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22
구술 | 강홍구
정리/사진 | 포토라이터 이상엽
사진가에 대해 : 언제부터 사진을 했나?
매년 10개 정도의 기획전에 참여하는 것 같다. 요즘은 매년 개인전도 한다. 이미 갖고 있는 작품을 출품할 경우도 있지만 오늘(노순택, 이성희 등 8명이 참가한 대안공간 루프의 ''죄악의 시대'' 전시)처럼 새로운 기획에 맞춰 전시를 할 때는 새롭게 작품을 제작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 갤러리 쪽에서 작품 제작비를 준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전에 광주비엔날레 전시회는 큐레이터를 잘 만나서 제작비를 지원 받았다. 작품을 팔아야 하는데, 작년에는 바닥이었다. 강의, 원고료 등의 잡수입으로 버틴다. 하지만 예상한 거다.
작가로 시작한 것은 92년이다. 그때는 페인팅 작업이었다. 하지만 늘 신선한 것을 하고 싶었다. 여러 모색을 하다가 컴퓨터를 샀다. 그리고 페인터나 포토샵을 만져보면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했다. 95년에는 본격적으로 맥을 샀고 스캐너도 마련했다. 그때 작업한 것이 ‘도망자 시리즈’이다. 그때만해도 사진으로 출력을 하려면 디지털 이미지를 슬라이드로 듀프를 떠서 확대인화를 해야 했다. 불과 10년 전 이야기다. 대형 흑백으로 작업을 할 때는 시안용 레이저 프린트를 애용해서 작은 사진을 여러 장 붙여 활용하기도 했다.
2003년에 드라마 세트장에서 찍은 사진으로 대안공간 풀에서 전시했고, 2004년에는 김포공항 근처의 오쇠리에서 찍은 사진으로 갤러리 숲에서 전시했다. 회화적인 분위기였지만 현실감을 강조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찍었다. 2006년에는 ‘미키네 집’ 연작으로 로댕갤러리에서 전시했다. 무척이나 보수적인 공간인데 안소연 실장의 도움으로 간섭받지 않고 작업할 수 있었다. 40점 정도 걸었는데 이 전시 전후로 나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내게는 큰 경험이었고 좋은 기억이다. 상업적인 반응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문매체와 대중매체 가리지 않고 조명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사진계 쪽에서도 내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동강사진상을 받기도 했다. 내가 사진가 맞나?
예술에 대해 : 뭘 할 수 있는 것인가?
이제는 모던하지도 전위적이지도 사회적 발언으로도 셀 수가 없다. 남은 것이 있다면 개인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통로 정도가 아닐까? 예술은 이제 그리 파워풀하지 않다. 그렇다면 인터넷은 어떤가? 일반인들이 그것을 통해 발언하는 시대이다. 예술은 그밖의 고급문화 영역의 한 섹터로 남는 것 아닐까 한다. 하지만 나와 같이 현업에 종사하는 일부 사람들이 전자 쪽에 의미를 두는 것 같다. 소통 말이다. 그렇다고 예술이 진부해진 것은 아니다. 그저 매체가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디지털카메라가 보편화 됐다. 그 현상의 이면에는 사진계가 미술계보다 더 위태로워진 것 같다. 예를 들면 디카의 반대편에서 사진은 연출화 되고, 대형화 되고, 고급화 됐다. 표면과 디테일에 대한 집착마저 보인다. 과거 회화가 갖고 있던 위상을 노리는 것 같다. 그것은 지나친 욕망이다. 과거 사진이 갖고 있던 기록성과 증거력이 사라진 것이 오히려 위기처럼 보인다. 민주화, 일반화, 제도화된 오늘, 더욱 그 위기는 깊어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 기계와 기술에 대한 물신화가 자리하고 있다. 대형 카메라와 제작 스태프들, 대형 프린트와 전시장이 득세한다. 도대체 다큐멘터리를 한다면서 8×10인치 대형카메라 왜 필요한가? 시선의 연장으로 발과 몸으로 찍던 장르 아닌가? 요즘은 ‘주목-명예-돈-판매-다시 주목’이라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있다.
사실 나는 사진보다는 시각 이미지라는 측면에서 시작했기에 사진에 관해 잘 몰랐다. 사진은 작은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시작했다. 내게는 낡은 카메라들이 몇 있었다. 6×9센티미터 판형의 카메라도 있었고 롤라이플렉스도 사용해 봤다. 이런 사진들을 통해 이미지를 만들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게는 사진에 대한 ‘판타지’가 없다는 것이다. 사진을 활용한 미술가인 것이지 아직도 내게 사진가란 칭호는 부담스럽다. 회화와 사진 사이에는 간극이 있는 듯하기도,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 그 중간 어디쯤 내가 있지 않을까?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이나 로버트 프랑크의 사진에서 ‘이것이 ‘사진’이다’는 생각이 확 든다. 50~60년대 흑백사진을 볼 때 ‘이건 찍혔다, 사진이다’란 생각이 든다. 요즘 사진은 사진이라기보다 회화인데 사진으로 찍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19세기 회화주의의 재림이랄까? 스튜디오에서 연출해 수많은 사진을 조합하는 그런 것 말이다. 사진은 사실 60년대 이후 새로운 매체로서의 동력을 잃었다. 특히나 개념미술이 등장하면서 그런 것 같다. 사진이 갖고 있던 본질적인 탐구는 줄어든 것 같다. 요즘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시대적 담론이 부재하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할까. 예를 들면 3D영화가 그런 것 같다. 디지털 기술, 자본의 힘이 승리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정밀하게 봐야 하나? 디테일이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작업의 확장성이 예술적으로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담보하진 않는다. 사실 그런 거대 매스미디어의 뒤통수를 치면 사람들이 반응한다. 직접적으로 예술이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책에 관심이 많다. 대중에게 미술의 이해를 돕는 책을 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동용 그림책이나 스토리가 담긴 이미지 책에 더 관심이 많다.
