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18
얼마전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국내 복귀 첫승을 따냈다.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의 백전노장이지만 공식적인 국내 첫 데뷔무대라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인상적인 호투로 첫승을 따낸 후에는 ‘특별하고 의미있는 1승’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처음’은 긴장되고 떨리며, 특별하고 의미가 있다. 지금부터 만나볼 5명의 새내기 사진가들은 ‘박찬호의 첫승’만큼이나 특별하고 떨리는 첫 개인사진전을 무사히 치렀다.
글│박지수 기자
기사제공│월간사진
지난 4월 갤러리에서 첫 선발등판한 안수희(27), 루트(48), 김정효(39), 성희진(29), 쉰스터(33). 과연 이들이 완투를 할지, 승리를 따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이들이 마운드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짐작할 수 있기에 박수를 보내며, 그들의 첫 걸음을 따라가 본다.
작가라고 불리는 것이 어색한 안수희, 루트, 김정효는 각각 회사원, 가정주부, 사진기자이다. 현실에 치인 자신을 위해 본업을 병행하며 짬짬이 준비한 이들의 개인전은 ‘이유 있는 외도’로 보인다. 신진 작가인 성희진, 쉰스터의 첫 개인전에선 작업자로서 관객과의 만남을 고민하며 내놓은 작지만 신선한 실험을 만날 수 있다.
이직 기간에 만난 특별한 꿈, 안수희
“좋은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에요. 깨고 나면 아쉬움이 크고 여운도 오래 가는….”
지난달 5일 대전의 갤러리 누다에서 전시를 마친 안수희는 한달 동안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꾸었다. “꿈을 이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사진에 대한 열망을 확인하는 계기였어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꿈을 꾸는 듯했다. 그리고 문득 언론정보학을 전공했던 대학시절의 수업시간을 떠올렸다. 당시 그녀는 ‘자기 PR’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필름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언젠가 자신의 이름을 건 사진전을 여는 것이 꿈이라고 수줍게 말했다. “교수님이 ‘아직 조금 덜 알려진 사진가’라고 말해줬는데, 무척 설렜던 기억이 나요.”
사진은 동아리로 시작해서 사진학과 진학을 고민할 정도로 빠져들었지만 졸업과 직장생활에 쫓기듯 살며 막연한 꿈으로 접어두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수희씨의 블로그를 본 갤러리 누다의 김태정 큐레이터가 전시를 제의해 잊고 지내던 꿈을 다시 꺼냈다. 이렇게 시작된 첫 개인전의 타이틀은 ‘The Island’, 이직 기간 중 잠시나마 숨고르기를 위해 다녀온 제주도 여행에서 촬영한 풍경사진을 모았다.
처음 하는 전시 준비라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누다의 김태정 큐레이터가 셀렉트에서 디스플레이까지 모든 과정에 도움을 주었다. 덕분에 그녀는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만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가까이서 그녀의 작품을 지켜본 김큐레이터는 전시서문에서 ‘지극히 무르고 성글며 시시하고 소소한 사진이지만 덕분에 맘껏 스며들 여지가 많고 보는 눈과 맘이 한결 편안했다’며 그녀의 어려운 첫 걸음을 격려했다.
고3 엄마의 늦깎이 사진 열정, 안명숙
'루트’라는 특이한 이름을 내걸고 사진전이 열렸다. 지난달 서울 사간동의 갤러리아트사간에서 열린 사진전 '루트가 간다'에서는 이름만큼 이색적인 폴란드의 도보성지순례를 만날 수 있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쳉스토호바의 야스나구라 성모대성전까지 약 300km의 대장정이 사진으로 펼쳐졌다. 이 전시의 주인공이자 특이한 이름의 주인공은 고등학교 3학년 자녀를 둔 가정주부인 안명숙씨다.
내일모레 오십을 앞둔 중년이지만 전업작가를 꿈꾼다며 포부를 말할 때는 영락없이 수줍은 사춘기 소녀의 모습이다. 그녀는 뒤늦은 나이에도 중앙대 평생교육원을 거쳐 현재 상명대 문화예술대학원 사진학과에서 비주얼아트를 전공하며 사진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처음 사진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직업상 필요해서였다. 주간지 편집기자였던 그녀는 편집과정에서 사진을 잘못 선택해 전달하려는 내용이 왜곡되면서 곤혹을 겪었다. “어떤 사진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독자들의 해석이 전혀 달라지더라. 사진공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됐어요.”
이렇게 시작된 사진공부는 점차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창작욕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대학원을 진학하고, 첫 개인전으로 이어졌다. “사적인 여행사진이지만 관객과 공유하고 싶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폴란드 성지도보순례를 알리고 싶어요.” 이러한 바람을 담은 전시는 6월6일부터 서울 명동의 평화화랑에서 관객과 다시 만난다.
