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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핑크로 태어나 블루하게 살기

2011-10-18


구술 | 윤정미
정리/사진 | 포토라이터 이상엽


핑크 앤드 블루에 대해 : 당신의 대표작이자 여전히 진행 중이다.

분홍색을 특별히 좋아해서 분홍색 옷만 입고, 분홍색 물건만 사는 딸에게서 모티브를 얻었다. 이 작품으로 국내외에서 꽤 전시를 했고, 라이프지 폐간호 바로 전호에 표지로 실렸다. 미국에 있을 때 백인이든 흑인이든 상관없이 여자아이들이 분홍색을 선호하는 것을 봤다.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원래 여자아이에게 분홍색은 권장되던 색이 아니다. 전에는 블루가 여성스런 색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어린이들이 보는 텔레비전의 광고 영향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미국에서 본 ‘바비인형’ 광고가 여자애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요즘은 하늘색이 좋아졌다고 한다. 교복에 하늘색이 들어있다. 대체로 3, 4학년이 되면 핑크가 좀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진을 찍으면서 발견한 현상은 여자애들의 경우 핑크색을 좋아하지만 남자애들은 특정 색, 예를 들면 내 사진처럼 파랑색을 좋아한다기보다 자기도 모르게 그 색깔들의 물건을 많이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이들의 취향은 변한다.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색깔의 선호도가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변해가는 딸의 색깔 취향을 사진에 담고 있다.


사진 인생에 대해 : 여성이자 엄마 그리고 사진가로 살고 있다.

대학시절 미대에서 판화를 했다. 졸업 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동판과 석판 작업이 워낙 독성이 강한 작업이라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런데 졸업을 하고 나니 학교 다니던 시절보다 조금 더 절실해졌다.

사실 나는 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 대학시절에는 학원강사를 했고, 졸업 후에는 임시교사도 해봤고, 미술방문교사도 했다. 집에서 가사를 돌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내겐 사회생활이 맞다. 그래서 대학원에 갔다. 다시 ‘미대를 들어가 볼까’도 했지만 내가 다니던 학교는 추상계열의 선생님들이 대부분이라 맞지 않았다. 시댁이 있던 대방동에 살면서 아이를 키울 때 취미로 찍던 사진이 대학원의 진로를 결정했다. 마침 유학에서 돌아온 홍익대 김대수 선생님이 에칭과 판화 등에 사진을 활용하고 있어 옳다구나 싶었다. 그래서 학원에서 사진의 기초를 6개월 정도 공부했다. 힘들지만 재미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막상 대학원에 입학하고 한 학기를 지내보니 학교의 사고가 상당히 막혀있고 아이디어는 편협했다. 정말 그만둘까 했다. 하지만 한가지 일을 시작하면 그만두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2년을 꾸준히 다녔다. 그러다 보니 ‘한 장의 사진’이라는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졸업 작품으로 동물원에서 찍은 사진으로 99년 4월에 ‘갤러리 보다’에서 전시를 했다. 처음에는 사적인 은유로 출발하였지만, 동물원이라는 공간에서 사육되는 동물들이 사회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 그리고 보편적 사람들의 삶의 은유적 표현으로 확대됐다. 유사한 작업으로 매우 웃기는 풍경이 전시된 ‘자연사박물관’으로 2001년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이 사진들은 가짜임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배경그림과 생뚱맞게 한 공간 안에서 보여지는 동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 호랑이와 미국 늑대가 한 쇼윈도 안에 동거한다. 웃기지 않는가? 나는 이런 느낌을 보여주기 위해 박제된 동물의 표지판 등이 나오도록 찍고, 키치적 컬러를 드러내고 싶었다.