특별한 인연에 대해 : 섬마을 선생님이었다.
목포교대를 졸업했다. 한동안 발령이 나지 않아서 화실에서 2년 정도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섬마을에 가서 6년간 근무했다. 제대로 그림을 배울 기회는 없었지만 홀로 그림을 그리고 학교에 미술반이 있어 기초를 배울 수 있었다. 군복무 대신 섬으로 간 것이라 의무 근무기간인 8년을 채워야 했는데 중간에 5년으로 기간이 줄었다. 당시 근무환경은 엉망이었다. 전두환 시절에 우리 섬마을로 문교부장관이 올지도 모른다는 전언통신문이 날라 왔다. 당장 수업을 때려치우고 학교 미화한다고 난리가 났다. 사실 올 턱이 없었다. 한심하고 비참했다. 이런 교육계에서 평생을 할 수 있을까? 틀림없이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축을 할까, 영화를 할까 하다가 미술로 낙찰을 봤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10년 만에 후배의 화실에서 다시 대학입시 공부를 했다. 국영수는 빼고 암기과목을 집중적으로 했다. 시험을 볼 때 재미있었던 것은 이 문제를 왜 냈을까가 보이는 거다. 애들을 가르치다보니 그런 게 보였다.
84년에 홍대 서양화학과에 입학했다. 동기들과 10년 정도 차이가 났지만 재미있게 다녔다. 그리고 바로 대학원에 갔다. 92년에 그림을 그려서 첫 개인전을 했다. 그리고 95년인가에는 친구가 운영하던 부천의 노동자학교에서 미술선생을 했다. 사람들에게 쉽게 미술을 이해시키기 위해 강의를 기초로 해서 책을 쓰기도 했다. 아! 책을 쓰는 일은 어렵다. 쓰다말고 딴 짓을 하다 보니 동네 만화방의 무협지란 무협지는 몽땅 읽었다.
당시 미술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가 고민했다. 뭔가 힘이 있을 줄 알았는데, 90년대 사회주의는 망하고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다. 그래서 컴퓨터를 샀다. 99년에는 디지털카메라를 사서 그린벨트 시리즈와 새한도 시리즈를 제작했다. 이 해에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했다. 미술가의 상상력을 사진으로 구현하는 작업이었다. 관심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이때 그 유명한 신정아씨가 큐레이터로 있었다. 사진 쪽에서는 황규태 선생이 관심을 보였다.
2010년에 대해 : 올해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작년 2009년에
<사라지다, 은평 뉴타운의 기록>
전시를 열었다. 스트레이트한 사진이다. 2001년 은평구로 이사한 후 이 동네의 재개발을 보면서 찍어놓자고 생각한 것들이다. 전과 같은 사진이지만 맥락이 바뀌었다. 기교나 장치는 필요 없다. 스트레이트하게 가자. 대상 자체가 워낙 쎄기 때문에 그랬다. 그래서 전시하는 사진도 중요하지만 전시하는 행위도 중요한 것이기에 슬라이드 쇼를 만들어서 함께 보여줬다. 올해는 9월에 전시를 할 생각이다. 소재는 이미 찍어놓은 사진이다. 주로 집들인데, 이에 대한 오마주 작업이다. 산에 지어진 집들을 보면서 감탄한다. 건축주 없는 건축물, 설계가 없이 설계된 집. 그 사진을 흑백으로 크게 프린트해서 다시 수작업으로 채색을 하고 있다. 감상적이나 복고적인 것이 아니라, 그런 집들이 갖고 있는 가치에 대한 인식을 다시 일깨우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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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즘 사진계에는 미술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많다. 한국사진의 지형도 많이 변했다. 그런 미술인 중에서 내게 가장 눈에 띈 이가 강홍구 선생이다. 늘 민머리로 전시장에 나타나면 바로 인지된다. 그런 그를 사실 십수년 전, 내가 젊은 기자로 활동할 때 만났다는 것. 그리고 그의 저서에 정성스레 사인을 받았다는 것을 서재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이다.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세간의 평가에 상관없이 나는 강홍구 선생의 사진작업이 갖은 진정성을 믿는다. 보여지는 형식 깊은 곳에 침전되어 있는 기록성과 진실성이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그를 우리시대의 사진가로 분류하고 싶다. 물론 안 받아들여도 상관은 없다. 필자의 맘이다.
강홍구는 1956년 전라남도 신안 출생으로 76년 목포교대, 88년 홍익대 서양화학과, 90년 홍익대 서양화과 대학원을 각각 졸업했다. 1992년 갤러리 사각 개인전을 시작으로 1999년
<위치, 속물, 가짜>
(금호미술관), 2002년
<한강시민공원>
(요스카 뷰잉룸, 도쿄), 2003년
<드라마 세트>
(대안공간 풀), 2004년
<오쇠리 풍경>
(갤러리 숲), 2006년
<풍경과 놀다>
(로댕갤러리), 2006년
<어의도 가는 길>
(프로젝트 스페이스 칸다다, 도쿄), 2009년
<사라지다 : 은평 뉴타운에 관한 어떤 기록>
(몽인아트센터) 등의 개인전을 가졌다. 2008년 7회 동강사진상을 수상했고, 저서로 ‘그림 속으로 난 길’(아트북스, 2002), ‘디카를 들고 어슬렁’(마로니에 북스, 2006)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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