽁무니를 줄곧 쫓아 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미 오래전에 회화주의(Pictorialism) 사진가들은 사진의 제작과정이 너무 자동적이고 그 제작 결과가 너무나 정확해서 ‘예술’ 대접을 받지 못하자, 미술을 닮기 위해서 사진에 손을 댔었다. 그들에게 포토그램은 그림 같지 않은 너무 덜된 사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회화주의에 반기를 들었던 이른바 모던 사진가들마저, 이번엔 다름 아닌 사진에 영향을 받아 태어난 모더니즘 미학을 추종함으로써 다시 미술에 종속된다. 사진매체의 특성을 살리려 했다는 그들의 사진은 분명 ‘스트레이트’했지만, 사진 위에서의 ‘결정적 순간’과 질서를 위해 실제는 파편화되고 추상화되었다. 그들의 눈에는 포토그램 역시 자랑스러운 추상미술의 일종이었다. 반면 모더니즘 미학과 대립하던 초현실주의자들이 비로소 흔적으로서 사진에 주목했지만, 실제와 기호를 구별하지 않는 그들에게 사진은 단순히 실제의 흔적이 아니라 실제 자체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들에게 포토그램은 상징으로 가득 찬 일종의 계시가 된다. 요컨대 도상과 상징이라는 극단을 오가는 동안 정작 지표로서의 사진의 특성은 간과되었으니, 결국 사진은 실제를 재료로 삼으면서도 이래저래 실제와는 너무 멀어진 혹은 너무 밀착된 가상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른바 포스트모던 사진가들 중 일부는 여전히 ‘예술’로 대접받는 사진을 위해 아우라 혹은 바르트의 푼크툼(Punctum) 개념에 의지해 또 다른 형태로 이를 반복하고 있으니, 여기에 대해서는 뒤봐가 ‘사진적 행위’(L''''acte photographique, 1990)에서 탁월하게 분석한다. 바르트는 사진 역시 벗어날 수 없다는 문화적 코드, 즉 스투디움(Studium)의 분석에 충실함으로써 소쉬르의 기호학을 완성하다시피 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사진은 코드 없는 메시지’라며 훗날 푼크툼에 빠져드는데, 퍼스의 기호학을 통해 뒤봐가 비로소 제대로 평가한 바에 따르면, 이는 흔적의 ‘함정’ 심지어 ‘무덤’에 빠진 것에 불과하다. 사진에는 분명 자연적 아우라와 푼크툼의 요소가 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지표로서 사진만이 갖는 매력이자 마력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극히 짧은 ‘사진적 순간’에 한정된다. 이 순간 전후에는 즉시 사회적 아우라와 스투디움이 밀려들어 사진을 코드로 채운다. 만약 이 코드들에 의해 사진이 문명화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의미 없고 이해 불가능한 흔적으로 남는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지시대상을 알 수 없는 지시대명사, 혹은 비명이나 고함, 신들린 자의 방언에 불과하다. 퍼스의 용어대로라면 기호로서의 지표를 ‘퇴화’(Degenerate)시킨 것이니, 흔적으로서의 사진을 절대화하는 푼크툼은 그야말로 맹점(Blind spot)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적인 이해와 소통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이 맹점의 늪에 빠지는 것은 실명(Blindness)이기도 하다. 푼크툼이 찌르는 것이 다름 아닌 인간의 눈인 것이니, 사진에 홀리다 못해 이제 아예 눈멀게 되는 것이다.
퍼스에 따르면 사진은 한마디로 모래밭 위의 발자국이다. 그 사진이 설령 천체망원경이나 무인 인공위성에 탑재된 디지털사진기가 촬영한, 아득히 오래 전 아득히 먼 곳에 있는 발자국의 것일지언정, 비록 그 과정이 사전에 인간에 의해 설계되고 선택되며 그 결과 역시 인간에 의해 해석되고 때로 왜곡될지언정, 그 발자국을 남긴 무엇이 그때 그곳에 실제로 존재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고, 발자국 자체가 이를 알려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려면 입자국도 아니고 발자국이 말을 할 리는 없지 않은가.
3 퍼스와 크라우스, 뒤봐에게 사진다움이란, 그것이 실제와 얼마나 닮았는가 이전에 실제가 물리?화학적으로 남긴 흔적으로서 그것이 갖는 지표로서의 잠재성에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실제와 사진의 닮음이나 다름을 인식하지 못하는 각각의 두 사진문맹은 모두 도상과 상징으로서 사진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지표로서의 사진을 절대화할 때, 사진의 의미와 이해와 소통 그리하여 사진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또 하나의 사진문맹이 탄생한다. 퍼스가 지표의 예로 발자국을 들었지만, 이미 그것은 도상이고, 더구나 ‘그것’을 ‘발자국’이라고 알아보았다면 이미 상징이기도 하다. 실제의 아이와 사진 속 아이를 구별하지 못했던 그 여인이 놀랐던 것도, 비록 오인일지언정 ‘그것’이 ‘바퀴자국’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비어 있던 지표를 상징이 이미 채웠기에 그것을 ‘바퀴자국’으로 보았던 것이고, 도상과 달리 지표이기에 아이가 실제로 다쳤을 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다만 장난감 자동차의 흔적이었는데, 만약 오인을 무릅쓰지 않았다면 이 다행스러운 수정은 물론이고 애당초 의미와 이해 그리고 행동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인이나 왜곡 또는 관습이나 통제가 두렵다고 해서 아예 눈을 감아버린다면, 사진문맹을 넘어 사진실명을 자초하는 것이다. 소통수단으로서 사진이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사진이 갖는 도상, 지표, 상징의 특성 어느 것도 간과하거나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아이(Eye)를 감당하기 힘들다고 해서 혹은 독특한 아이로 만들기 위해서, 아이를 찌르고 찢어 태워 버릴 수는 없지 않는가. 엄마, 나 불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