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26
한장의 사진은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모일수록, 엮일수록 사진의 힘과 가치는 더욱 커진다. 이를 증명하듯 브레송과 프랭크의 신화는 한장의 사진이 아니라 한권의 책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사진집 한권을 만드는 과정은 지리멸렬하다. 넣고 빼고를 반복하고, 순서와 크기를 만질 때마다 달라지는 이야기는 곤혹스럽다. 사진을 방해하지 않는 최소한의 디자인을 고민하면서 사진가와 조율해야 하는 디자이너는 더욱 곤혹스럽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덜어내고 추려낼수록, 효과적인 순서와 크기를 찾을수록, 서로 눈빛이 통할수록 사진집은 사진작업이 가진 것 이상의 가능성을 전달할 수 있는 미디어가 되기도 한다.
여기 사진집 만들기의 곤혹스러움을 감당하며, 그 가능성을 실험하는 두 사람이 있다. 아트디렉터 홍동원은 육명심, 배병우, 박노해 등의 주로 묵직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사진집으로 만들어왔다. 특히 육명심은 그에게 책 만들기를 전적으로 일임할 정도로 신뢰가 깊다. 그래픽디자이너 박연주는 천경우, 백승우, 정희승 등 주로 개념적인 사진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의 작품집을 만들며, 사진을 잘 이해하고 작가들과 말이 통하는 디자이너로 주목을 받고 있다.
글│박지수 기자
기사제공│월간사진
사진가의 인생이 담긴 그릇을 굽는 아트디렉터 홍동원
사진이 살아가는 집을 짓는 그래픽디자이너 박연주
1. 사진집 디자인의 시작
팩트가 있는 사진, 에디팅의 묘미
홍동원 : 어느날 육명심 선생이 갑자기 사무실을 찾아오셨어요. 당신이 정년퇴임을 앞두고 책을 준비한다면서 저에게 만들어달라고 하더군요. 한참 윗어른인데다 서울예술대학에 강의를 나가면서 친분이 있어서 난감하더군요. 당시에 바쁜 일도 많았고, 솔직히 사진집은 돈이 되는 작업이 아닌지라 할까, 말까 고민이었죠.(웃음) 그런데 육선생이 평생 작업한 사진을 펼쳐놓자 그만 사진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어요. 그리고 사진에서 하나하나 정확하게 팩트를 집어주는 이야기에 무척 놀랐습니다. 사실 저는 그전까지 사진이 멋있는 이야기만 하면서 뜬구름을 잡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사진에서 말하는 미학이란 것이 쉽게 말하면 ‘얼마나 멋지지 않은가’에 관한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육선생의 사진을 보고 사진도 사람이 읽을 수 있는 텍스트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처음으로 진정한 다큐멘터리 사진을 봤다고 할까요?
박연주 : 5~6년 전쯤인가, 정희승 작가에게 연락이 왔어요. 우연히 제가 디자인한 책을 봤다면서 전시 포스터와 도록을 맡기고 싶다고 했어요.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사진가들과 작업이 이어졌습니다. 결정적으로는 사진전문지 ‘이안’의 편집디자인을 작업하면서 부쩍 사진집 일이 많아졌죠. 딱히 사진집을 한다, 안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작업하면서 사진집만의 재미를 느꼈어요. 사진과 책은 프린트를 거친다는 점에서 서로 작업공정이 비슷합니다. 작품을 프린트하는 데이터가 그대로 종이에 인쇄되기 때문에 책으로 만나는 사진은 작품과 그리 동떨어지지 않아요. 상대적으로 회화나 조각 등 다른 작품들은 사진으로 찍혀서 책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사진보다 한번의 과정을 더 거치죠. 그리고 무엇보다 사진의 순서와 배열에 따라 결과물이 변화하는 에디팅의 묘미가 사진집만의 매력인 것 같아요.
2. 기억에 남는 사진집 작업
미학보다는 콘텐츠, 작품구조가 반영된 제본
홍동원 : 사진이 담고 있는 콘텐츠에 따라 편집방향이 달라지지만 기본적으로 사진을 일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그래서 처음 작업한 육명심 선생의 ‘장승’에서는 나와 가장 가까운 시대의 장승에서부터 가장 먼 시대의 장승 순으로 배열하고, 이를 다시 유사성으로 그룹핑했어요. 독자들이 첫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장승의 흐름을 쉽게 알아보도록 하려는 의도였죠. ‘백민’을 작업할 때도 마찬가지로 미학적인 접근보다는 사진을 콘텐츠로 파악했습니다. 가장 토속적인 느낌의 얼굴에서 가장 최근의 인상까지 배열하면서 도시와 지방을 기준으로 나눴어요. 가장 최근에 작업한 ‘영상사진 1966-1978’에서는 막판에 편집을 다시 했어요. 육선생과 대화를 나누면서 사진들이 대부분 가운데가 텅 비어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편집부터 표지와 제목까지 모두 바꿨죠. 제가 본 사진의 느낌, 제가 겪은 육명심이라는 사람을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하려는 노력이었어요.
