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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일제강점기 강제 연행된 조선인의 흔적을 찾아

2012-01-27


1996년 2월부터 시작한 한국 내의 일본문화(1910년에서 1945년 사이에 지어진 근대건축물을 중심으로)와 관련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한 이번 일본지역(후쿠오카, 오사카, 나가사키, 히로시마, 오키나와)에 대한 사진작업은 강제 연행된 조선인의 흔적을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 지난 2002년부터 2월부터 준비된 작업이다.

글, 사진 | 이재갑
기사제공 | 월간사진


1945년 8월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후 9일 뒤인 8월15일 정오 12시를 기해 일본 천황은 항복을 선언하는 방송을 하게 된다. 이날 전국의 형무소에서는 독립유공자 2만여명이 석방되었고, 전국의 크고 작은 군부대와 시설 공사가 중지되고 해방의 기쁨을 맞게 된다. 일본에서도 전 국토에 건립 중이던 전쟁 준비를 위한 건축물과 탄광채굴, 군수물자를 보관하기 위한 동굴 등의 모든 공사가 중단됐다.

그로부터 63년이 지난 2008년 1월, 일본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많은 지역을 답사를 겸해 다녀왔다. 전쟁이 끝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곳은 전쟁 준비로 분주하던 당시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석탄 채굴을 위해 식민지 조선인들이 강제징용을 당하고 무자비한 방법으로 탄압을 받았던 후쿠오카현의 지쿠호 지역은 내게 평생 잊지 못할 참혹하고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철도 침목 하나가 조선인 한 명의 목숨

지쿠호는 후쿠오카현 중부 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주변에 탄광이 많아 조선인 강제징용과 수탈의 역사적 거점이었다. 지쿠호 지역의 이즈카시의 땅은 대부분 아소 가문의 소유다. 일본에서 정치적으로 유명한 아소 다로 가문은 조선인에게는 침략과 수탈의 상징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1만여명을 강제징용한 아소 탄광 창업주가 바로 아소 다로 전 총리의 증조부다. 재일 사학자 박경식 선생의 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1939년부터 1945년에만 약 100만명이 넘는 우리 동포를 강제 연행했고, 군속으로 37만명을 전선에 동원했다. 조선 국내에서 동원한 485만명과 합하면 실제로는 600만명이 넘는 사람이 연행된 셈이다.

후쿠오카 지역 41개 광업소에 배치돼 강제 노역에 시달린 사람은 약 11만명으로, 이중 아소 탄광에 강제징용된 조선인 약 1만명 중 절반은 굶주림과 중노동을 이기지 못해 숨지거나 도망쳤다. 기타큐슈의 야하타 제철소, 이즈카역 주변의 보타야마 그리고 강제징용된 조선인의 한이 서려 있는 온가강 주변과 지쿠호 일대 탄광, 석탄 박물관 등을 답사하는 일정은 지난 역사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여겨졌다.

후쿠오카 지역의 길안내를 맡아준 ‘강제 연행을 생각하는 모임’의 회원인 배동록 선생은 자신이 지난 30여년간 일본에서 해온 일을 설명하며 일제강점기 재일 조선인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했다. “현재 일본 내에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철도 침목 하나가 조선인 한 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화강석 쪼아서 만든 쿠레의 2단 동굴 터널

군수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온 산을 요새화한 히로시마의 쿠레 지역의 동굴은 소름끼치도록 공포감을 안겨준 곳 중 하나이다. 단단한 화강석을 뚫기 위해 수천 번을 쪼아대서 만든 열십자 형태의 벽면의 형상은 당시의 열악한 상황을 말해주며 온몸을 굳게 만들었다. 이 거대한 터널을 완성하기 위해 다양한 형식으로 만들어진 동굴 내부를 파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중간을 지나자 갑자기 구멍이 좁아졌고, 둥근 모양의 굴을 지나자 작은 돌계단이 나왔다. 사방이 어두운지라 조심해서 발을 딛고 내려서니 안쪽에 커다란 동굴이 있었다. 동굴 내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터널의 광장 같은 꽤 큰 규모였다. 복잡한 터널 내부로 만들어진 이곳 ‘2단 터널’은 이중 삼중으로 된 방호벽을 구축해 외부에서 폭탄을 투하해도 뚫지 못하게 만들어졌다. 출입구는 여러 곳이고, 바다 쪽 입구에는 견고한 연화벽돌을 사용했다. 폭탄이 터져도 직접 파편이 터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벽도 지그재그로 쌓아 놓았다. 터널 내부로 들어오면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 같았다. 현재 위치가 어딘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복잡하게 연결된 터널의 특성상 최첨단 휴대폰도 이곳 동굴에서는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터널 내부의 구조나 형태는 과거 그대로이며, 언제든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대피소와 안전시설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돌격 명령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바로 군사시설로 원상복구가 가능할 정도다. 이 동굴을 만들기 위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과 조건 그리고 목숨을 건 처절한 노동이 연상되었다.

