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4-17
2012년은 ‘생활주의 리얼리즘사진의 주창자’, ‘한국사진계의 대부’ 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 붙은 임응식(1912~2001)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다. 임응식은 한국사진의 다방면에 걸쳐 기틀을 다진 선구자적인 사진가이자 교육자, 비평가, 조직가로서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생활주의 리얼리즘은 한국사진에 기록의 가치를 처음으로 끌어들였고, 예술제도와 예술교육에 사진을 편입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기사제공│ 월간사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임응식을 재조명하는 기념사업들이 준비되는 중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11년 12월21일부터 2012년 2월21일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 임응식의 대규모 회고전을 연다. 사진가의 회고전을 국립현대미술관이 제안해 주최하기는 사실상 이번이 처음으로 한국사진에서 차지하는 임응식의 위상과 상징성을 추측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이지호 학예연구1팀장은 “작가 중심의 근현대 미술사 조명과 미술관 컬렉션을 위한 전시 중 하나로 준비되는 전시”라며 “임응식의 회고전은 설악산 작가 김종학 전시와 함께 한국현대미술의 지평을 연 대가의 회고전으로 그의 일생을 거쳐 이룩한 화업을 총정리하는 전시”라고 설명했다. 또 전시기간에는 임응식을 재조명하는 심포지엄이 몇 차례 열려 화려한 헌사만큼 속속들이 연구되지 않았던 임응식의 업적과 한국사진사의 가려진 부분들이 얼마나 정립될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회고전의 전시기획을 맡은 이경민(사진아카이브연구소)은 “리얼리즘 계열의 사진뿐만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다양한 작품을 남겨 이를 아카이브하는 전시로 기획 중”이라며 “한국 사진사 속에서 조명된 적이 없는 그의 업적을 검증하고 조명하는 자리도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리얼리즘, 문화재, 초상 등 시대별 사진작품
이경민은 임응식에게 늘 붙어다니는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가라는 수식이 그의 사진활동 중 특정시기에 한정된다고 바라본다. 생활주의라는 하나의 틀이 아닌 각각의 시대와 조응하면서 어떤 행보를 걸어왔는지 입체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임응식은 1912년 부산에서 태어나 1931년 부산여광사진구락부에 가입해 사진활동을 시작했고, 1934년 일본 사진잡지인 ‘사진살롱’에 출품한 ‘초자(硝子)의 정물’이 입선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전조선사진연맹이 주최한 ‘조선사진살롱’(이후 조선사진전람회로 개칭)에 ‘둑을 가다’, ‘모자''(母子) 등이 입선하면서 활발한 사진활동을 이어갔다. 당시는 광선이 만드는 농담 표현을 중시하고 균형 잡힌 구도, 감각적인 화면 배치 등 형식미를 내세운 ‘살롱사진’이라 불린 예술사진의 경향이 강했다.
예술지향적이었던 임응식의 사진관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크게 변한다. 종군사진가로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 수복을 취재한 임응식은 형식미를 추구하던 사진의 기록적 가치를 인식하고, 1950년 부산에서 미공보원의 주최로
<경인전선 보도사진전>
을 갖는다. 그는 회고록에서 “살롱사진만 알던 내가 종군사진가로 참전 후 나흘간 셔터 한번 누를 수 없었던 것은 사실상 나의 사진이념의 혁신을 위한 진통의 순간이었다. 사진작품은 결코 아름다움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표현해야 한다”고 적었다 그럼에도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그의 사진에는 살롱사진의 형식과 다큐멘터리사진의 형식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1953년작인 ‘나목''(裸木)은 부산 국제시장 화재로 폐허가 된 장면을 나무 옆에 서있는 소년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나무와 하늘의 선명한 명암대비나 균형잡힌 구도, 나뭇가지의 조형성은 살롱사진에 더 가까워보인다. 사진비평가 박평종은 한 사내가 목에 구직 팻말을 걸고 있는 임응식의 대표작인 1953년의 ‘구직''(求職)부터 살롱사진의 형식과 조형성에서 벗어났다고 평가한다. 60년대 말부터 임응식은 건축잡지 ‘공간’의 주간을 역임하며 광범위한 문화재 사진을 남긴다. 1976년부터 1979년까지 5권이 발간된 ‘한국의 고건축’은 우리 문화재의 구조와 아름다움을 세밀히 담아내 문화재 건축사진의 중요한 기틀을 제공했다. “나에게 있어 카메라는 스케치북이고 직관과 마음의 움직임에 따르는 도구”라고 했던 임응식은 기록을 넘어 미학으로 사진예술의 영역을 넓혀갔다. 150여명에 이르는 예술가의 초상사진 시리즈를 남겼고, 생을 마치기 직전까지는 사라져가는 옛 명동의 모습을 담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카메라를 메고 명동 거리에 나섰다.
