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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김수남 추모전과 김수남

2007-04-03


글 │ 김장섭 (사진가 / 한성대학교 대학원 교수)


이것은 우리나라 민속학계 대표적인 학자 중에 한 사람인 황루시 교수가 김수남을 두고 한 말로 김수남 작업의 성격과 그 위상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사실 김수남은 사진계보다 다른 문화 예술계와 학계에서,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알려지고 평가 받는 인물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선 그의 사진은 민속학, 문화인류학과 연관된 내용으로 일관된다는 점과 사진가로서의 역할을 넘어서는 학문적 지식에서 연유한다.


김수남의 사진 굿
지난 2월 7일 인사동에 위치한 인사아트센터에서는 작년 2월 4일 태국 치앙라이에서 소수 민족 리수족의 신년 행사를 취재하던 중 뇌출혈로 타계한 사진가 김수남의 추모전(2007.2.7~20)이 열렸다. 평소 김수남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던 학계와 문화계, 예술계 인사들이 모여서 만든 ‘김수남 기념 사업회’(이사장 김인회)에 의해 기획된 전시로 제목은 ‘혼魂, 김수남의 사진 굿’이라고 지어졌다. 말 그대로, 김수남의 혼과 정신, 그리고 그가 평생 찍어 놓은 사진들을 정리하여 그의 1주기를 기리는 전시로서의 굿판을 열겠다는 기념 사업회의 의도다.

작품들은 ‘한국의 굿과 예인들’, ‘아시아의 굿’, ‘김수남 사진 연대기’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눠져 인사아트센터 1, 2층과 지하층에 걸렸다. 김수남의 사진 세계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그의 서거 1주기를 맞아 그의 일생을 조망할 수 있게끔 배려한 것이다. 출품작은 한국의 굿 20여 점, 예인들 35점, 연대기 35점, 아시아의 굿 25점으로 전시 공간에 비해서 많은 작품은 아니었지만 김수남이라는 사진가를 읽어내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무수한 역작들 중에서 기념 사업회에 의해 선별된 소수의 작품들이 작가의 역량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전시 첫 날, 나는 수많은 관람객 속을 서성이면서 문득 전시장 어디쯤에서인가 기분 좋게 떠들고 있을 것만 같은 김수남을 상상했다. 마치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한동안 어딘가 멀리 취재를 떠나 안 보이는 것은 아닌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는 김수남의 큰 아들 얘기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오랜만에, 나에게는 익숙하기만 한 김수남의 유작들을 찬찬히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사진 위로 기억 속의 그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한 장, 한 장 사진마다 서려 있는 김수남의 혼을 들여다본 것이다.

김수남 사진의 힘 그리고 신화
16만 장이라고 했다. 김수남 기념 사업회의 실무진이 몇 달 동안 유작들을 분류하고 셈해 본 결과였다. 거기에 더해 이십여 년간 마흔 세 권의 책을 출판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작 하는 사진가들이 세상에 많이 있다 할지라도 16만 장의 작업량은 질리게 하는 숫자임이 분명하다. 다큐멘터리의 특성상 필름 소모량이 많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싶다. 김수남은 그런 사진가였다. 무언가에 씌지 않고서는 이루어 낼 수 없는 규모가 아닌가 말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와 함께 작업한 지인들 입에서 늘 한결같은 얘기가 나온다. 그는 언제나 현장에서 “놀라울 정도로 자신에게 몰입”(정성희) 했으며,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 외의 것들에는 철저히 무관심”했다(황루시)는 것이다. 이러한 주위 사람들의 평가는 김수남의 노력과 능력을 여지없이 보여 준다. 말 그대로 프로 의식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동시에 혼신의 힘으로 작업에 임하는데 마치 신들린 것 같더라는 얘기를 들을 만큼 김수남은 완벽을 추구했던 사진가였다. 1980년대 초쯤이었던가, 김수남은 내게 “한국에서 진짜 프로는 나밖에 없다”는 식의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만큼 그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김수남다운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자신감으로 16만 장에 이르는 방대한 원고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일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전의 김수남은 말하고 다녔다. 그리고 그 말 그대로 그는 언제나 사진을 사 줄 매체보다 한발 앞서 기획을 진행했고 행동으로 옮겼다. 바로 여기서 여타의 사진가와는 다른 행태를 보인다. 누구보다 앞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발견해 내고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안목과 지식이 김수남 사진의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김수남은 엉뚱하게도 지질학과 출신이다. 학창 시절 <연세춘추> 편집장을 시작으로 언론계와 인연을 맺은 후 <동아일보> 기자와 객원 편집위원을 거쳐 프리랜스 사진가에 이르게 되는데 그가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가 겨우 서른 일곱 살 되던 해였다. 잘 나가는 직장을 그만 둘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튼 쉽지 않은 결정을 한 그는 아시아의 무속으로 사진 시선을 확대해 간다. 당시 어느 정도 한국의 굿 작업을 마무리하기도 했고 『한국의 굿』(열화당) 시리즈의 출판으로 주변의 인정과 당시 출판계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던 김수남이었기 때문이다. 결코 막연하게 움직일 김수남이 아니기에 그의 프리랜서 선언에는 목표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1988년 김수남은 일본 국제 교류 기금을 받아 오키나와 류큐대학 사회학과의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이 때가 김수남의 사진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데, 한국의 전통 문화에 국한되었던 그동안의 사진 작업이 오키나와 거주를 통해 일순 변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 첫 번째는 흑백에서 컬러로 변한 것이었고, 두 번째 변화는 화면에 넘쳐 나는 컬러와 함께 힘 있는 화면 장악 능력의 확보다. 이것은 이후 1995년 전시 <아시아의 하늘과 땅> 을 통해 여실히 보여 주게 되는데 김수남에게 있어 오키나와 체류 경험처럼 중요한 분기점도 없을 것 같다. 또 다른 세계와의 만남이었고 또 한번 스스로 혁명을 꾀하는 기회였던 것이다. 당시 서울의 일본문화원에서 문화 담당 외교관으로 주재하던 오노 이쿠히코의 도움은 김수남이 일본 국제 교류 기금을 받는 데에 결정적인 것이 됐는데 바로 이러한 김수남의 사람을 끄는 재주는 그의 일생 동안 그를 돕는다. 빠르고 적절한 기획력, 철저한 준비와 현장 장악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인간적인 흡인력이 김수남 사진 신화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1995년 8월 김수남은 일본의 대표적인 사진 상인 히가시가와상을 받게 된다. 바야흐로 국제적인 명성을 굳히는 계기가 된 히가시가와상 수상에 이어 그 해 가을 10월에는 지금은 없어진 신촌 그레이스 백화점에서 ‘아시아의 하늘과 땅’이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열면서 같은 이름으로 사진집을 만들어 내는데 이 책은 그 해 출판 대상을 받으며 김수남의 주가를 올려 준다. 여기서도 역시 김수남은 당대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디자이너, 편집자, 필자들의 도움을 받아 전람회를 열고, 책을 만들었다. 그의 인간적 흡인력은 언제나 빛을 발해서 어떤 일을 해도 항상 자신을 최고의 조건 속에 올려놓고야 마는 것이다. 1997년, 나라의 수치라 일컫는 IMF 사태가 일어나 우리나라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을 때도 김수남은 여전히 원고를 쓰고, 사진을 팔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그의 능력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당시 한국의 사진가치고 힘겹지 않은 자가 드물었는데도 말이다.