2004년 남편이 미국으로 발령이 나서 함께 갔다. 그곳에서 연수 정도를 생각하다가 ‘스쿨오브비주얼아트’에 입학했다. 사진과 비디오를 전공했다. 1년 만에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는 아이 둘과 남았다. 학교와 집이라는 두 생활을 책임져야 했다. 유학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참 힘든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특히 비디오 분야는 편집이 사람을 잡는다. 젊은 친구들이야 학교에서 밤을 새울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새롭긴 했지만 생활과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사진을 했다. 96년부터 시작한 사진이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다른 것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대신 사진적인 아이디어들이 계속 나왔다.

전부터 사용하던 핫셀블라드 대신 35mm 카메라를 사용했다. 아마도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나보다. ‘Red Face’ 같은 작업은 신문의 한 연극 기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한 여인이 자신의 이마에 ‘Sin’이라고 쓰고 연극을 하는 기사를 봤다. 세수를 하려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거울을 보니, 그곳에 비친 내가 보였다. 그래서 얼굴 위에, 여러 가지 내가 갖고 있는 역할, 예를 들면 Woman, Mother, Wife, Korean, Daughter 등과 같은 단어들을 빨간 립스틱으로 썼다. 얼굴이 글씨로 완전히 다 빨개지면 휴지로 닦아내고, 그 얼굴 위에 또 다시 쓰고, 닦아내고 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나의 하루하루의 삶과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생각해 봤다. 평소에는 섹시한 빨간 립스틱이 이 작업에서는 여성의 삶이나 희생 등으로 상징화 된 것이다.

그리고 9.11 이후 미국사회에서 유독 강해진 애국주의의 상징인 국기에 대한 작업인 ‘성조기’ 시리즈가 있다. 애국심을 넘어 미국제일주의를 연상케 했던 이 현상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봤다.

2006년 말에 귀국을 앞두고 박건희문화재단이 주는 상을 받았다. 미국에서 졸업작품으로 제작했던 ‘핑크 앤드 블루’ 시리즈로 상을 받았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이 상에만 3번 지원했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떨어지면 누구나 상처받는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 상이란 것이 누가 지원하고 누가 심사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실력만이 상을 받는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여간 기분 좋게 돌아왔다.

나이 먹어서 철들어 공부한다는 것이 좋기는 한데, 체력도 달리고 시간은 없고 영어도 어려웠다. 하지만 나의 미국 유학경험은 특히 ‘스쿨오브비주얼아트’는 많은 것을 줬다. 공부뿐 아니라 필드에서의 현장 경험, 사진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보 등을 줬다.


수집과 현대사진에 대해 : 미술을 전공한 사진가다.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 자체가 자기가 소유하고 싶은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사진은 그런 마음의 행위다. 수집한다는 것도 소유욕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그런 면에서 사진과 수집은 통하는 것 같다. 사진작업을 하다보면, 내가 하는 것도 하나의 수집행위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미지 수집. 내가 수집하는 이미지는 이미 시스템화, 제도화 되어 있는 것들, 고정관념화 되어 있는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보는 그런 작업이다.

현대사진에서 수집과 분류는 아무래도 유형학적 사진과 관련지어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사진은 유형학적 사진까지는 아니다. 그쯤 되려면 양도 많고, 뭔가 사진을 통해 통계나 수치 등 결과물이 과학적으로 나와야 할 것 같다. 그냥 아카이브적인 요소가 많은 인문학적 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은 미술의 일부이기도 하고, 또 독립된 장르이기도 하다. 현대사진을 수용하고 있는 우리 사진계의 생각은, 미술계도 좁지만 그 중에 더 좁은 느낌이다. 약간 콤플렉스도 있는 것 같아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너무 좋은 사진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많은데, 여러 가지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 사장되는 그런 사진작업들이 많은 것 같아 아쉽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일까? 사진가라는 이름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술가인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하지만 누군가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이요 묻는다면 사진가라고 답할 것 같다.