경인전선>
생활주의 사진운동의 명과 암
임응식이 주창한 생활주의 리얼리즘은 50~60년대 한국사진의 지배적인 사진경향으로 퍼져나갔다. 스스로 1950년을 기점으로 이전을 살롱사진의 시대로, 이후를 생활주의 사진의 시대로 구분하며 생활주의 사진의 승리를 선언하기도 했다. 자신이 주도해 1952년에 설립한 한국사진작가협회(현재 한국사진작가협회와 다름)를 통해 생활주의 사진운동을 펼쳐나갔다. 작품활동과 각종 신문지상의 비평문 기고를 병행하며 생활주의 사진운동이 세계적인 사진조류이자 시대적인 요청임을 주장했고, 반대편의 살롱사진 흐름을 향해 사단 정화운동으로 공격했다.
박평종은 생활주의 리얼리즘이 한국사진에 기록의 가치를 처음으로 끌어들였고, 사진가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과 역사에 무관심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을 토대로 적극적으로 현실을 담고자 했던 태도를 높이 평가한다. “기록에 중점을 둔 현대적 의미에서의 다큐멘터리 사진이 꽃피우는 자양분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반면 살롱사진과의 단절을 내건 슬로건의 형태로 제시되면서 정작 리얼리즘 이론에 대한 연구로 나아가지 못한 점을 한계로 지적한다. 이 결과 리얼리즘을 표방한 많은 사진가들이 고유의 사진형식을 완성하지 못했고 결국 조형성에 탐닉하는 공모전 형식의 사진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경민은 살롱사진과 해방 이전 시대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과 배제는 지금까지 균형 있는 사진사 연구의 장애물로 작용하는 점을 지적한다. 당시에 기술된 사진사에서 의도적으로 반대편의 사진가와 사진단체가 축소되거나 배제된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
사진사 텍스트 정립, 걸어다니는 사진사(史)
임응식은 1950년대 중반부터 여러 신문에 그해 사진계의 다양한 행사들을 정리해 기고했다. 그중 몇 가지를 보면 ‘방향이 세워진 사진예술, 55년도 사단 회고’(조선일보 1955년 12월28일), ‘생활주의 사진의 승리, 병신년 사단 회고’(경향신문 1956년 12월19~20일), ‘사단 신인 진출의 성관’(경향신문 1957년 12월27일), ‘사단 10년의 자취, 사협을 중심으로’(조선일보 1958년 8월19일) 등으로 매해 이어진다. 그리고 사단 10년사, 20년사, 40년사 등의 통사적 글쓰기도 병행해 여러 매체에 실었다. 통사에서는 시대를 구분해 해방 이전까지를 개화기, 한국전쟁 전까지를 태동기, 1961년 5.16군사쿠데타까지를 격동기 그리고 이후를 전개기로 나눠 기술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5년부터 77년까지는 한국사진사의 완결판이라고 지칭한 4편의 텍스트를 발표한다. ‘한국사진사’(사진표현과 작가 1975년), ‘한국사진약사:개화기~1975’(문예총감 1976년), ‘한국사진사:개화기~1975’(포토 텍스트(2) 1977년), ‘한국사단의 형성과 문제점’(미술과 생활 1977년 10월) 등이다. 이들 텍스트는 향후 한국사진사를 이해하는 교본이 되면서 생전 그의 이름 앞에 ‘살아있는 사진사’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사진교육과 단체 조직, 사진제도 형성의 구심
임응식의 중요한 활동 중 하나는 대학에 사진교육을 실시해 제도교육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그는 195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개설된 사진강좌를 맡은 이래 여러 대학에 출강하면서 사진교육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1964년 서라벌예술초급대학의 사진과 신설과 1972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사진학과 설치로 결실을 맺는다. 임응식은 중앙대 사진학과 초대 학과장을 지냈다.
이와 관련해 우리나라 대학에서 사진교육이 처음 시작된 때가 1953년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이라는 임응식의 주장에 재고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경민은 정해창이 1953년 부산 피난시절에 이화여대 동양학과에서 교양과목으로 예술사진을 강의했고 수복 이후에는 덕성여대에서 사진학을 강의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들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대학에서 사진을 강의하며 사진학과의 설립과 교육과정의 정립에 기여한 업적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임응식은 일제강점기부터 수많은 사진단체를 결성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해방 이후 전국 단위 조직인 한국사진작가협회를 설립해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 가입시켰고, 한국미술가협회에 사진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사진단체의 조직과 예술제도로의 편입은 제도교육의 시행, 사진사의 기술, 사진담론의 생산 등과 더불어 사진제도를 형성하는 제반의 요소 중 하나로 임응식은 이 모든 것의 중심에서 한국사진을 형성하고 이끌어온 선구자적인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