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11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이토록 뭇매를 맞는 ‘몸뚱이’가 또 있을까. 덩치 큰 사각의 몸은 오늘도 사방에서 날아오는 ‘한방’을 견뎌내며 어느덧 불혹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 잡은 아파트 이야기다. 부동산 투기 문제는 물론이고 현대인의 개인주의 심화와 소외의식 등 수많은 사회경제적 문제와 연결됨으로써 사회의 필요악적 존재로 인식돼온 가운데, 일찍이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아파트를 소재로 그 문제점을 지적한 다양한 이야기가 전개돼왔다. 가장 최근 작품으로는 만화가 강풀의 원작을 영화화한 ‘이웃사람’(감독 김휘)이 있다. 강산맨션 202호 소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스릴러 영화에서 이웃에 사는 연쇄 살인범을 통해 이웃 간의 무관심이 불러온 비극을 조명한다. 아파트를 소재로 한 초창기 작품으로는 1971년 ‘문학과 지성’에 발표된 최인호의 단편소설 ‘타인의 방’을 들 수 있다. 주인공을 향해 돌진해오는 집안의 가구와 사물들은 폐쇄적인 아파트 공간 안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과 소외현상을 초현실적으로 풀어낸다.
글│현정아 기자
기사 제공│월간사진
많은 사진가들 역시 아파트를 소재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화덕헌과 최중원은 한미사진미술관이 기획한
재개발 풍경 속의 21세기 아파트, 화덕헌
건축가 승효상은 강의와 칼럼을 통해 줄곧 “집은 땅과 밀착돼 ‘터무니 있게’ 지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터무니’의 모체가 되는 ‘터-무늬’를 언급해왔다. 그의 말에 의하면 ‘터 무늬’란 산과 계곡, 물길로 이루어진 터의 고유한 지문으로, 집이란 응당 그 터 무늬에 기대어 지어져야 마땅하다고 했다.
우리에게도 그런 집을 짓던 시절이 있었다. 패이고 솟아오른 태초의 지문을 언덕 삼고 흙과 나무를 재료 삼아 작은 마을을 짓던 시절 말이다. 그러나 국가의 개발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터 무늬는 이내 지워내야 할 얼룩 정도로 취급받기 시작했다. 불도저와 굴착기로 무자비하게 깎여나간 것은 비단 산과 물길만이 아니었다. 그 주변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 역시 함께 송두리째 깎여나갔다. 승효상은 이처럼 모든 흔적을 갈아엎고 그 위에 새롭게 지어진 아파트를 두고 “터 무늬 없는 건물”이라고 명명했다.
승효상의 칼럼에서 전시 제목의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화덕헌은 올해 초에 열린 그의 전시 '터 무늬 없는 풍경'에서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아파트를 바라봤다. 부산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화덕헌은 재개발 사업이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부산의 변화를 대형카메라로 정밀하게 담아내며 폭력이 내재하는 재개발 풍경을 기록해왔다.
부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슬로건들. 작가는 “이런 종류의 슬로건들은 역설적이게도 하나 같이 어떤 결핍을 감추면서 동시에 드러낸다”고 말했다.
현재 부산은 그 어느 지역보다 도시의 변화 속도가 빠르다. 지난 7월19일자 조선일보 1면에 3년 전에 찍은 해운대 사진을 어제 찍은 해운대 앞바다라고 게재해 파문을 일으켰던 것 역시 그만큼 해운대의 경관 변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사진 속의 배경이 되는 달맞이 언덕은 현재 5층짜리 AID 아파트가 철거되고 지상 53층 2,400세대 대단위 아파트의 골조 공사가 마무리되고 있는 단계이다.
흙과 함께 파묻힌 승당마을 이야기
그는 지금껏 터 무늬에 기대 살던 부산 서민들의 모습, 달동네의 관통 도로인 산복도로 등을 찍으며 사라져가는 것, 사라져갈 것들을 기록해왔다. 그런 그가 부산에 새로 지어지는 고층 아파트를 향해 마치 장전하듯 카메라를 겨누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승당마을 사건을 이야기한다. 1990년대 초반까지 작고 평화로운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이곳이 일순간 아비규환이 돼버린 사연이었다. 부산의 첫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어 1996년부터 본격적인 철거가 시작된 승당마을은 재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18미터 고공 망루를 세워 190여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이며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고, 16명이 구속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당시 철거민 편에 서서 격렬한 농성을 벌였던 대학생들은 부상당한 철거용역반원들의 치료비 명목으로 모두 1억3천만원을 배상해야 했다.
짓밟음으로 새로운 터를 닦은 옛 승당마을 자리에는 현재 부산에서 가장 큰 교회인 수영로교회가 들어섰고, 20층 아파트 19개동 1,680세대의 동부올림픽 타운이 조성되었다. 작가는 “수많은 교인들의 찬송가와 중산층 입주민들의 여유는 옛 승당마을 사람들의 아픔과 어떻게 닿아 있는 것일까?”라고 물으며 어제를 잊어버린 듯한 태연한 얼굴을 바라본다. 그가 카메라를 겨누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세계 일류도시’의 터무니없는 풍경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모 아파트의 광고 카피를 보고 홍세화는 “상상력의 빈곤에서 오는, 그 자체로 야만”이라고 말했다. 화덕헌 역시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당신이 사는 곳에 살았던 그 누군가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을 한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이처럼 야만적인 문구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만은 곳곳에서 자행된다. 개발업자들의 농간에 국가까지 합세하여 부산은 이미 2006년에 주택 보급률이 100퍼센트를 넘어섰고 해운대는 116퍼센트를 넘어섰다. 부산의 고밀도 아파트 재개발 사업은 실수와는 무관한, 그야말로 부동산 투기를 위한 주택사업이 된지 오래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다이내믹 부산’, ‘크고 강한 부산’, ‘매력 있는 세계 일류도시 해운대’, ‘글로벌 창조도시’ 등과 같은 슬로건으로 도배된 부산의 모습이 참으로 ‘터 무늬 없다’.
