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04
2007년 8월, 한국의 문화권력 지형이 뒤집어졌다. 문화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마오의 재림이랄 수 있는 심형래감독은 방송에 나와 눈물 몇 번 보였을 뿐인데, 홍위병을 자처하는 누리꾼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오만한 지식인들을 댓글로 혼내주고, 비평가들의 하방을 요구하고 있다. 황우석 사태로 이미 싸움꾼의 내공을 검증받은 바 있는 평론가 진중권씨는 이번에도 이 싸움의 중심에 섰다. 일체의 파시즘적인 집단주의를 경멸하는 태도는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누리꾼들은 더욱 ‘꼭지’가 돌아 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언론들의 태도가 진씨에게 우호적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글│ 이상엽(이미지프레스 대표)
기사제공│월간사진
한국판 ‘문화혁명’
과연
<디워>
는 뭐가 문제인 것일까? 일단 이 싸움은 영화판의 주류와 비주류의 싸움으로 보인다. 그럼 심형래가 비주류인가? “수백 억 원씩 펀딩 받고, 소득 1위의 연예인이었고, 아직도 방송권력이 막강한 그가 비주류인가?”라고 꼬집는 발언도 있지만, 그 발언에서도 심형래를 여전히 비주류라 생각하는 심사가 행간으로 읽힌다. 솔직히 심형래가 ‘바보 연기의 최고 달인’이라거나, 어린이회관 무지개극장에서 상영했던
<영구와 땡칠이>
로 200만 어린이 관객을 끌어 모았다거나, ‘대한민국 1호 지식인’이라는 것들도 사실 그의 하위 문화적 성격과 비주류적인 위치를 새삼 확인하는 장치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언제부터 영화가 한국에서 1급의 예술장르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심형래는 예전부터 영화판 경계 밖에 존재하는 타자였을 뿐이다. 그 타자를 심하게 다루다 보니 영화판은 조폭영화도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지언정 ‘영구’가 등장하는 그 어떤 영화도 비평의 대상에 올려본 적이 없다. 그런 심형래가 제대로 영화관에 걸릴만한 영화를 만들었을 때, 이미 가상의 집단화 되어 있었던 누리꾼들은 별 5개는 몰라도 3개쯤은 기대했을 법하다. 우리 기술로 할리우드에 맞서는 영화를 만들었다는데 말이다. 그런데 웬걸. 비평가들은 참으로 야박하게도 별 1개만을 수여했다. 즉 예상이 배신을 때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봉기했고 지식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7년 여름, 그렇게 한국의 ‘문화혁명’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지켜보다가 나는 김아타를 떠올렸다. 그의 학벌과 사진작업 방식을 보건데 분명 사진판의 주류가 아니었고, 세계를 대상으로(특히 미국) 작품을 마케팅 한다는 점에서 심형래와 닮아있다. 하지만 김아타를 세계시장으로 보내자고 몰려다니는 애국적 누리꾼도 없고, 그의 작품이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평론가도 없는 점에서 심형래와 또 다르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 사진판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다는 인물인 김아타를 그의 책
<뮤지엄 프로젝트 the museum project>
(Aperture 간)를 통해 탐구해 보기로 했다.
뮤지엄>
영구와>
디워>
애퍼쳐에 대한 추억
내 방 서가에는 사진집들이 좀 있다. 외국에서 간행된 사진가들의 사진집은 따로 정리해 두고 있는데, 책 등을 꼼꼼히 보면 한 출판사의 책이 꽤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바로 애퍼쳐(Aperture)의 사진책들이다. 이런 현상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자신의 서가에서 확인해 볼 일이다. 유진 리처드, 살가도, 샐리 만 등 참으로 대단한 작가들의 아름다운 책들이 애퍼쳐에서 나왔다. 가끔 파이돈이나 타센의 책들도 섞여 있지만 애퍼쳐의 책과 비교해 종합점수에서 미치지 못한다.
