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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 리뷰

갓 서른이 된 남자와 곧 서른이 될 남자가 만든 팬츠

2011-06-16


오늘은 무신사에서 진행된 프로젝트(협업이라 일컫는)에 대해 이야기를 할 참이다. 문지(무신사 에디터)는 진행 방식만 간단히 설명한 채 모든 대화 내용을 녹취해 와 달라는 말만 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밖에 나간 것이 분명하다.) 그간 알게 모르게 더스토리와 무신사 익스클루시브 팬츠 라인이 진행되었다. 이같은 만남은 반 강제적으로 팬츠라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 위함이다. 사장님께서 최종적으로 정하신 팬츠라인의 이름은 ‘페이퍼리즘’이란다. 누가 봐도 ‘종이로 이루어진 것을 지켜내자!’라는 환경 보호 식의 문구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퍼리즘’이라는 브랜드 명에 감히 반기를 들지 않았던 것은 뜻이 고개를 끄덕이게 해서일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글 | 무신사 이문지 기자
진행 | 김태희
사진 | 이재혁
도움 | 더스토리, 무신사


Prologue
무신사 매니저 ‘김태희’의 팬츠

평소 친분이 있던 강인찬 디렉터를 만나기 앞서 지난 날을 돌아봤다. 많은 사건과 사고가 봇물처럼 지나간다. 무신사는 그래, 무신사에서는 도메스틱브랜드와 함께 여러 가지 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해부터 무신사 스토어 익스클루시브로 진행된 이 상품들은 브랜드 Buried Alive, Diafvine, LEATA, VAGX 와 함께 진행되었다. 백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이 상의 위주였으며, 팬츠는 LEATA와 함께 협업한 제품인 쇼트 팬츠와 데님 팬츠가 전부였다. 우리는 왜 그 동안 팬츠를 기획하지 않았던가? 팬츠는 언제나 예민한 부분이다. 그 것을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스스로 옷을 사기 시작하며 입어 본 팬츠만 해도 100여벌은 훨씬 넘는다. 현재 팬츠는 다리와 팬츠의 사이 즉 떨어지는 공간이 0.5CM-1.5CM를 넘지 않는 것들로 구매하고 있으며, 허리는 배꼽을 중심으로 7CM이상은 내려 입고 있다. 그러니 내가 입는 팬츠의 특징이란 허리는 살짝 크되 허벅지와 종아리부위는 넓지 않게 재단 된 것들이다.

물론 이러한 팬츠가 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팬츠를 찾기 위해 옷을 스스로 사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으며, 브랜드에 상관없이 팬츠에 투자된 돈만 족히 500만원은 넘는 것으로 산출된다. 나는 나와 같은 사람(시간과 돈에 대한 소비)이 또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페이퍼리즘의 기획에 가담하고 또 실행했다.

나와 맞는 팬츠를 빨리 찾는다면 옷에 대해 고민할 시간은 현저히 줄어든다. 고민할 시간이 줄어드니 다른 걸 할 수 있는 시간은 벌어드린 셈이다. 우리는 그 시간에 영화를 볼 수도 있고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책을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팬츠를 입을까?’라는 고민의 시간을 덜어주고자, 팬츠를 잘 만들기로 소문난 강인찬 디렉터와 팬츠를 만들었다. 총 3가지 스타일로 진행된 팬츠는 컬러와 소재로 구분할 시 7가지의 종류로 나뉜다. 거기다 한치의 망설임 없이 팬츠하면 떠오르는 브랜드 더 스토리(Thestori)와 함께라니! 박자는 잘 맞아 떨어진다.

기획과 생산을 진행하며, 키와 몸무게 그리고 착용하는 사이즈는 같을지라도 전혀 다른 핏이 나오는 우리 두 사람을 보며 다시금 팬츠가 가진 위대함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방식을 달리하니 같은 브랜드라도 전혀 다른 멋이 나온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기도 했다.
팬츠, 어쩌면 이는 ‘빈 종이’나 ‘빈 컵’, ‘빈 공간’과 같다. 누가 채우느냐에 따라 그 것은 완전히 달라지니까. 그것이 페이퍼리즘이 원하고 추구하는 바이다. 누가 채우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분위기와 실루엣. 이 기본적인 팬츠가 보다 다른 방식으로 입혀지길 바란다. 팬츠에서 다양한 방식이란 결국 다양한 사람이 입어주면 된다는 말이다.

