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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사색으로의 초대 천경우

2007-08-07

취재 │ 전미정 기자
사진 제공 │ 가인 갤러리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데, 만난 적이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만나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천경우. 얼마 전 있었던 전시 (2007.5.17~6.17/가인 갤러리)에 맞춰 잠시 한국에 들어왔던 그를 놓쳐 버리고 이메일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직접 대면하는 인터뷰와는 다른 모종의 어려움에 봉착했다. 물리적인 만남은 아니라도 대화를 나누었으니 당연히 만난 것이지만 역시 얼굴 없는 인터뷰는 어딘지 모르게 다르다. 과연 우리는 만난 것일까, 만나지 않은 것일까? 분명 타인과의 조우라는 미명을 달고 있었던 그와의 인터뷰가 오히려 (혹은 아마도) 내 자신과의 만남으로 이어져 버렸다. 마치 깊은 사색으로 인도하는 듯한 그의 사진처럼 말이다.

천경우의 사진을 말할 때 가장 중요한 지점은 역시 ‘시간’일 것입니다.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에 대한 접근이 눈에 띄는데 이는 ‘열린 시간’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시간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나 그 자체를 주제화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름 지어 놓은 시간이라는 체계는 인간이 스스로 존재의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을 주지만 우리는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단지 시간을 하나의 방향으로 흐르는 강물과 같이 볼 것인가 아니면 반복으로 볼 것인가는 고민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을 감지하는 것은 인간이 받은 축복이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죽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는 고통이 항상 공존합니다.

그러한 시간관이 자리를 잡기까지 영향을 받은 것들이 있다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시간에 대한 서구의 철학자들이나 물리학자들의 사고는 흥미진진하고 매혹적입니다. 베르그송과 같이 시간을 철저히 주관적으로 규정하거나 에드문트 후설같이 체계화하여 논리적 설득력을 부여하려는 현상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지적인 공감보다는 나의 경험과 정서적 뿌리에 근거하여 감성적인 동요를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으며, 대부분은 자연을 근본으로 하여 세계를 이해하려 했던 동양의 자연관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는 사람을 시간 자체, 시간을 신으로까지 이해하던 고대 마야 문명이나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였던 아프리카의 문명과도 유사합니다.
시간에 대한 고민은 어떤 특정한 계기에 의해서라기보다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빚어진 자연스런 필연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라는 시스템이 있지만 각자의 내면에 고유한 시간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이는 물론 각자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의 양에서 많은 부분 기인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말하는 주관적인 사진 의식이란 일상 속의 시간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작업을 통해 그러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관객들이 느꼈으면 하는 것이 있나요?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사진 안의 시간과 일상 속의 시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일상에서 어떠한 현상을 의식적으로 바라보거나 그것을 창조적인 이미지로 만들어 내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나는 나의 사진을 통해 무언가 구체적인 것을 이해시키고자 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이해보다는 경험과 반응에 더 흥미를 느낍니다. 나의 사진이 세계를 잘라 내어 좁은 상자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넓은 판타지를 향한 창으로 보이길 바랍니다.

이번에 전시된 ‘VERSUS’나 ‘Pseudonym’은 시간을 매개로 하여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작업들이었습니다. 그간 보여 주었던 정지된 초상 사진들이 작가와 모델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면 이번에는 피사체로 등장하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또 다른 소통에 대해 환기시킵니다(물론 예전의 ‘18×1minute’ 퍼포먼스의 경우에도 퍼포먼스에 참여한 관객들이 자기만의 18분을 경험하는 동시에 참여한 퍼포머들이 스치듯 만났다 헤어지며 시간의 교집합을 경험하는 관계에 대해 제기한 부분이 있지만, 이번 작업들의 경우는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난다고 보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요?
많은 작업들이 대상이 되는 인물과 나의 직접적 대면에 의한 교감이 절대적인 요소였다면 이 두 작업의 경우 나는 제3자로 거리를 갖습니다, 하지만 촬영하는 시간 동안 서로에 대한 감지는 여전히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이 두 가지 작업에서 동기의 근본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나는 관찰자가 사진 앞에서 나의 생각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스스로를 순수하게 내버려 두길 바랍니다.

퍼포먼스와 사진 작업을 병행하고 있는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두 가지 방식을 선택한 작가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퍼포먼스를 통해 작품의 소재를 찾거나 주제를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많이 알지도 못합니다. 사진 작업을 하는 프로세스에서 필연적으로 유출된 경우가 대부분이며, 사진이라는 물질적 결과물이 불필요할 경우 또는 그 프로세스를 실시간 관객과의 교감을 통해 필요로 할 경우 퍼포먼스 형식을 택하게 됩니다.

작업을 하는 동안 모델들과 어떤 이야기를 하시나요? 촬영 중에 모델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나누지 않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촬영이 진행되는 시간을 결정짓는 것은 무엇입니까? 30분 혹은 일주일? 흐르는 시간? 촬영 시간을 결정짓게 되는 지점이 궁금합니다.
대상이 되는 인물들(나는 모델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과 말을 주고받는 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교감의 끈을 지속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람에 따라 대화로 채우거나 침묵으로 채우기도 합니다. 침묵도 물론 대화이지요. 시간의 양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작업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주어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촬영 시간 동안 대상의 인물들이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주도해 갈 수 있는 의미 부여입니다.