갤러리의 ‘아스팔트’ 사진기자, 김정효
젊은 남녀 커플 두쌍이 서로 다른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다. 다정한 연인이어야 할 이들은 서로에게 데면데면한 모습으로 각자의 스마트폰에만 열중하고 있다. 최근 스마트폰 때문에 생겨난 사회풍속도를 꼬집어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전
“개인전을 여니까 사진작가라 부르는데 어색하기만 합니다. 내 이름이 달린 축하 화분이 오는 것도 얼떨떨해요.” 오프닝을 불과 서너 시간 앞둔 그는 이제야 조금씩 실감이 나는 모양이었다. “신문에 실린 사진에 문제가 생기면 함께 책임을 지지만, 개인전은 모든 것이 내 몫이기 때문에 조금 두렵다”며 떨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가릴 것 없이 현장을 누비는 ‘아스팔트’ 사진기자로 뛰어다니기도 빠듯할 텐데, 짬을 내어 개인전까지 여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10년 넘게 사진기자로 일해왔지만 정작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진을 찍지 못했어요.” 2009년에 대학원에 진학해 사진을 공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의 바람이 작은 결실을 맺는 개인전이지만 반신반의한 생각도 든다. “1,000만원 정도 들었어요. 통과의례나 경험으로 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비용이죠. 작품이 많이 알려지거나 팔린다면 모르겠지만….” ‘고비용 저효율’의 한계를 지적하는 그의 표정은 씁쓸했지만 금세 “어렵게 준비한 전시인 만큼 앞으로 잊혀지지 않게 작업을 이어 나가야겠다”며 희망과 자신에 대한 다짐을 강조했다.
등골 브레이커의 온라인 개인전, 성희진
“FM 펀드로 사진하는 등골 브레이커랍니다.”
생소하게 들리는 성희진씨의 자기소개에 절로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FM은 아빠(Father)와 엄마(Mother)의 약자죠(웃음). 돈 많이 드는 사진을 해서 부모님의 등골을 휘게 하니까요.” 우스갯소리 같지만 그녀의 부연설명에는 젊은 작업자로서 느끼는 팍팍한 현실이 그대로 녹아있다.
데뷔 무대가 필요하고 자신의 이름과 작품을 알리는 것이 절실한 그녀가 선택한 첫 개인전은 뜻밖에도 온라인 전시였다. 지난 3월 오픈한 온라인 갤러리인 갤러리 블랭크(www.galleryblank.blog.me)에서 한달간 사진전
“내 작업을 보여줄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어요.”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두드린 온라인 갤러리는 예상외로 반응이 괜찮은 편이다. “작년 서울사진축제의 포토리뷰전에 참가했는데, 친구 1명만 보러왔어요. 하지만 이번 온라인 전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잘 봤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고,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에게도 축하를 받았어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적은 온라인의 위력이 발휘된 덕분이다. 또한 “친구들이 집에서 파자마를 입고 감자칩을 먹으면서 모니터로 보니 무척 편하대요”라며 온라인 전시여서 가능했던 일들을 꼽았다. 그리고 젊은 작업자로서 온라인 갤러리에 대한 생각을 덧붙였다. “관객은 작품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주기 때문에 작가는 늘 관객을 고려해야 해요. 요즘 관객들이 온라인 공간에 더 익숙하고 편리함을 느낀다면 작가나 갤러리도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리얼한 쉰스터의 발랄한 시도
거리의 행인들이 가득 차있는 대형 사진작품 아래에는 같은 사진이 프린트된 작가의 명함이 ‘찌라시’처럼 흩뜨려져 있다. 한쪽 벽에 붙은 4×6인치의 작은 사진들은 ‘마음에 드는 사진을 가져가도 됩니다’라는 안내문과 함께 관객의 손을 기다린다. 경기도 파주의 아트스페이스휴에서 열린 쉰스터의 첫 개인전
이번 전시에는 거리에서 촬영한 수백장의 행인 사진을 조합한 ‘Street Drama’와 사진매체의 형식을 탐구한 ‘최종구도’ 시리즈가 선보였다. 특히 ‘Street Drama’에서 작가가 선택한 길거리는 무대로, 수백장 중에서 임의로 골라낸 행인을 배우로 변신시켜 이야기(드라마)를 연출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쉰스터는 이 시리즈로 2010년 영국 더비에서 열린 포맷(FOMAT) 국제사진대회와 2011년 33회 중앙미술대전에서 수상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디지털 사진의 특성과 장점이 잘 드러나는 작업만큼이나 사진에 대한 생각도 남다르다. “제 사진이 온라인의 MP3 파일처럼 사람들에게 마구 뿌려졌으면 좋겠어요”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그는 작품에 에디션을 매기지 않는다. “손쉽게 복제되는 이미지 파일에서 뽑아낸 사진인데, 에디션을 매기는 것은 이상해요. 에디션은 시장의 논리일 뿐 사진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것 같아요.” 나름대로 사진매체와 대중과의 소통에 소신있는 태도이지만 일부 갤러리 관계자에게 ‘프로답게 굴어라’, ‘작가의 아우라를 신경써라’라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남모를 설움을 겪은 그에게 이번 전시는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발판인 셈이다. “갤러리가 원하는 도도하고 쉬크한 작가보다는 솔직하고 생기 있는 ‘리얼한’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쉰스터의 행보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