아쉬운 것은 갤러리, 미술관, 비평, 잡지, 시장 등 사진가의 모든 것들이 한국 안에서만 정신없이 돌아가다보면, 어떤 때는 잘 나갈 수도 있지만 그냥 거기서 끝인 것 같다. 작가 스스로가 아는 것도 많고, 발이 넓고, 게다가 운이 좋으면 외국으로 나가기도 하지만 쉽지 않다. 나 역시 ‘아줌마가 어딜 또 가느냐’며 제동을 걸기도 한다. 작업도 힘든데 내보이기는 더 어렵다. 그런 것들을 맡아줄 수 있는 에이전시, 딜러, 갤러리스트, 큐레이터, 비평가 등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생활에 대해 : 윤정미는 주부이자 전업 사진가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일을 감당하고 있나?

대학 때는 미술 아르바이트, 입시교육, 동네에서는 방문교육 등 돈을 버는 일이라면 늘 해왔다. 임신한 기간을 빼고는 그랬다. 하지만 작업으로 돈 벌 생각은 안했다. 어떤 친구는 서빙을 해가며 작업비용을 벌기도 했다.

나 역시 남편에게 작업비용을 달라고 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스스로 서야 하고 남한테 의지하기 싫어한다. 남편 덕에 작업한다는 편견이 싫다. 내 작품은 2005년에 처음 팔렸다. 사진을 한 지 10년만이다. 하지만 작품 팔리는 것만 바라보고는 살기 힘들다. 나보다 젊은 작가들이 ‘1년에 몇 십 점을 팔았네’ 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무심하기도 힘들지만 타협하기도 힘들다. 결국은 판매와 상관없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방법은 있을 것이다.

사실 결혼생활은 오래했지만 돈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다. 강사로 대학에 나가지만 강사료는 별로 돈이 안 되고, 요즘은 작품이 조금조금 팔리면서 돈이 됐다. 하지만 미래는 모른다. 다음번 시리즈는 판매가 안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작업을 하면서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끝나고 느끼는 만족감이 좋다. 나는 일을 해야 하는 여자다.




사진가 윤정미를 안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그저 전시회 오프닝에서 인사나 나눌 뿐 활동하는 공간이 달라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사진계에는 여성 사진가가 많지만 윤정미는 눈에 띄는 외모와 두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라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작업을 이어가고 있나’는 궁금증을 일으키는 사진가이기도 했다. 나는 기자초년병 시절부터 인터뷰를 할 때 공부하고 만나는 사람과 전혀 모른 채로 만나는 사람을 구별했다. 즉 편견이 생길 우려가 있는 사람이라면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모르는 것은 나중에 공부하는 식이었다. 사실 윤정미가 그랬다. 그 편견은 우리 사회 남자라면 거의 모두 있는, 결혼한 여성에 대한 것이다. ‘아줌마’ 말이다. 그런데 그녀와 만나는 시간은 재미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 예술가로 살아가는 용기 뿐 아니라 마흔에 들어선 여성으로서의 여유로움까지 있었다. 역시 사람은 만나서 직접 느껴 볼 일이다.



윤정미는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2년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와 1999년 홍익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2006년 뉴욕 School of Visual Arts에서 사진과 영상으로 대학원을 마쳤다. 1999년 <동물원> (갤러리 보다)을 시작으로 2001년 <자연사 박물관> (갤러리 보다), 2007년 <5회 다음작가전-핑크 앤드 블루 프로젝트>(금호미술관) 등에 이어 2008년과 2009년 사이에는 모두 여덟차례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오는 9월19일부터 11월13일까지는 새로운 핑크 앤드 블루 프로젝트로 베이징의 ‘파리-베이징 포토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국립미술창작 스튜디오(창동)와 International Studio&Curatorial Program(ISCP, 뉴욕), 쌈지 스튜디오 프로그램 등의 입주작가를 지냈으며, 2006년 박건희문화재단이 시상하는 다음작가상을 수상했다.


* 본 기사는 <월간사진> 2009년 8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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