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9-22
우리나라 사진의 산실, 충무로 한복판에서 만난 그는 가장 편한 차림으로 나를 맞이했다. 그가 사진가가 아니라고 한다면 마치 인상 좋은 분식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모습.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성남훈씨다. 얼마 전 새로 선보인 사진갤러리 까페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그의 고향은 전라북도 진안이었다. 상업계 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사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뒷받침이 되지 못했고, 부모님의 뜻에 따라 대학에 진학했다. 그가 대학에서 관심을 보인 것은 연극이었다. 그는 그후로 연극활동을 10년간 했다. 연극은 종합예술이었다. 그러나 지방에서 시작한 연극은 발전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중 연극을 같이 하던 친구가 좋아하던 사진을 어깨너머로 접하게 되었다. 그가 예술분야에 관심을 보이며 그 안에 쌓아 두었던 예술적인 소양들은 사진 속에 아주 쉽게 녹아 들어갔다. 그러나 그 것은 아주 잘못 된 생각이었다. 한국이란 곳은 사람에 약한 곳이었다.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를 뚫고 발전하기가 힘든 세상이 바로 한국이었다. 그는 철저히 외톨이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당시 기본이 없던 그의 사진은 겉핥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갑작스런 유학을 결정한다. 그가 택한 곳은 파리의 사진학교 이카르 포토였다.
퇴로를 차단하고 들어간 이카르 포토는 그에게 새로운 자극제가 되었다. 패션사진을 해보자 시작한 사진공부였지만 그 곳에서도 그의 생각은 많은 변환을 가졌다. 가난한 유학생이었음에도 프랑스에서의 생활은 안정적인 느낌이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했지만 마음이 넉넉했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참 치열하게 살고 있던 나라였다.
아를르에서 열린 사진 페스티벌에 참여했던 그가 본 사진은 한 어린이 병동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내가 생각했던 사진은 사진이 아니었구나.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이 있었구나. 사진은 이런 것이구나. 그의 머리 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도 모르게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음악과 사진이 절묘하게 섞여 있던 그 포토 페스티벌은 그가 원하던 사진에 대한 방향성을 깨닫게 된 계기였다. 그가 몰랐던 비주류적인 삶을 알고,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방법들을 공부하는데 다큐 사진이 필요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곧 그에게 새로운 길이 되었다.
글ㅣ 함영민(http://www.dazzi.net)
우연한 기회에 만난 루마니아 출신의 집시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생활하다시피 했다. 무언가 다를 것 같아 들어갔지만 그들은 자신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친구가 되었고, 가족이 되었다. 그러기를 1년, 그 자신도 집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사진기를 들었다. 가족사진 찍듯이 그들을 찍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사회성을 공부를 하게 되었고 절로 사진 공부를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 들과의 사진은 각종 대회에서 상을 받게되었고, 좋은 주변의 평가도 받게 되었다.
나는 무얼까 하는 궁극적인 질문부터 사진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 학습적으로 부족한 사진들이 어떤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궁금점들이 있던 혼란스러웠던 그에게 집시와의 생활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해도 된다는 싸인을 받은 것과 같은 성과를 얻어낸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 그 때부터 정치, 경제의 주류에서 밀려난 정체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대륙별로 샘플링을 하며, 고루 다녀보면서 공부를 하였고, 10년정도의 시간동안 촬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세계적으로 분쟁이 많이 일어났다.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전쟁터에 많이 가게 되었다. 사람들, 전쟁터에서도 밀려난 그 사람들은 중앙에 있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아픔을 같이 겪으며 동시에 그 아픔을 사진에 담았다. 자신의 아픔과도 같은 것들이었다. 그때는 사진은 꼭 다큐적이어야 한다는 관념조차도 없었다. 단지 삶이었고, 아픔 속에서의 셔터 한방이 그가 살아가는 이유와 같았다.
그가 가는 곳은 오지였고, 전쟁터였다. 최소한 그의 신변을 보장해줄 수 있는 지원군이 필요했다. 94년 당시 그와 함께한 에이전시는 라포였다. 라포 에이전시는 그를 지원해줄 수 있는 지원군과 같았다. 매그넘이 바깥 세상을 담는 사진을 찍었다면 라포는 유럽 안의 서정을 담는 사진을 찍는 곳이었다. 세계 경제의 불황이 있던 때였던 97년, 아시아의 경제가 무너지던 상황에서 라포는 아시아를 잘 담을 수 있는 카메라맨으로 그를 꼽았다. 다른 시장을 찾고 있던 라포였다. 사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그에게도 좋은 조건이었다. 고향에서 가까운 교두보를 두고 활동할 필요가 있었다. 정서적으로 유리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아시아에 정서를 담기에는 서양인들보다 그가 유리했다. 그리고 곧 그가 귀국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 아니나 다를까. IMF가 터졌다. 삼풍백화점 사진을 찍기 위해 그가 귀국했다고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그 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느 날 사진작업 중 친구와 잠깐 강남에 들렸는데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삼풍백화점이었다. 교통은 마비상태였고, 그는 카메라를 들고 뛰었다. 사고 현장에 도착하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무너져도 어떻게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 하는 거였다. 사진가가 사진 찍으러 마음 먹고 가서 이렇게 놀랄 정도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전쟁터에서 폭격을 맞아도 건물이 이렇게 무너진 것은 본 적이 없던 그였다. 가까이에서 보니 신음소리에 먼지에 난리도 아니었다. 구출해 내고 도와줄 수 있는 겨를 자체도 없었다.
