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8-09
나는 그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인쇄소에서 흘겨보았던 패션지 속에서 내 마음에 쏘옥 들어왔던 그의 사진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풍경과 인물, 그의 사진 한 장속에서 관람자에게 화자로서 많은 이야기보다 한 눈에 느껴지는 쾌감을 먼저 건네준다. 사진가 박경일, 그가 누구던가. 서른이란 나이에 현실 속 은행원이란 이름을 버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결코 쉽지 않은 경로로 사진계에 뛰어든 사람. 현재, 출판, 인쇄계에서 그의 이름 석자는 이미 유명하다. 보그나 엘르 같은 패션지 또는 패션광고에서도 그의 사진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 그만의 독특한 사진이야기를 들어보자.
글ㅣ 함영민 (http://www.dazzi.net)
패션 사진가가 된 은행원
외국계 은행에 다니던 프로그래머, 박경일은 한 선배가 취미로 알려준 사진에 그가 심취하기 시작한다. 그의 나이 서른 하나, 아내에 아이까지 있던 그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안정된 생활을 계속 할 것인가. 새로운 삶을 개척할 것인가. 그의 머릿속에는 사진으로 꽉 차 있었다. 홀연히 미국 뉴욕으로 사진 유학을 떠난 그는 패션스쿨 파슨즈에 입학하여 4년간 마치 소설 같은 삶을 살게 된다. 주경야독과 반대로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는 모델 에이전시의 테스팅 포토를 맡으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95년 귀국하면서 그는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희망은 있었다. 뉴욕 생활을 하면서 그가 경험한 파슨즈의 열린 사진 교육방식과 삶을 유지하기 위해 촬영한 사진들은 곧 그의 재산이었다. 그의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포트폴리오는 이미 정상급이었다. 그의 포트폴리오를 접한 잡지사와 출판사들은 모두 그의 사진에 관심을 보였고, 곧 그의 이름은 모르면 간첩이 될 정도로 이 계통에서 널리 퍼져나갔다.
B2
그의 스튜디오 B2는 사진업종이 즐비한 신사동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널찍하다 못해 공허한 70평 남짓한 스튜디오 한 구석 쇼파. 우리는 서로 마주 앉았다. 내가 온통 하얀 벽면속의 공간과 외국어가 섞여 나오는 라디오 소리에 적응할 무렵쯤, 이따금씩 담배 재떨이에 재를 떨거나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입에 갖다대던 그가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덩치에 걸맞지 않게 작은 키보드를 잘 두들기네요.” 그의 눈매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동시에 분당 칠팔백 타로 초안을 두들겨대는 PDA 자판을 보더니 그가 대뜸 꺼낸 한 마디. 그렇게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스튜디오 이름 B2는 그가 어렵게 처음 스튜디오를 오픈한 곳이 지하2층, 그래서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B2란다. 약간은 허탈한 느낌.
사진에 미쳐 본 적이 있는가?
이 질문을 셔터를 누르는 것은 당신에게 무슨 행위인가로 풀어 물었을 때, 10초정도를 멈칫한 그가 대답했다. “나 자신의 표현법” 단순했다. 그뿐이었다. 그는 사진찍는 행위에 미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가 좋다면 그릴수도 있고, 사진으로 찍을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음악으로 표현하기도 글로 표현하기도 한다. 기술발전이 이루어지면 생각을 바로 화면에 뜨게 할 수 있는 기술도 나올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떠오른 좋은 이미지들을 현실화하는데 쓰이는 것이 바로 사진이고, 여러모로 현실적으로 가장 자신에게 적합한 표현법이 바로 사진이었다는 것.
그는 사진 자체를 사랑해서 열병을 앓고 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어 그걸 남기고 간직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가 꿈꾸는 것을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사진을 도구로 삼았을 뿐. 그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그림이나 음악으로 담아낼 수 있었다면 화가나 가수가 되었을 것이다.
나의 카메라는 모나미 볼펜이다.
