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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8순의 그칠 줄 모르는 박서보를 말한다

2012-01-27


오래전 어느 일간지에서 뉴욕의 병상에 있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었다. 거기서 한국에 있는 예술가로 누구를 인상 깊게 꼽느냐는 질문에 그는 주저하지 않고 제일 먼저 박서보를 꼽았다. 그의 답변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다. 왜 세계적인 작가 백남준은 그토록 많은 작가 중에 박서보를 지목했을까? "작품이 좋으니까"가 그 이유였다. 그리고 백남준은 젊은 여자들을 보고 싶다고도 했다.

박서보.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박서보를 말한다는 것은 곧 한국 현대 미술사를 말하는 것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한국현대미술을 말하는데 있어 그를 빼놓고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처럼, 박서보 사단이라고 할 만큼 그가 모노크롬 회화와 홍대 쪽 미술을 이끌어 온 것에 대하여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설령 그의 인간성은 말할지언정 그의 작품 앞에서는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못한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역사를 이끌어온 산 증인임에는 틀림없다.


박서보 그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1931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경찰로 근무하다 직장 상사와의 마찰로 경찰복을 벗고 법률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때부터 이미 다른 사람들과 타협을 모르는 자신의 성질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에 관한 태몽을 기억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가졌을 때 어두운 밤길에 신령님이 나타나 깊게 패인 발자국을 따라 밤이 놓여 있는 것을 보면서 어머니가 밤을 주워 담는 태몽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리고 일찍부터 가문에 큰 인물이 날것을 자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그렇게 인물이 될 거라고 하던 아들이 막상 미술대학을 간다고 했을 때 몸져누웠다. 그 길로 아버지는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했다. 부친의 마지막 소원인 법률가의 꿈이 그렇게 깨어진 것에 대하여 그는 한동안 괴로워했고, 그것을 아버님께 죄송하다고 했다.

고집대로 그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들어갔고, 졸업 후 파리에 유학하면서 프랑스 미술을 발견했다. 미쉘타피에가 선언했던 앵포르멜 회화였다. 명칭에서부터 그는 알게 모르게 프랑스 앵포르멜 회화의 영향을 받았다.

1958년 현대미협 제3회전에 <회화 no.1> 에서 <회화 no.7> 에 이르는 7점을 출품하면서 그는 작가들 중 가장 먼저 앵포르멜이라는 비정형의 회화 세계에 도달한 선구적인 작가가 되었다. 이것은 앵포르멜 회화의 출발과 동일하게 전후에 이루어진 미술운동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는 언제나 현대미술운동의 중요한 멤버로서 운동을 주도하면서 그 중심에서 현대미술을 이끌어 왔다. 한편 그는 한국미술사에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앵포르멜 미술을 시작으로 국제적으로는 파리비엔날레, 상파울로비엔날레, 베니스비엔날레 등 각종 국제전에 참가하였다. 그는 많은 일과 작업을 병행할 수 있었던 것도 천성적으로 타고난 부지런함과 치밀함, 분명한 의사표현, 그리고 명석한 행정력 덕분이다. 그의 성격을 아는 사람은 그가 얼마나 완벽주의자이며 철저한 사람인가를 안다.


모든 작품을 관리하는 방법이라든가, 자료를 정리하는 법, 심지어 포도주를 저장하는 것까지 그는 질서정연하다. 그는 아직 40대 청년처럼 왕성하다. 그러나 그는 벌써 무덤까지도 준비를 해 놓았다.

거기다가 아니라는 신념이 생기면 그는 바로 행동에 들어가는 다혈질적인 성격도 한몫을 한다. 이러한 단면을 보여주는 미술계의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시절이 하수상하던 1956년의 반국전 사건이고 반골 기질이다. 그의 반골성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교수들의 학원운영과 입시와 채점이 분리되지 않은 시절. 1966년 대학을 개혁하려 기득권을 쥐고 있는 국전세력의 선배교수들과 다투면서 홍익대에서 쫓겨나 3년 간 강단을 떠나면서 그는 드디어 작품 “묘법”의 모티브를 찾게 되었다.