이 책들을 보면 아스팔트에서 출퇴근을 하던 병아리 사진기자 시절에 있었던 애퍼쳐출판사에 대한 추억이 떠오른다. 데모현장에서 늘 보던 한 외신기자가 있었다. 회사를 위해 송고하는 사진은 스트레이트 했지만, 그가 작품이라 믿는 것은 꼼꼼하게 암실에서 작업을 해 미려한 흑백 프린트를 만들었다. 그 사진들은 뭐랄까 ‘드와노와 브레송’을 섞은 명동풍이랄까! 그는 프린트를 약 100점 정도 묶어서 고급한 포트폴리오 상자에 넣고 다녔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가끔 그 사진을 보여줬다. “이 사진을 애퍼쳐에 보낼 거야. 그 곳에서 사진책을 내는 거지.” 사진사(史)에나 나오는 마이너 화이트의 애퍼쳐가 진짜 피부에 와 닿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굉장한데! 하지만 그것은 댁의 꿈일 뿐이지!’라고 했다. 그 때만 해도 한국인 야구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입성하는 것이 꿈같았던 때였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덩치가 미국인 못지않은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고, 장딴지 굵은 박세리도 LPGA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아! 미국 시장으로 진출해 성공하는 것이 꿈은 아니었구나’ 느꼈다. 그런데 그것이 사진판에서도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인 사진가가 처음으로 사진책의 명가 애퍼쳐에서 공식 출판을 한 것이다. 그는 우리가 다 알고 있다시피 김아타였다.
2년이 흘렀지만 2005년 4월, 가나아트센터 야외 공연장에서 열렸던 김아타의 책
<뮤지엄 프로젝트 the museum project>
의 출판기념회가 생생하게 기억된다. 어스름 칠 때인 봄날 오후 6시는 쌀쌀했다. 하지만 야외 공연장의 좌석을 모두 매울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작품 제작에 사용된 유리 상자를 전시하고 참석자들이 그곳에 들어간다거나,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한 영상물을 디스플레이 했던 스크린을 찢어 공으로 만들어 논다거나 하는 김아타의 퍼포먼스는 남이 하면 창피하고 유치해 보여도, 그가 하면 그럴 듯한 뭔가가 있었다. 오! 이 남자 강력한 ‘포스’가 있군. 사실 그 전까지 김아타의 작품을 상세히 접해보지도, 그의 이름을 관심 있게 기억해 본적도 없었다. 장르가 다르니 이해해 주시길!
하지만 이날 행사를 주최한 ‘김아타후원회’에는 후원회장인 이영미술관 관장 김이환을 비롯해 강맑실, 강봉규, 권순평, 김영수, 김희중, 오상조, 이명동, 조우석 등 사진계와 직간접적인 인연을 맺은 사람들 50여명이 망라되어 있었다.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이미 김아타는 후원을 받는 거물이었던 것이다. 김이환 후원회장은 “아타후원회는 김아타씨가 국제미술시장에서 대형작가로 성장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돼보자는 순수 문화운동 차원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작가를 후원하기 위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해 후원회를 결성한 것은 국내 미술계에서 흔치 않은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의 퍼포먼스와 모여 있던 후원회 사람들 보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바로 사진집. 책을 손에 잡는 손간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그리고 책을 열었을 때 나타나는 분홍색 간지. 와! 강력한 내공이 느껴졌다. 비로써 우리 사진책도 진일보를 하는구나! 그날 밤, 그냥 기분이 좋았다.
준비된 사진가, 휴스턴에 가다
한참 게릴라성 폭우가 서울에 출몰하던 지난달 8월 중순, 김아타를 인터뷰했다. 몇 차례 편집부에서 인터뷰 요청을 넣었다가 “스케줄 상 어렵다”는 거절을 당했던 터라 ‘12회 연재 중 언제라도 하면 되지’하고 있었는데 급작스레 시간이 잡혔다는 소식이 왔다. 나는 폭우를 줄줄 맞아가며 평창동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내내 “젠장, 차 없는 사람은 이 동네 사는 것은커녕 방문하기도 어렵겠다”며 투덜댔다. 하지만 왜 갑자기 인터뷰를 승낙한 것일까? 전 회에 구본창이 나와서? 이번 동강사진워크샵에서 만날 사람이기 때문에? 그도 아니면 얼마 전
<중앙선데이>
에 그의 작품과 내 기사가 함께 실려서? 하지만 잘 모르겠다. 물어 볼 필요도 없다. 다만 너무 급작스레 인터뷰가 잡혀 준비가 부실하다. 하지만 일단 부딪쳐 보자. 독자가 모르는 것은 나도 모른다는 것이 인터뷰의 기본 아닌가?
그의 작업실이라고 생각하고 찾아간 곳은 사실 그의 사무공간이었다. 1층에는 그의 얼음 모택동 연작(ON-AIR 프로젝트 113~116, 마오의 초상, 아이스 모놀로그 시리즈)이 걸려있다. 작품으로는 처음 접했지만 ‘대단하다’라는 느낌이다. 크기가 주는 물질감이 압도한다. 2층은 완벽한 AV시스템이 설치되어 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이 AV로 자신에 대한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먼저 보라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내내 영어로만 떠든다. 어째, 인터뷰어를 ‘기’(氣)로 제압하려는 듯하다. 오래전 서태지와 인터뷰하던 그 느낌이랄까. 잘못했다가는 인터뷰가 삼천포로 갈 수도 있다. 바로 책 이야기로 들어갔다.