순간 그의 입에서 구역질이 시작되었다. 상황이 사진가를 압도하는 곳이었다. 너무도 잔인하고 가슴이 아파 그런 사진들을 찍어 내가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전쟁은 차라리 피아간에 인과관계라도 존재하지만 재앙은 단지 재앙이었다. 우리나라의 치부인 이 사건을 촬영한 사진은 차마 소속 에이전트로 내 보낼 수가 없었다. 누군가 그에게 사진을 찍으면서 가장 힘든 때가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그는 단연 이 때를 꼽는다.
그가 처음으로 잡은 그 자신의 카메라는 프랑스에서 구입한 FM2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사진을 촬영하는 것은 그때만큼은 재미가 없어졌다라고 얘기한다. 오토포커싱이니 자동 노출이니 기계적으로 발전하고 여러 기능들이 많아졌지만 사람이 할일이 별로 없어지고, 자동화가 되어 오히려 흥미가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2003년도 올림푸스에서 제안이 왔다. 그 때만 해도 굉장히 고가였던 디지털 카메라들이었다. 올림푸스의 E-1을 쓰면서 아날로그 카메라들을 처분했다. 사람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으면 쓰게 되는 정(情)이 남아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디지털로 전환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포서즈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올림푸스 DSLR의 4/3의 비율, 그 것은 적응하는데 힘들긴 했지만 적응하니 좋은 점이 많이 보였다.
렌즈 자체가 가볍고, 폼이 나지 않긴 하지만 다큐멘터리에서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동성이다 보니 단점보다 렌즈들에 더 많은 점수를 줄 수 있었다. 2002 한일월드컵때 프랑스 르몽드지에 약 보름동안 사진 컬럼을 내보냈는데 디지털카메라는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자체적으로 CCD의 먼지를 떨어내주는 기술은 먼지 많은 환경을 다니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디지털에 대해 익숙해지고 장단점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때, 그는 좌절에 빠질 뻔했다. 이 디지털이라는 녀석이 쉽고 편하기만 한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디지털 후 작업은 공부하고 시도를 하면 할수록 어려워지는 것이었다. 지금은 다큐멘터리에 맞춘 최적의 작업환경으로 디지털을 다루고 있는 그지만 그 때 당시는 사진공부를 새로 시작한 기분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다큐멘터리를 새로 시작하는 사진가에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다큐사진은 외로움 싸움이라는 것이다. 피드백이 빠른 인터넷 생활이지만 정해진 주제가 있다면 동호회인들끼리 나가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혼자서 그 주제에 대한 고찰을 해봐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자신이 정해놓은 주제로 3년간만 꾸준히 작업을 한다면 그 자체에 아우라가 생기게 된다. 한 번의 작업을 잘해 놓게 되면 후에 10년간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생기게 되고 투자가 생기게 된다. 사람들이 붙고, 평론도 붙고, 에디터도 같이 가는 사진가의 기틀이 완성된다.
마치 세상사는 방법과 비슷하다. 그의 처세술과 비슷한 맥락이기도 하다. 한 가지 주제에 정열적으로 꾸준히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생각외로 상당히 힘든 일이기도 하다.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그 끝은 항상 쓰다. 그의 사진은 지금 그의 목표에 반절 정도 왔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스피드가 붙어 있기에 자신은 있다.
요즘 그는 전시회 준비에 한창이다. 지금 대구에서 사진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데 그 곳에 참여하고 있다. 기존에 촬영해 놓은 사진들을 스캔하고 있으며, 얼마 전 낸 [유민의 땅] 사진집은 반응이 좋아 두 번째 판형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에는 첫판에서 미비했던 점들을 보완하여 내려고 노력중이란다. 또 유민의 땅을 준비하면서 생각했었던 사진전도 기획중이다. 그간 촬영해왔던 어린이들의 사진을 모아 그들을 위한 전시와 출판도 계획하며 분주히 지낸다. 그의 사진에서는 특히 어린이와 여성이 많다. 유민의 땅이 약 15개국에서 촬영한 사진들로 모아졌다면 이번 작업은 약 26개국 가까이 되는 많은 나라의 어린이들이 나온다. 현재는 사진작업과 동시에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전주대학교 영상학과에서 후배들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