1961년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에 참가한 이후는 추상 표현주의 미학을 바탕으로 한 “원형질” 시리즈를 보여주었고, 1960년대 중반부터는 현대인의 모습과 초상을 담아낸 “허상” 시리즈, 1970년대 이후부터는 탈 이미지와 탈 논리, 탈 표현 등을 주장하면서 묘법의 세계인 일명 '손의 여행'으로 그의 박서보 시대 회화의 정점을 이루어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순간 쉬지 않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담금질 해갔다. 그리고 오로지 평면과 싸우며 단 한번도 평면을 떠나 외도를 하지 않는 놀라운 일관성과 철학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행위에 그리고 사유방식에도 집요했고 철저했다. 그것은 곧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 가라는 자문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자신을 갈고 닦는 수신脩身에 다름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하루 14시간 씩 그 수신을 위한 수단이 그림이 되고 있다. 수십 번씩 화면에 마무리를 위해 색조를 다듬고 만들어내면서 그는 비로소 거기에서 섹스가 갖는 절대적인 오르가즘을 수없이 느낀다고 했다. 묘법시대의 초기에 그는 연필이나 철필로 선과 획을 긋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무위자연의 이념을 드러내었고,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후기 묘법에서는 종이 대신 한지를 이용해 대형화된 화면 속에 선긋기를 반복함으로써 바탕과 그리기가 하나로 통합된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그의 작품세계로 요약된다. 특히 이 묘법 시리즈의 회화는 “화가의 행위성이 끝나면서 작품도 종결된다는 서구의 방법론을 넘어 그 위에 시간이 개입됨으로써 변화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완성에 이른다는 동양 회화의 세계를 잘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고백한다. “진정한 예술가는 자기의 시대를 가장 창조적으로 대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모든 시대를 살려고 하면 모든 시대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지요. 반복의 행위는 기氣를 담아낼 수 있을 때만이 의미 있는 예술로 승화됩니다. 기機에 빠지면 이미 그 행위는 죽은 행위이며 자기 모방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지요. 더 이상 예술 행위가 아니라는 겁니다. 기機에 빠지지 않으려면 과거의 경험을 백지화하는 자기 노력이 필요합니다. 늘 처음 시작할 때의 긴장과 불안을 유지해야만 매너리즘의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그는 오래 전부터 외국의 여러 화랑과 프랑스의 유명미술관에서의 전시 제의를 거절했다. 작가로서의 예우와 조건 협상에서 그가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대가로서의 작가 대접을 하지 않으면 외국 전시를 하지 않는 호기를 부리고 있다.

그만큼 그의 예술성도 높다. 일본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나까하라 유스께는 “묘선(描線)은 틀림없이 손의 움직임에 의해 이룩되고 있다. 그러나 묘선은 유화물감을 눈뜨게 한다. 그리고 물감은 선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박서보의 화면은 이 갈등이 밸런스에 의해 태어나고 있다.”고 했다. 정말 박서보는 이 세계에서 흰 그림을 가장 아름답게 그리는 작가라는 평을 들을 만큼 색채의 마술사이다. 절제와 균제 그리고 침잠 하는 격조 있는 색채를 연출해내는. 이런 평가에 어울리게 그는 전 세계 유명한 화랑과 미술관에서 전시를 했다. 아직도 80대의 나이에 한결같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하루 14시간씩 작업실에서 칼라의 새로운 묘법 시리즈를 제작하고 있다. 짙은 빨강에서, 파랑, 연녹색까지 그는 마티스 이후 최고의 색채화가로 꼽히는 샤갈을 발가락에 때로 여길 만큼 자신만만하게 색채를 사용하고 있다. 그의 이런 자신 만만은 20대에서 시작하여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다.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있었던 그의70주년 화집 출판 기념회 답사를 기억한다. 그는 노장의 전사답게 매우 용기 있는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그는 지난날 “앞에 가는 똥차 비키시오” 라고 선배들을 향해 큰소리 쳤다고 서두를 시작하면서 이제는 그 말이 부메랑처럼 그에게 되돌아온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역사로부터 부채를 져서는 안 된다. 관 뚜껑에 못질할 때 모든 것이 끝난다.”면서 죽을 때 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아무리 비켜서라 소리쳐도 비켜설 의향이 없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자신 있거든 추월해 가라구 큰소리 쳤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그를 추월 해갈 작가가 쉽사리 있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사실대로 말하건대 나는 그가 상대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기자랑의 경험담을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80이 된 그는 이제 외롭다고 했다. 그가 박서보이다. 노장답지 않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그의 예술세계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며 말처럼 하루 10시간 이상 작품을 위해 열정을 불태울 때 그의 이러한 자랑은 차라리 귀엽게(?) 여겨진다. 1992년부터 그는 일일이 모든 작품제작은 물론 행방을 알 수 있도록 장부를 쓰고 있다. 크기는 물론 일렬번호를 적어 작품과 함께 그림모양 까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장부를 내보이며 그는 2700여점의 일렬번호를 보여준다. 그는 한해에 100여점 이상의 작품을 해왔다는 것이다. 몇 십년간 그가 받은 모든 국내외 친구들과 나눈 편지와 봉투를 보관한 파일이 20권이 넘는다고 하니 그것이 바로 현대미술의 역사가 아닐까?