흐릿해진 피사체의 흔적은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묻히고 지워지고 흐트러집니다. 개별자로서의 피사체에 집중함으로써 더욱 그와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의도(제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의도’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가 분명히 자리 잡고 있지만, 그 결과물로서의 사진은 오히려 너무 흐릿해서 개별자들의 면면을 파악하기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명하지 않은 이미지 속에서 작가가 발견하려는 ‘진실한 이미지’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음악 또는 어떤 소리를 들을 때 뒤섞인 굉음보다는 작은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듯이 명확하지 않은 형상 앞에서 무언가를 더욱 찾으려 하지 않나 싶습니다. 사진이 진실을 재현하고 대리하는 표현의 도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진실은 각자가 갖고 있는 인생의 경험에 의한 필터를 통해 이미지를 바라보고 그것에 반응하는 나를 바라보는 솔직한 모습에서 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사진은 기계의 ‘엄정한 눈’을 통해 가장 사실적이라고 보이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고 믿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천경우의 사진은 기계의 힘을 빌리되 그 결과물은 매우 추상적이고 회화적으로 보입니다. 천경우의 사진에 대해 “‘결정적 순간’으로서의 사진 미학에 반문을 제기한다”고 언급한 글(천경우의 작품관을 들어 보고,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토론회를 홍보하는 글)을 보았는데 사진에 대한 일반적인 신화들(사실적 이미지, 기계가 만들어 낸 이미지, 시간의 균열에서 뽑아낸 순간 등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사진적인 이미지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사진의 미학적 정의는 대부분 서구에서 정의 내려진 체계들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반문을 제기하는 태도를 사람들에게서 보기는 어렵습니다. 시간의 파편과도 같은 사진의 순간에 대한 일방적인 추종이나 어떤 이론가가 규정해 놓은 방식으로 이미지를 읽는 반복적인 일은 내게 관심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초상이나 자연을 그리는 일은 한국의 오랜 역사에서 하나의 의식과도 같은 진지하고 숭고하기까지 한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아주 소중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서구식 전통적 정의 또는 기술의 급진보를 통해 겪는 사진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은 내게 흥미롭지 않으며, 단지 내가 믿는 사진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내가 믿는 사진은 가장 사진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Light Calligraphy’(2004) 시리즈에서는 서예가들과 함께 작업을 진행하셨습니다. 어두운 인물 사진 위에 필체들은 시간의 공기뿐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흔적이 함께 담겨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시간의 흔적으로서의 사진과 인간의 필체가 겹쳐져 어떤 호흡을 느끼게 하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필체를 작업에 도입하게 된 의도는 무엇이며 그것을 시각화하는 데에 어떤 프로세스를 거쳤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우리는 기억이라는 능력을 갖기 때문에 음악에서 단음으로 연결된 음표를 멜로디로 감지하게 됩니다. 종이에 붓글씨를 쓰는 행위는 어떤 내용을 잘 쓴다는 의미보다는 마음의 상태를 가늠해 보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종이에 쓰는 일은 나의 오류를 바로잡을 기회(과거를 볼 수 있으므로)를 주는데 반해 작은 램프로 만든 펜으로 허공에 글을 써 내려가는 행위는 실패를 필연적으로 만듭니다. 한 장의 사진 안에, 하나의 시간의 덩어리에 있었던 한 사람의 마음 상태가 얼굴과 함께 알 수 없는 스스로의 필적으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쓸수록 내 얼굴은 가려집니다.

매우 동양적인 주제 의식이 모든 작품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줄곧 독일에서 활동하고 계신데 서양인들에게 ‘동양적인 것’이란 어떻게 이야기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관념들 속에서 차이와 오해를 발견한 적은 없으신지요?
독일이라는 나라는 나의 주 거주지이지만 한 나라를 나의 환경으로 제한하지는 않으며, 유럽이라는 큰 틀 또는 정신적 구심점이 되기도 하는 한국을 일상과 작업 환경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타 문화권에서 온 사람을 보면 무언가 다른 것(예를 들어 한국적인 무언가)을 보고자 하는 기대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동양의 문화에 대한 이해는 동양이 서양에 대해 갖고 있는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합니다. 따라서 환상과 오해가 반복됩니다. 하지만 나는 특정한 문화적 배경을 드러내거나 그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보다는 소재는 낯설다 할지라도 공통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주제에 관심을 더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국적을 굳이 묻지 않는 유럽에서 동아시아 작가이기 때문에 보이는 반응보다는 동•서양의 문화적 배경을 전제로 하지 않는 독창성을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 작업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앞으로의 일정과 계획이 궁금합니다.
6월에는 지난해부터 시작해 2008년 책과 함께 완성될 중국에서의 프로젝트 ‘千萬里’를 지속하게 되며, 암스테르담, 베를린 개인전(2007.8.16~9.22)과 프랑크푸르트, 바르셀로나, 리스본 등에서 전시와 퍼포먼스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 9~11월까지는 덴마크 문화부Danish Art Council의 초청으로 덴마크 여왕을 소재로 한 사진 프로젝트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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