20세기 아파트의 흥망성쇠, 최중원
‘Ctrl C+Ctrl V’로 지어진 ‘이 뻔한 세상’. 대량 복제 시스템으로 지어지는 오늘날의 대규모 단지형 아파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곳곳에서 머리를 치켜세우고 있다. 그런데 여기, 한 덩치하는 무리들 사이로 쭈뼛쭈뼛거리며 ‘겨우’ 존재하는 몸체 한덩이가 있다. 구도심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초창기 아파트의 모습이다.
최근 최중원은 전후 복구사업과 주거환경 개선이라는 거국적 명분으로 1960년대 이후에 세워진 초창기 아파트 모델을 찍었다. 그의 사진 속 이미지들은 어쩐지 그동안 자주 봐왔던 획일화된 아파트와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대부분 단지를 이루지 않은 독립형 소규모 아파트이며 건축 형태 역시 모두 제각각이다. ‘이 뻔한 세상’ 속에 뜨문뜨문 고개를 내미는 뻔하지 않은 풍경이다.
최중원이 찍은 오래된 아파트는 기력이 쇠한 구부정한 노인과 같은 몸으로 닳고 바래고 낡아가며 시간이 명한 제 몫의 오늘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다. 그러나 스러져가는 그네들의 모습이 비단 연민이나 안타까움만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작업을 위해 오래된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보면 생뚱맞은 장소에 아파트 한채만 덩그러니 서있는 풍경을 자주 접하게 된다”며 “처음엔 그 모습이 재미있어 몇장 찍어보는 정도였지만 점차 이곳의 모습을 아카이브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그가 이처럼 낡디 낡은 아파트에 점점 마음이 쓰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스스로 “심플하고 모던하고 세련된 것보다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널브러져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해온 작가였기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으레 짐작이 갔다. “어릴 적에 느낀 행복한 감촉과 감각들이 취향을 만드는 것 같다. 하교길에 손으로 훑고 다니던 벽의 감촉처럼 울퉁불퉁하고 거친 것들을 좋아한다. 매끈하고 예쁘기만 한 것에는 웬일인지 시선도, 손길도 가지 않는다.” 그는 덧붙여 때가 타고 낡아서 두껍게 마티에르가 생긴 것들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스러져가는 ‘혁명 한국’의 상징
‘초창기에 지어진 아파트 모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라는 호기심에서 시작된 ‘아파-트’ 시리즈에는 이미 재개발로 사라진 것들을 제외하고 ‘국내 최초의 아파트’라는 칭호가 따라다니는 충정아파트, 변종아파트의 신호탄과도 같았던 동대문아파트, 유명 연예인이나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거주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던 남산 회현시범아파트, 삼각맨션아파트, 한강맨션아파트 등 한때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이들의 현재 모습들이 담겼다.
특별히 그 모습이 흥미로운 이유는 당시 지어진 대부분의 모델들이 그야말로 프로토타입, 즉 초창기 시범 모델이어서 ‘짓는 사람 마음대로’, ‘짓고 싶은 대로’ 천차만별의 모양새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의 ‘생활혁명’이라는 기치 아래 대한주택공사가 지은 마포아파트가 인기를 얻자 너도나도 좀더 나은 주거 모델을 실험하게 된 것이다. 대한주택공사나 대규모 건설회사가 아닌 소규모 건설회사가 개인에게 하청을 맡겨 지어진 아파트는 이른바 ‘변종아파트’의 시작이었다. 그중 반응이 좋은 아파트는 대량 복제되어 비슷한 구조의 아파트를 대거 양산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1년, ‘혁명 한국의 상징’을 꿈꾸었던 마포아파트가 철거되면서 이들의 영화로웠던 삶도 한낱 추억으로 남겨진 채 하나 둘씩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최중원은 그들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비로소 아름답게 마티에르가 생긴 그 몸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했다. 벽 위에 칠해진 최초의 색이 색을 잃고 그 위에 또 다른 색이 칠해질 때마다 그곳에서 살다간 사람들, 지금도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함께 쌓여갔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모두 다른 문짝에 창문을 달고 있고 개인의 취향에 따라 복도 난간에 식물을 키우거나 마늘 따위의 먹거리를 걸어놓기도 했다. 단지형 아파트가 낡으면 담당 용역업체가 알아서 관리를 해주지만 이처럼 소규모 독립형 아파트들은 관리해주는 용역업체가 따로 없어 페인트칠을 해도 제 집 앞만 칠해놓곤 한다. 문짝이나 창이 떨어져도 마찬가지다. 1평 남짓한 마당이 딸린 개인 주택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거주자의 삶과 취향이 아파트에 묻어나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이들이 묻히고 간 삶의 울퉁불퉁한 때를 어루만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