박경일은 카메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모든 사진가들이 그렇듯이 단지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얘기한다. 손가락을 딱 튕기며 그가 꺼낸 얘기는 다름 아닌 볼펜. 핫셀블라드나 라이카가 몽블랑 만년필이라고 한다면, 그가 지금 쓰는 소모품들은 모나미 볼펜에 가깝다. (그만큼 손에 익었고, 자유롭게 활용하고 있다는 뜻) 그는 니콘 F2부터 시작하여 현재는 캐논의 EOS 1D MARKII를 사용하고 있다. 분명 이쯤 되는 사진가라면 중형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에게 카메라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심지어 5천원을 주고 문방구에서 구입한 중국산 컴팩트카메라로도 작업을 하여 좋은 반응을 얻은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패션 사진가에게 사진 셔터의 감촉은 파인아트계열의 사진가와 다를 수 밖에 없다. 파인아트의 사진가가 현실속의 피사체를 잡기 위해 순간을 멈춰놓는 작업이라면 패션사진가의 작업은 아이디어와 기획 단계로 벌써 2/3이 이루어진다. 기획자, 장소협찬, 의상 스타일리스트, 헤어 디자이너, 메이크업 등 셔터 한번을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하는 작업이다. 파인아트가 셔터로 순간을 잡은 쾌감이라면 패션사진가의 작업은 철저한 기획 속에 거대한 건물을 완공했을 때의 뿌듯한 느낌이다.
그림 그리는 사진가
말한대로 그의 재산은 공상이다.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지면 뱉어내야 한다. 그의 아이디어 공책에는 스케치가 가득하다. 그의 사진들의 아이디어는 그가 생각한 공상들을 스케치하여 남겨 놓는 것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번 MTV 개국 작업은 홍콩MTV에서 디렉션을 맡았다. 기획부터 맡아서 해달라는 얘기에 프레젠테이션이나 가시안이 아닌 그가 그려간 스케치를 보여주자 OK사인이 떨어졌단다.
외국에서의 작업은 클라이언트에게 스케치를 보여주면서부터 진행되는데 반해 국내는 촬영할 사진을 다른 사진을 짜깁기 하여 보여주면서 시작된다고 한다. 남의 사진을 보여주고는 똑같이 촬영해야 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사실상 광고주가 감을 못 잡는다며 국내에서는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사진가의 창조적인 작업을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다.
사진은 껍데기다.
그는 사진 자체에 대한 의존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여행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할 때면 그런 사진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상대 쪽에서는 쉽게 믿지 않는 눈치지만 그게 사실이다. 그는 여행을 갈 때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는다. 여행지에서의 풍경을 렌즈를 통해 보지 않고 마음과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평생에 걸쳐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면 경외심마저 든다. 그 사진 속에는 그들의 철학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에게 사진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미술이나 음악, 글이 모두 표현매체인 것처럼 사진도 그렇다. 그의 삶에 사진은 어떤 틀로서 필요한 것이지 그 자체가 종착역이라고 여긴 적은 없다.
사진을 통해 내가 담아내는 것들에 희열을 느끼고 쾌락을 맛볼 뿐 사진 자체에 크게 연연하지는 않는다. 처음 작업을 시작 했을 때나 지금이나 일관되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갑자기 아프리카 케냐에 가서 동물 사진을 찍어 오라거나 연예인 사진을 찍으라고 하면 그는 괴로워 할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박경일이란 남자, 자기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잘 하고 싶은 걸 할 때 행복하다고 느낀다.
패션 사진은 현실이 아니다.
패션사진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바깥쪽 그 어딘가에 있다. 근본적으로 그가 생각하는 패션 사진은 환상이다. 그는 패션 사진을 통해 꿈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그는 보통의 한국여성보다 핏기 없이 하얀 피부, 부스스한 금발 머리카락, 묘한 파란 눈, 남자보다 더 큰 키를 가진 모델들의 기이한 느낌에 전율한다. 길을 걷다가 자주 마주치는 그런 얼굴이 아니라 태어나기를 잘못 태어난 것 같은 혹은 다른 혹성에서 온 듯한 비현실적인 이미지에서 창작 욕구를 얻는다. 그건 현실이 될 수 없고 지구상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또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박경일은 사진에서 리얼리티를 원하지 않는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것들을 현실로 끄집어내어 생생한 실체로 만들어 내는 것, 그런 작업을 통해서만 자유를 느낀다. 징그러울 정도로 커버렸으나 아직도 날개 달린 천사를 생각하고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서 비눗방울을 불고 있는 꿈을 실제로 해 볼 수 있는 게 패션 사진이다. 사진은 그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누구의 손길도 닿은 적이 없는 백지를 내 손길로 채워가는 기쁨. 그 뿐인가, 그걸 본 사람들의 여러 가지 반응까지 즐거움이 된다. 그의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무서워하는 사람, 귀여워하는 사람 그 칼자루를 쥐고 있는 그 자신이 너무 짜릿하다. 어차피 현실은 지루하니까.
무의식의 세계를 분명한 현실로 만들어 내는 것, 지금까지 그는 그가 생각한 그런 작업을 해왔고 10년, 20년 뒤에도 그가 여전히 하고 있을 작업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