카메라를 든 큰 무당 김수남
김수남 사진의 힘은 그가 가진 여러 장점과 걸출한 미적 감각의 결합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역시 그가 가진 특유한 인간적 흡인력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을 내게 끌어들이기에 앞서 내가 먼저 남들에게 끌려 들어가는 능력”이며 “남들의 무의식 속에 자기가 먼저 뛰어 들어가는 피흡인력 내지는 감정 이입 능력”이 그에게서 발견된다는 김인회 교수의 회상은 이를 뒷받침한다. 이것은 마치 큰 무당들만이 가지고 있는 감정 이입 능력과도 닮은 것이라는 얘기인데 증언에 의하면 김수남은 언제나 굿판 속에서 거리낌 없이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이끌어 내며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녹여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울과 부채 대신 사진기를 들고서 사람들과 만나고, 공수를 내리는 대신에 셔터를 내려 자기가 본 것을 형상화하는 것이 보통 무당과 다른 것이다”(김인회)라고도 했다. 또 김수남의 사진은 “축제가 빚어내는 열기와 눈부신 원색으로 그려”지며, “비일상적인 공간의 카오스적 에너지로 충만된”(김승곤) 사진이 탄생된다고도 말해진다.

달려들 듯 굿판 가득한 열기가 그의 필름 위에 정착되는 순간들, 사건(굿) 한복판에서 그 사건과 같이 호흡해 피사체의 체취와 맥박까지 묻어나는 그의 사진에서 우리는 진짜 굿판에서 일어나는 신과의 무의식적 조우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장대한 샤머니즘의 탐색행探索行”이라는 말로 김수남의 사진 행위를 정의했던 일본의 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는 어쩌면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들(샤먼)의 마음의 움직임 그 자체”를 김수남은 읽어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사진 속 무당들의 얼굴에서 신 내림의 극치의 순간이 선열하게 보여질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일 것 같다. “샤먼들의 그 뜨거운 가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그 정수를 찍어”(스기우라)가는 김수남의 촬영 행위 속에는 김인회 교수가 토로했던 그대로 “카메라를 든 큰 무당” 김수남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찍는다는 행위로부터 예술과 현장이 분리될 수 없는 또 하나의 세계, 즉 김수남적인 탁월한 사진 세계가 열리며 완성되어 갔던 것이다.

김수남이 남겨 놓은 16만 장의 사진과 마흔 세 권의 책들은 작가 개인의 신화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방대하다. 더구나 김수남이 이루어 낸 사진적 가치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예술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을 만큼 빼어나다. 그것은, 사료史料로서, 그리고 예술 작품으로서 언제부터인가 문화 예술 유산으로 인식될 만큼의 것이 되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의 전통은 20세기 초반부터 확립되었지만 이제 사진은 매체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개념의 다큐멘터리를 요구하는 시대에 놓였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삼십여 년간을 단 하나의 주제, 즉 무속과 그에 관계된 전통 문화에 집중된 눈길을 던졌던 이 시대의 탁월한 사진가 김수남이 우리나라의 사진 역사 속에 놓이게 됨은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해서 그 누구에 의해서도 시도되지 못한 육중한 다큐멘터리의 세계가 우리 사진의 전통으로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화라 불려도 좋을 것이다. 신화는 신화가 만들어진 지점이 아니라 신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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