타치소 터널에서 한 일본인의 진심어린 사죄


오사카 타카츠키시 나리아이 근처에 있는 30여 개의 터널은 ‘타카츠키 타치소’라고 불린다. 이 터널은 일본 육군의 중요 저장고 중 하나이다. 1944년 11월에 공사가 시작됐지만 1945년 2월에 일본 가와사키 항공기 공장에서 사용하기로 결정됐다. 항공기 공장에는 터널이 16개 있었고,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비행기의 중요 부품을 만들기도 했지만 완성되기 전에 패전이 되었다. 터널 공사에는 주변 지역의 일본인 학생들이 동원됐고, 가장 어렵고 위험한 일은 조선에서 강제 연행된 3천5백여명의 조선인들이 담당했다.

오사카에서 길안내를 자청한 아사카와 선생은 자신이 먼저 타치소 지하 터널을 안내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답사한 굴은 패전과 함께 파다가 만 상태로 방치된 지하 터널이었다. 보통 사람이 허리를 조금 구부려야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약 1미터 40센티미터 정도의 원형으로, 내부는 완전히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동굴 안쪽으로 난 굴로 들어가자 깜짝 놀랄 장면이 펼쳐졌다. 굴 안쪽에 어림잡아도 사방 9~11미터 정도 되는 원형 공간이 있었다. 좁은 동굴과 연결되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넓이였다. 조명을 천장으로 향하게 고정시켜 두고 잠시 기다렸다. 간접 조명법에 의한 확산효과로 동굴 전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습한 기운 때문인지 이름 모를 곤충들이 보이고,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박쥐도 있었다. 오사카시에서 만든 터널 입구의 안내문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일본은 전쟁에서 많은 생명을 잃었고 동시에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사람들에게 많은 가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아사카와 선생은 오십 평생 살면서 이런 곳을 처음 보았지만 이와 관련한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고 했다. ‘일본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당신(조선인)에게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와 나는 만난 지 불과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 서로를 알기에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진심은 국경을 초월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한 강제징용 희생자와의 기구한 인연에 흘린 눈물


오키나와 요미탄촌 근처에는 강제 동원과 징용으로 죽음보다 힘겨운 삶을 살다간 조선인들을 기리는 ‘한(恨)의 비’가 있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남기고 지나간 잘못은 사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양심 있는 일본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세워졌다. 이곳에 끌려와 놀라움과 분노를 넘어 참담함을 느꼈을 당시 조선인의 심정을 이해할 만한 일이 있었다. 나의 원적(본적)은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808번지’다. ‘한의 비’ 비문 밑에는 희생자의 본적이 적혀있는 돌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의 본적과 같은 주소를 발견한 것이다.

초등학교 때 할아버지는 일본으로 끌려갔던 마을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약주를 한잔하시면 혼자 콧노래를 부르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옛날 얘기들과 흥얼거림이었다고 기억된다. 기억조차 잘 나지 않고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당시의 말들이 이곳 오키나와 요미탄촌 ‘한의 비’에서 비로소 그 내막을 알게 된 것이다. 순간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고 눈물이 맺혔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한국에서 이 작업을 위해 배를 타고 떠났을 때는 막연함과 알 수 없는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순간 앞으로 이 작업은 막연히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내가 해야만 되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길 위에 있고,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바로 나와 내 가족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강제 연행된 조선인들을 기억(기록)하는 작업은 아직 진행 중이다. 섣부른 사진적 결론을 위한 작업이 아니라 과정을 통한 역사읽기와 일본 내 남아 있는 조선인 강제연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지금껏 5개 지역을 답사했고, 최북단 홋카이도까지 작업하려면 갈 길이 멀다. 한국 땅 어느 곳도 상처 받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일본 역시 예외는 아니다. 길 위에서 발견한 조선의 아픈 역사는 내게 말을 한다. 패전과 동시에 멈춰버린 빈 공간은 작은 소리로 속삭이기도 하고 때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도저히 지나쳐 버릴 수 없는 그들의 일상은 의무는 있지만 권리는 없는 이들만의 외침으로 전쟁이 끝난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재갑은 1992년부터 현재까지 ‘또 하나의 한국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전쟁 이후에 태어난 혼혈인 1~3세대들에 대한 작업을 진행 중이고, 지난 2005년 10월 ‘또 하나의 한국인’(눈빛)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했다. 그리고 2008년 6월 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사진집 ‘잃어버린 기억’을 출간했고 다음 작업을 준비 중이다. 또한 지난 1996년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인 일제강점기 작업의 일환으로 ‘한국 속 일본 풍경(1910-1945년 사이에 만들어진 근대건축물을 중심으로)’과 ‘일본 속 한국 풍경(조선인 강제 징용지를 중심으로)’을 함께 진행 중이다. 또한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리는 경남 합천의 원폭피해자들의 일상과 그 뒷이야기에 대한 사진작업도 병행하는 중이다. ‘일본 속 한국 풍경’ 사진작업은 지난 8월1일부터 26일까지 개인전 ‘상처위로 핀 풀꽃-조선인 강제연행지역을 중심으로’(대구 태갤러리)에서 전시됐고, 전시에 맞춰 사진책 ‘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살림출판사)로 출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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