중앙선데이>
뮤지엄>
당신의 책
<뮤지엄 프로젝트>
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휴스턴 포토페스트에 참가한 인연 때문이라 들었다.
뮤지엄>
2001년 3월 미국 휴스턴에서 열리는 포토페스트에 뮤지엄 프로젝트와 해체시리즈를 들고 나갔다. 그곳에서는 휴스턴의 석유재벌에게서 펀딩한 돈으로 한달 내내 모든 갤러리와 미술관이 사진을 전시한다. 그리고 전 세계 미술관 디렉터와 큐레이터가 모인다. 그들 중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 리뷰어로 참가한다. 그들에게 리뷰를 받기 위해 전 세계 프로 사진가들이 몰려든다. 이때도 포트폴리오를 들고 온 사람만 400명이 넘었다. 그래서 리뷰 신청은 1년 전에 받고 유료로 진행된다. 이 행사는 한국사진가들 여럿과 함께 갔었는데 리뷰를 신청한 우리 사진가는 나와 정주하 선생이었다. 물론 한국사진가들은 따로 전시회를 열었기 때문에 유수의 디렉터와 에디터들이 전시장을 방문했다. 하지만 나는 따로 리뷰를 신청했고 특히 만나고자 했던 사람이 바로 애퍼쳐의 수석 편집장인 멜리사 해리스였다. 하지만 첫째 날은 신청자가 몰려서 실패했고, 둘째 날 운 좋게 두 번째로 리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멜리사가 뒤집어졌다. “당신 어디서 온 사람이냐? 내가 전 세계 전쟁사진은 다 보고 있는데, 어떻게 전쟁을 박스에 넣을 생각을 했냐?”며 유쾌해 했다. 그녀는 꼭 뉴욕에 오면 자신을 찾으라고 했다. 딱 일주일 후에 뉴욕을 갔지만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내 몸집을 더 늘인 후에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작품을 소개하고 싶었고, 그 결과물이 애퍼쳐 165호에 소개된
<박싱 킴>
(BOXING KIM, 권투선수 김씨가 아니라, 포장하는 김씨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이다. 뮤지엄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8면에 걸쳐 소개가 됐다. 그리고 2003년 3월 다시 만났을 때는 내 책을 내주겠다고 했다. 나름 역사적인 사건이지. 멜리사는 미국에 나를 알리는 전도사다. 그런데 뭔 인연인지 다음날 국제사진센터(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약칭 ICP)의 큐레이터인 크리스토퍼 필립스를 만나 ICP 전시를 확정했다. 개인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연이어 터진 것이다.
박싱>
한국 사진가, 애퍼쳐의 작가가 되다
애퍼쳐의 멜리사는 “그가 자신의 작품을 보여 줄 때, 난 바로 이거다 싶었다. 내 목표가 훌륭한 작가를 발굴해 소개하는 것 아닌가. 물질과 정신, 파괴와 생산, 기록과 해설이 모두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아타김의 스타일은 유례없이 특별하고 굉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로 책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2001년
<박싱 킴>
기사가 나간 후 책을 만들겠다고 한 것은 2년이나 지나서였다. 멜리사가 탐색을 한 것인가?
박싱>
자기 매거진에 먼저 알려야 하는 정치적인 문제가 있다. 책을 낼 준비를 한 것 같다. 게다가 내가 협조를 잘 안했다. 딴에는 작업을 더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
<뮤지엄 프로젝트>
의 후기작인 ‘니르바나’ 작업까지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기억한다. 2003년 3월5일에 출판을 계약했다. 그 때 요이~ 땅! 한 것이다. 그리고 출판된 것은 2005년 2월이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출판 프로젝트다. 조건은 어땠는가?
초판 15,000부를 출판했다. 그리고 후에 추가로 5천부를 더 찍었다. 초판 제작비가 20만 달러쯤 소요됐다. 물론 전액 출판사가 투자한 것이다. 그리고 인세는 15% 지급 받았다.
일관된 디자인이 감각적이다.