하루 종일 오후에 있을 더스토리와의 페이퍼리즘에 대한 미팅 때문에 팬츠 생각만 했다. 몇 문장 안 되는 서문을 몇 시간 들여 생각하고 또 그에 합당한 정의를 구현하고 것도 모자라 과거에 대한 돌이킴도 있었다. 돈에 대한 산출 부분에서 느낀 것은 아무래도 내 나이. 그래서 더스토리 디렉터 ‘강인찬’과의 미팅 겸 페이퍼리즘 담론의 부제는 ‘남자나이, 곧 서른과 갓 서른의 팬츠.’


THE STORI X MUSISNA.COM ‘Paperim’
그토록 기다려왔던 순간
1

태희 : (손을 흔들며) 형, 여기야! 여기!

인찬 : 빨리 왔네. 봤어? 잘 나왔어?

태희 : 어. 생각보다 되게 잘나왔어. 생각만큼 잘나오면 되겠지 했는데, 그 이상이야. 이래서 기획 생산자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나 봐. 혼자 하는 것 보다 팀웍으로 하니까 더 좋고.

인찬 : 팀웍이라 생각해? 힘들어 죽는 줄 알았는데?

태희 : 아! 왜 거짓말 쳐. 엄청 신나게 일 하더니만.

인찬 : 일은 늘 신나게 하는 편이지. 스트레스 받을 일 없었어. 생산은 아예 믿고 맡겼잖아.

태희 : 믿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게 심상에 편하잖아.

인찬 : 맞아.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해주는 게 좋아. 그러면 내가 아는 걸 동원해서 잘하려고 하거든. 그런데 믿고 맡기지 않고 이리저리 안다고 참견하면 그 때부터 협업은 다시 고려해 봐야지. 왜냐하면 믿음이 깨지는 것이니까. 그 점에서 무신사에서 행한 행동은 아주 좋았어. 믿어주었다는 느낌이 확연히 들었으니까 말이야.

태희 : 형은 이번 협업이 우리(무신사)랑 처음이지?

인찬 : 아무래도 그렇지. 협업은 잘 안 해. 누군가를 잘 믿지 않는 편이라고 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협업이란 것이 이미지와 이미지의 만남이니까 고심해서 하게 되지. 그리고 아무래도 오프라인 샵이 있는 곳이 브랜드 이미지에 더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들을 많이 하잖아. 더욱이 옷이 걸려있는 것을 상상하는 것도 있고.

태희 : 그런데 무신사 스토어는 웹에서만 판매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같이 하게 된 거야? 심경의 변화가 있었어?

인찬 : 그런 것 보다 무신사는 워낙 이미지가 강하잖아. 스트릿이라고 묶는 이미지 보다 깔끔한 구성 같은 것이 마음에 들었어. 기획도 순차적으로 하는 편으로 알고 있고 무엇보다 그에 맞는 기사 진행도 이루어지니까. 무엇보다 무신사 스토어는 뺄 건 과감히 빼고 넣을 건 무조건 넣잖아. 그게 가장 큰 매력이잖아.

태희 : 그래? 생각보다 평이 좋은데?

인찬 : 그럼 여기서 어떻게 김태희랑 일하는데 짜증이 납니다. 라고 말하냐? (웃음) 그러는 너는? 솔직히 협업 같은 거 힘들지 않아?

태희 : 아무래도 진행하는 입장에서는 뭐든 정확해야 하니까 말이야. 스케쥴 잡을 때 종종 연예인매니저들의 노고도 느낄 수 밖에 없지. 그리고 브랜드 디렉터마다 신념이 각자 다르니까 말이야. 사람을 파악하고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요구해야 하니까 어려울 때도 있어. 사람이랑 그들이 만드는 브랜드 연구를 동시에 해야 해.

인찬 : 나도 공장과 일을 하니까 그런 수고는 어느 정도 감이 와. 예정이 변경될 수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협업이라는 거 상상할 때는 획기적인데 막상 진행하면 사람 에너지 소모를 너무 많이 시켜. 그런데 막상 결과물 나오면 뿌듯해.

2


태희 : 그런데 페이퍼리즘이라는 익스클루시브 이름은 어떻게 생각해?

인찬 : 처음에는 너무 문학적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나 역시 팬츠를 입음으로써 그것이 빈 종이 같다라는 느낌을 받긴 했었어. 왜 사람마다 빈 종이에 그리는 그림이 다르잖아. 팬츠도 마찬가지라 생각해. 입는 사람에 따라 그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이 주름으로 표현되거나 워싱으로 표현되거나 하니까. 같은 팬츠라도 입다 보면 완벽히 같지는 않잖아. 그래서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할 수 있어.

태희 : 하지만 나는 왜인지 ‘리즘’이라 하니까 ‘주의’ 같아서 철학적인 느낌이 강해.

