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15
사진, 책에 길을 묻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말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읽지도 못하는 사진이 길을 물을 리 만무하다. 더구나 사진은 보지도 못한다. 사진을 보는 것도 사람이고, 사진을 찍는 것도 사람이다. 그러니 길을 잃어도 사진이 아니라 사람이 잃는 것이고, 길을 물어도 사진이 아니라 사람이 물어야 한다.
글, 사진 | 현린
기사제공 | 월간사진
그렇다면 사람이 아니라 사진이 책에 길을 묻는다고 한 것은 일종의 책임 회피다. 길을 잃은 것은 사람이건만 길을 묻는 일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사진에게 떠넘긴 것이다. 심지어는 길을 알려주는 일마저 사람이 아니라 책에 떠넘겼다. 하지만 책에 가득한 것은 글이지 길이 아니다. 글을 쓴 사람이라고 해서 길을 아는 것도 아니다. 사진이건 책이건 그 안에서 길을 읽어내고 그 길을 걷는 것은 온전히 사람의 몫이다. 의인화랍시고 사람의 몫을 슬쩍 사진과 책에 떠넘기다 보면, 사진과 책이 제 갈 길을 제가 알아서 가고 사람은 그 길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게 된다. 결국 사람은 길을 읽지도 걷지도 못하게 된다. 길을 읽고 걷기는커녕 길을 잃은 줄도 모르게 된다.
2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의 ‘화씨 451’(Fahrenheit 451, 1953)에서 사람들은 책이 아니라 벽에 묻고 답하며 산다. 이른바 벽면 텔레비전(TV Parlor). 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는 것은 범죄행위다. 몰래 책을 읽다 신고라도 당하면, 방화수(Fireman)들이 들이닥쳐 태워버린다. 몬태그가 10년째 그 일을 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궁금해졌다. 대체 책 안에 얼마나 위험한 것이 들어 있기에 불태워야 하는 걸까? 그래서 책 몇 권을 태우지 않고 가져와 숨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책을 태우려면 자신도 함께 태우라며 자기 몸에 불을 붙인 한 노파가 그의 가슴에도 불을 질렀다. 대체 책 안에 얼마나 대단한 것이 들어 있기에 죽음까지 불사한 걸까? 왜? 도대체 왜? 그는 병가를 냈다. 정말 아팠다. 책이란 것을 읽어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낌새를 파악한 방화서 서장 비티가 예고도 없이 방문한다. 방화를 위해서는 아니고, 정말 방화를 하는 사태가 오기 전에 진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몬태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역사 강의란 것을 듣게 된다.
비티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교통과 통신 그리고 영상의 발전과 함께 시작되었다. 20세기 들어 삶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책들이 점점 얇아지기 시작했다. 예컨대 ‘햄릿’이란 제목은 누구나 들어서 알지만, 그 책을 직접 읽는 독자는 줄어들었다. 대신 ‘햄릿’을 요약한 다이제스트판이 “이제 당신은 모든 고전들을 완전히 통달할 수 있습니다. 읽으십시오!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따위의 광고와 함께 불티나게 팔렸다. “이기적인 출판업자들의 손이 결국은 사람들의 마음을 마구 망가뜨려 놓는 거지. 방송인들? 재미없는 건 죄다 내팽개쳐 버리는 거야. ‘왜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그러면서.” 책에는 좀 더 많은 그림을, 좀 더 많은 사진을 집어넣었고, 머리로 가는 지식은 갈수록 적어졌다. 책 읽을 시간을 아낀 사람들은 집단의식을 고양시키고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스포츠와 관광을 즐겼다. “보육원을 나와서 대학에 들어갔다가는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는 거네. 지난 5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사람들의 지적인 문화 형태라는 건 그런 식이었네.”
문제는 이런 문화를 거스르며 읽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은 안정과 평화. 대부분의 사람들은 벽면 텔레비전과 수다를 떨며 이를 충분히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철학이니 사회학이니 따위가 사람들을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똑똑한 티를 내는 그들도 똑같은 인간으로 길들여져야 했다. 마침 불연성 플라스틱의 발명으로 화재 위험이 없어졌고, 소방수에게는 이제 책을 태우는 방화수라는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다. “그래, 바로 그렇기 때문이야! 책이란 옆집에 숨겨 놓은 장전된 권총이야. 태워버려야 돼.” 비티의 충고는 간단명료했다. “자네는 책 속에 들어가는 즉시 길을 잃을 걸세.” 아는 게 병이니 괜한 유혹에 빠져 신세 망치지 말고, 책들과 함께 모든 의문을 태워 버리라는 것. “불은 현명하고 깨끗하지.” 하지만 불만큼 현명하고 깨끗했다면, 비티 자신은 이 모든 사실들을 어떻게 알게 됐단 말인가? 몬태그는 비티의 뜻이 아니라 비티의 뒤를 따랐다. 보관만 해오던 책을 결국 펼치고 만 것이다.
“몬태그, 책을 태워!” 그리고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밀고자는 다름 아닌 그의 아내. 세 벽에 걸린 텔레비전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네 벽을 모두 텔레비전으로 채우고자 했던 그녀에게 삶의 낙이란 그 전자 ‘친척’들에 둘러싸여 온종일 수다를 떠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하늘 위를 나는 폭격기의 굉음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기겁을 한 것은 오히려 책이었다. 그런데 책을 읽어주기까지 했으니, 밀고는 사실 그가 자초한 것이었다. 결국 제 손으로 제 집을 태우게 됐지만 태울 수 있는 것이 책만은 아니었기에 아주 나쁘진 않았다. 벽에 걸린 “하얀 생각과 눈에 덮인 꿈을 가진 진짜 멍청한 괴물”들도 태워버릴 수 있었던 것. 마지막 임무를 완료한 후 남은 일은 이 도시를 탈출하는 것이었다. 로봇개를 피해 달아나는 그의 모습은 따라오는 카메라에 의해 생중계되어 벽에 갇힌 자들을 위한 스릴 만점의 리얼 스펙터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즐긴 마지막 스펙터클이기도 했다. 그가 도시를 벗어난 다음날, 도시 전체가 불타는 최대의 스펙터클을 중계할 수 있는 벽은 없었다.