박연주: 사진가와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먼저 작품을 공유하고, 사진가의 기본적인 성격이나 취향도 캐치하려고 노력해요. 작업이나 작가에게 받은 느낌이나 생각들을 토대로 몇개의 키워드를 정하고 작업에 반영합니다. 백승우 작가의 ‘Utopia’를 작업할 때는 서로 큰 판형을 직관적으로 공감해 신문형식으로 만들어 봤어요. 신문용지를 사용했고, 텍스트는 따로 분리해서 작게 리플릿 형식으로 삽입했어요. 박찬민 작가의 ‘Blocks’은 건축물이 서로 가로막고 단절된 느낌을 살려 페이지를 구성하고, 사진집을 감싸는 슬리브를 만들었어요. 책을 넘길수록 작은 판형의 페이지가 거듭되는 박종빈 작가의 전시도록과 제본을 위 아래로 어긋나게 하면서 지면의 변화를 준 정경자 작가의 작품집은 작품의 구조를 제본방식에 반영하려는 의도를 담아봤어요. 디자이너로서 두드러진 스타일보다는 전체적으로 미니멀한 느낌이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결과물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3. 사진집 제작의 어려움
이미지와 텍스트의 균형, 변수 많은 인쇄과정
홍동원 :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 '라 광야'의 전시도록을 만들 때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어요. 중동지역을 기록한 사진작업이라 아랍어, 영어, 한국어를 동시에 표기하면 의미가 있을 것 같았어요. 아랍어는 우에서 좌로, 영어는 좌에서 우로, 한글은 세로로 배열해 3개국의 쓰기문화를 보여주자는 아이디어였죠. 인쇄가 끝나고 제본과정에서야 뒤늦게 텍스트가 사진을 뭉개버릴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만든 책 중에서 가장 이미지와 텍스트가 충돌하는 결과물이었고, 사진전이 아니라 글자전의 도록 같다고 느낄 정도였어요. 이후에 박시인의 사진집을 만들 때는 우선 사진부터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캡션까지 모두 뒤로 보냈어요. 그랬더니 박시인이 잘 써놓은 캡션이 사진과 너무 멀어졌어요. 이제는 캡션을 사진과 함께 놓지만 사진에서 가장 멀리 배치합니다. 사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사진에 도움을 주는 텍스트가 되도록 말이에요. 이처럼 실수를 통해 배우면서 사진을 먼저 보고 호흡이 지났을 때 텍스트가 보여야 한다는 지론을 얻었습니다.
박연주: 책은 인쇄되어 나올 때까지 아무도 그 결과물을 장담할 수 없어요. 똑같은 사진책을 동일한 사양으로 인쇄한다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겠죠. 하지만 매번 처음 인쇄되는 사진책을 만들기 때문에 최종 결과물이 실제로 어떻게 나올지 신경을 써야 합니다. 게다가 저는 디자인이나 그래픽적인 공정보다는 인쇄와 제본 등의 제작 측면에 관심이 많아서 사진이 종이 위에 구현될 때의 질감이나 분위기를 많이 상상하는 편이에요. 사진의 의미를 읽어내고, 나에게 어떤 생각과 느낌을 주는지 고민하는 것이 가장 1차적인 단계라면, 그 다음으로 이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정이라고 봐요. 같은 사진이라도 10가지 종이에 인쇄하면 각각 느낌이 다른데, 이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사진가와 함께 고민합니다. 여기서 따뜻한 느낌이 좋다거나 더 날카로운 느낌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제 생각을 제안하면서 샘플을 찾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해요.
4. 내가 생각하는 사진집
인생이 담긴 그릇, 사진이 살아가는 집
홍동원 : 10대에 읽은 어린왕자와 20대에 읽은 어린왕자는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이를 보면 책은 다른 상품과 달리 사람 곁에서 오랫동안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기본적으로 저자의 철학을 배우는 책은 그에 알맞은 꼴을 갖춰야 합니다. 독자들도 책에 조심스럽게 다가갈 필요가 있고요. 마찬가지로 사진가의 인생이 담긴 사진집 역시 광고사진을 보는 것과는 달라야 해요. 의도적으로 책을 조금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아무리 책이 안팔리는 시대라지만 책이 사람에게 접근하는 기본자세를 지켜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어요. 마치 어렵게 얻은 손자에게 무조건 ‘오냐, 오냐’하듯 책이 쉽게 독자들에게 들이대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그런 싸구려는 금방 들통 나요. 고급은 오래될수록 고급스럽고, 좋은 것은 시간이 지나도 가치를 잃지 않아요. 이런 생각으로 책을 만들고 있지만, 이렇게 책을 만들면 출판사는 망해요.(웃음)
박연주 : 일반적으로 책은 평면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책도 저마다 입체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판형이나 제본방식, 커버의 형태와 종이의 재질감 등을 모두 뭉뚱그려 책의 구조라고 볼 수 있어요. 책을 만들 때 구조를 가장 먼저 떠올리고, 책이 과연 어떤 덩어리로 있어야 하는지 고민합니다. 제가 사진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고민의 결과가 달라지는데, 이는 결국 사진이 담고 있는 내용과도 연결돼요. 궁극적으로는 작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진이 오래 살아갈 수 있는 집을 만들어야 하죠. 소박하게 지을지 화려하게 지을지, 단층으로 지을지 2층으로 지을지, 평수는 어느 정도이고 자재는 무엇을 쓸지, 그 안에 누가 살 것인지를 상상하며 집을 설계하는 과정과 비슷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