‘아타김 출판팀’이 구성됐다. 스태프는 5명이었고 편집담당은 레슬리 A 마틴이었다. 모두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인 것이다. 디자이너 미코 맥긴티는 매우 감각적이고 세련된 실력을 갖고 있었다. 인쇄는 홍콩에서 했다. 애퍼쳐는 이미지 종류에 따라 흑백은 이탈리아에서, 컬러는 홍콩에서 인쇄한다. 인쇄는 만족한다.
뮤지엄>
출판을 진행하는 동안 작가와 에디터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투자는 거기서 하지만 내 책이잖나. 밀고 땅기고 많이 했다. 많이 싸우기도 하고. 편집과 관련한 메일이 100번은 왔다 갔다 했다. PDF파일을 통해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최종은 뉴욕으로 날라 가서 점검했다. 누구 의견이 더 관철되었는지 묻는다면 에디터 70, 내가 30이다. 워낙 프로들이라서 이 책이 어떤 컨셉인지 말 안 해도 아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도 워낙 꼼꼼하다.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상당히 정치적인 문제다. 열 받으면 책 만들지 말자고 했다가도, 타협하고 절충하고. 그렇게 책이 만들어졌다. 가장 많이 다툰 것은 책 표지였다. 재미있는 것은 앞표지 사진은 에디터인 레슬리가 결정했고 뒷표지 사진은 내가 결정했다. 레슬리는 “앞표지 사진은 양보 못한다. 미국사람 정서는 우리가 안다”고 했다. 그래서 “뒷표지 사진은 내가 한다”고 했다. 확실히 사진을 보는 동서의 차이가 있다. 오히려 나는 앞표지 사진이 “너무 동양적인 것 아니냐? 이 책이 부디즘 책으로 오해될 수 있다”고 했지만 레슬리는 “걱정마라. 우리의 눈이 정확하다. 독자들은 다르게 볼 것이다”고 했다. 어쩌겠나? 말 들어야지!
애퍼쳐와 또 다른 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애퍼쳐 여름호에 '마오'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반응이 좋다면 또 한권의 사진집이 나올 것이다.
다음 라운드를 준비하는 BOXING KIM
<뮤지엄 프로젝트>
는 독자의 성향에 따라서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겠지만 매우 정교하고, 서사구조도 잘 짜여진 이야기꾼의 책이다. 김아타는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진행된 프로젝트는 사물을 박물관의 그것처럼 유리박스에 세팅하여 오브제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나의 사적인 박물관을 만들어가는 프로젝트였다. 스스로 큐레이터와 발굴단원이 되어 사진이라는 호미로 흙을 걷어내고 동시대의 환경과 사람, 원초적인 폭력과 성, 정치와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유리 박스 속에 설치했다”고 한다. 이 책의 흐름을 따르면 필드 시리즈, 피플 시리즈, 창녀 시리즈, 섹스 시리즈, 참전용사 시리즈, 자살 시리즈, 홀로코스트 시리즈, 구세주 시리즈, 니르바나 시리즈로 이어진다. 거의 연대기순으로 배열했는데도 그 구성이 뭔가를 향해 상승하고 있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전달한다.
게다가 이 사진들이 요즘 유행하는 ‘유형학적 사진’들과 달리 필자에게 무게감 있게 다가오는 것은 그의 뮤지엄으로 콜렉팅 된 인간들의 무게 때문이다. 찍는 행위 보다 그 사람들을 준비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으리라. 그리고 작품이 8년 동안 진행되면서도 일관성 뿐 아니라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 책은 다큐멘터리사진집이 아니면서도 독특한 서사구조를 갖고 있어 읽기가 즐겁다.
이런 점에서 애퍼쳐에서 출간한 김아타의
<뮤지엄 프로젝트>
는 심형래의
<디워>
보다는 훨씬 완성도 있는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지역적인 특수성을 세계적인 보편성으로 전화시킨 작품이지만 제작비(!)만 비교하지 않는다면 내공에서는 김아타가 앞선다. 결국 김아타는 지지자들을 몰고 다닐 필요도 없고, 애국주의에 호소할 필요도 없고, 비주류라 자칭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작가 마케팅에 동원되는 한국 최초, 아시아 최초 등의 수식어들이다. 이런 개도국식 마케팅은 작품 자체의 미학적 완성도나 비평적 논의의 시도들을 막아버린다.
하지만 그가 ICP에서 전시를 가지면서 이미 책으로 출간된
<뮤지엄 프로젝트>
의 성공을 젖혀두고 신작인
책이 나오지도 않았지만 선주문 하라고 하면 미리 입금할 용의도 있다.
아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