3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현대세계의 일상성’(La vie quotidienne dans le monde moderne, 1968)에 따르면 몬태그가 살던 사회는 전형적인 ‘소비조작의 관료사회’다. 전근대사회에서 태어난 개인은, 전통이 이미 그의 길을 정해놓았기 때문에 길을 찾아 헤매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됐다. 반면 근대사회에서 태어난 개인은, 이미 정해진 길이 없어서 자신의 길을 선택할 자유 또는 길을 헤맬 자유를 얻는다. 물론 무거운 책임까지 떠말아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데에 참조할 만한 대상이 없는 까닭에, 그는 자유로운 동시에 또한 외롭고 불안하다. 마침내 이 불안을 잠재운 것은 다름 아닌 기업이다. 처음에는 노동윤리를 통해 나중에는 소비미학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물론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은 계속해서 새로운 불만과 불안을 ‘생산’함으로써 새로운 소비를 창출한다.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었던 근대인은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고 착각하면서 친절한 이 새로운 ‘강제’에 길들여진다.
사진과 글을 비롯한 기호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해석과 표현의 자유와 함께 기호는 원래 자신이 지시하던 현실의 참조대상과 분리된다. 일단 참조대상과 분리된 후에는 기호의 기표와 기의의 연결고리 역시 끊어져 다른 기의와 기표들과 자유롭게 결합한다. 그래서 글에 의지해 길을 읽다가 오히려 길을 잃기 일쑤다. 이 막막한 지점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한 것도 기업이다. 광고는 떠돌아다니는 기호를 상품에 연결시켰고, 마침내 상품 자체를 기호로 만든다. 예컨대, 자동차의 사진은 네 바퀴 달린 운송수단이 아니라 기동성, 품격 또는 재산을 지시하게 된다. 물론 광고 역시 이윤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새로운 소비의 생산을 위해서 기존의 기호들을 해체하고 재조합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을 창출한다. 동시에 현실과 무관해서 현실에서 더욱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단다. 그 덕에 상품과 작품, 광고와 예술의 구별이 없어진다. 소비의 궁극은 역시 기호 자체의 소비였으니, 사진이건 글이건 지극한 형식이나 상상의 나래를 달면서 길은커녕 땅과도 멀어진다.
그러나 이 때문에 ‘소통’과 ‘참여’의 욕구는 강박적이라 할 정도로 커진다. 문제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소통’과 ‘참여’라는 형식의 실현이지 내용의 실현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기표와 기의를 아무렇게나 연결해 쓴다. 그 결과 단지 함께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형식, 즉 수다만 남는다. 수다는 그 자체가 스펙터클의 소비, 소비의 스펙터클, 기호의 소비, 소비의 기호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로부터 분리된 이들 기호 혹은 기호의 기호 역시 읽지 못한다. 놀랍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수다를 떤다. 내용이 무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호로 기능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것은 해석을 요하는 기호가 아니라 반응을 유도하는 신호다. 이처럼 조건화된 대로 신호에 반응하며 로봇화된 인간을 르페브르는 ‘호모 코티디아누스’(homo quotidianus, 일상인)라 부른다. 예컨대, 벽과 수다를 떠는 몬태그의 아내가 그런 경우다. 더 비인간적인 것은 그 벽이 텔레비전이 아니라 인간인 경우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기 위한 로봇이 되는 것이다.
몬태그가 이 끔찍한 일상을 탈출하려 한 것은, 다만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고 싶어서였다. 설령 글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헤매게 될지언정, 또는 그 글마저 또 하나의 기호 상품에 불과할지언정, 이미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안 이상 그 끔찍한 굴속에 갇혀 있을 수는 없었다. 르페브르의 말대로, 완벽해 보이는 이 세계에도 분명 균열이 있다. 덕지덕지 기워서 메우고 가려 놓았지만 여전히 곳곳에 틈이 있다. 다만 우리들 서로가 서로에게 테러리스트가 되어 서로의 눈을 멀게 해서 그 틈을 보지 못할 뿐이다. 몬태그에겐 비티가 바로 그 틈이었다. 철학 따위에 빠졌다가는 길을 잃을 것이 분명하다며 체념을 종용하지만, 그의 그 말이야말로 지극히 철학적이었다. 그 역시 길을 물었던 것이고, 실컷 길을 걸었던 것이다. 비티는 바로 그 말에 끌려 길을 나선다. 사진도 책도 아닌 사람에게서 길을 듣고 읽은 것이다. 비록 비티는 여전히 틈에 끼어 있지만, 비티의 뒤를 따른 몬태그는 그 틈을 찢는다. 만약 책이, 사진에 길을 묻는다면, 사진이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이 틈이 아닐까?
현린은 서울대와 동대학원 및 인도 IIE(Indian Institute of Education)에서 교육철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고등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사진과 영화를 읽고 쓰며 문화정치와 예술교육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학교 밖에서 사진, 영화와 함께 대안교육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http://hyunreen.net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사진, 책에 길을 묻다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