그는 말한다. 바로 이것이 현대미술의 생생한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고. 박서보, 아직 그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그는 진행형이다. 그가 언제 그의 화필을 내려놓을 것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또한 박서보의 예술적 열정이자 집념이다.


화업 60년을 돌아보는 대규모 전시가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으며 부산에서도 회고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번 국제갤러리 전시는 전시 공간도 직접 고민하고 스케치하며 레이아웃 한 것이다. 실제 크키에 맞는 비율로 축소된 이미지로 공간을 구성했다. 부산 전시에는 앵포르멜 뿐 아니라 유전질 시리즈까지 나온다.

근작에서 같은 화면에 두 가지 이상의 색이 들어간 것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변화한 근작에 대한 소개를 듣고 싶습니다.

2008년 아라리오 뉴욕에서도 이러한 작업을 발표했었고, 최상의 경지에 올랐다는 등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 나이에 계속 변화한다는 것을 놀라워한다. 했던 컨셉을 계속 할 수 있는 나이에 뜨거운 창작열로 작품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을 보고 큐레이터들이 나를 다시 보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피악(FIAC)에 출품 했을 때도 집중적인 관심을 갖고 큐레이터들이 자료를 요청 했다고 한다. 오픈 첫날 바로 작품이 유명 컬렉터에게 소장되었고, 다른 작품은 피카소의 딸이 운영하는 화랑에서 맡겨달라고 했다. 이 갤러리에서의 전시는 2012년 내정되어있다. 해외컬렉터들과 기획자들에게서 오히려 반응이 크다. 단순화된 지적인 골격에 세워진 정제된 감성이 흡인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감각적인 색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어떻게 보면 촌스러울 수도 있는 색이 매혹적으로 다가오는데요, 색을 어떻게 찾으시는지 궁금합니다.

평소에 색을 그냥 스치지 않는다. 색과 색이 충돌하는 장면을 보면 오묘한테, 늘 이 장면을 스쳐가지 않고 입력을 한다. 명품, 간판의 칼라 등 일상의 모든 것이 나의 표현의 도구로 보여진다. 색은 젖었을 때는 구분이 어렵기 때문에 말려서 확인하고 연구를 많이 한 델리케이트한 색이다. 천박할 수도 있는 색이 매혹적으로 보이도록. 제작한 색을 종이에 발라놓고 리스트를 만든다.

지금도 하루 14시간정도 작업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꾸준히 다작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텐데요. 체력적으로 힘들지는 않으시는지요.

지금은 괜찮다. 뇌경색으로 쓰러졌을 때도 8시간씩 작업했고 지금도 하루 14시간정도 작업을 한다. 부인이 쉬라고 할 때 마다 죽은 후에는 평생 잘 수 있다고 말한다.

1950년대의 문화적 불모지에서 추상미술을 이끌어 오신 만큼 살아있는 현대미술사로 불리시기도 하는데요. 예전에 비해서 미술 시장의 상황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젊은 작가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이미지가 포화상태인 미술시장에서, 후배 작가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서두르지 말고, 곁눈질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자기가 자기 것을 해야 하는데 눈 동양만 해서는 안된다. 또 서로 베끼는 것은 근친상간이 나 마찬가지다. 전반적으로 발전을 못하게 된다. 통시성 속에서 남과 다르게 차별화 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늘 남과 달라야한다고 생각하며 작업했다. 중국미술이 대세를 이루기도 했지만, 만들어진 작가의 비슷한 작품이 많고 테크닉의 껍데기만 남은 경우도 많다. 오히려 중국, 영국 미술에서보다 한국에 좋은 작가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작업을 도를 닦는 행위와 같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로 살아오시며 꾸준히 잃지 않으신 신념이 궁금합니다. 작가님의 예술관을 들려주세요.

누구 같다는 평가가 절대 생겨서는 안된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다. 즉흥적인 감성이 아니라, 완벽하게 프로페셔널 하려고 했다. 실제로 나는 거의 빈틈이 없다. 색채, 작품 관리까지 철저하게 하기 때문에 위작이 나올 수가 없다. 작품도 92년부터 2284번까지 갔다. 작품 정보, 소장처 등을 기록하고 요즘엔 이미지 컨셉과 색까지 기록한다. 위작이 나올 수 없다. 100p분량의 자료가 69권이 되도록 자료정리를 했고, 50년간 화가들과 주고받은 편지도 다 모았다. 200페이지 분량이 28권이 된다. 김창렬, 이우환의 편지가 많다. 작업에 있어서는 더 심화하고 싶다.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더 편안하게 비워갔으면 좋겠다. 내가 하나의 초라면, 심지가 다 타들어가는 순간까지 에너지를 창작에 쏟아내고 싶다. 누구도 못 따라올 만큼 열심히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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