인찬 : 그런 게 중요하지. 사상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 같잖아. 무언가를 만드는 건 힘들지만 이리저리 따라다니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태희 : 어려운 길을 택한 거지. 이번 바지 핏은 생산자의 입장으로써 어때?

인찬 : 보는 거랑 입는 거랑 달라. 보는 건 물론 태희가 제품 사진을 워낙 신경 써서 찍으니까 잘나온 거 같은데, 입어보면 더 잘나왔다는 말이지. 그게 팬츠의 매력인 거 같기도 하고. 이래서 사람들이 옷은 입어봐야 한다고들 하나 봐. 넌 어떤데? 솔직히 말해도 돼.

태희 : (웃음) 무서워. 사실 난 바지 굉장히 마음에 들어. 요즘에 면 팬츠를 많이 입고 있어서 그걸로 골랐는데, 원단이 얇지 않아서 보호 받는 느낌이야. 그렇다고 너무 두껍지도 않고. 이걸 입고 이래서 여자들이 4계절 스타킹에 환호하는 구나 생각했지. 뭔가 실용적인 소비를 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제품이 나쁘지 않다는 것.

인찬 : 스타킹? 너무 비유가 강하다. 요즘 사람들 스타킹이라는 말만 꺼내도 사회에서 매장한다고(웃음). 딱히 옷 중에 4계절이 그 것밖에 없어서. 그만큼 실용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네 마음 알아. 너는 나랑 일하며 짜증나는 거 없었냐? 그간 다른 스토어 매니저와 브랜드 디렉터로써의 만남이나 친한 형과 동생 사이로 지냈다가 이런 일 하려니 어려운 건 없었어?

태희 : 사실 떨렸어. 형이랑 뭘 한다고 생각하니까 설렘? 무언가 함께한 건 형이 더스토리 오픈 할 때 빼고는 없는 거 같더라고. 그간 일 적인 부분에서는 서로의 영역만 지켜온 게 다잖아. 그런데 이번 협업은 성격이 다르잖아. 같이 진행하고 기획을 하고 회의를 하고. 형을 다르게 보게 된 것도 많아. 그냥 표면 상으로 옷을 만들고, 특히 데님이 강하다고 여겼는데 말이야. 이번에 직접 알게 되었어. 형이 정말 데님도 잘하고 생산도 독자적으로 잘하는구나. 형에게서 갑자기 후광이 드리웠지.

인찬 : 그간은 뭐, 그냥 동네 아는 형이나 동네 노는 형이었다는 말이야?

태희 : 뭐, 그럴지도. (웃음)

인찬 : 그래. 그럼 지금까지 페이퍼리즘 기획하느라 수고 했고 앞으로 잘 지내.

태희 : (웃음) 장난이야. 왜 그래?

인찬 : 나도 장난이지. (웃음) 나도 네 말에 동감해. 무신사가 기획하고 진행하는 게 빠르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렇다고 느꼈어. 그리고 조만호 대표에게도 한 번 더 놀랐지. 지금으로부터 약 10여 년 전 내가 근무하던 나이키 매장의 단골 고등학생 손님이었는데. 그 고등학생이 성장해서 지금은 무신사의 대표로 있고 더욱이 나와 함께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태희 : 일을 할거라는 상상을 못했지?

인찬 : 사람의 앞날은 누구라도 장담하지 못해. 그냥 지금 같이 일을 하게 되면서 매우 흐뭇했지. 지난 날을 회상할 수 있는 사람 2명과 함께 하는 것이니까 말이야.

태희 : 아무래도 형 입장에서는 그렇겠다?

인찬 : 응! 아무래도 당연해! 그래서 뭔가 느껴보지 못한 대학시절로 돌아간 느낌도 있었어.

태희 : 우리도 마찬가지야. 신나게 했던 거 같아.

인찬 : 나는 이번에 진행하면서 내가 만드는 더스토리가 다른 것과 충분히 어우러질 수 있다는 것에 지난 시절 힘들었던 날들에 대해 어느 정도 보상 받은 느낌도 강했어.

태희 : 형은 충분히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인찬 : 충분히 견뎌낸 것이지. 사실 매번 잘 될 수는 없잖아. 아무리 잘해도 생각보다 반응이 시원찮을 때도 있고. 베스트가 있으면 워스트가 있는 게 당연한데, 만드는 입장으로써 어떤 제품이든 열의를 다해 생산해 내니까 안된 자식들 보면 가슴이 아프지.

태희 : 잘된 자식들 보면 기분이 어떻고?

인찬 : 원래 말썽꾸러기들이 의외의 성공을 거둔다고 잘된 상품들도 그에 해당했지. 예상외로 반응 좋은 걸 보면 소비자의 심리를 알다가도 모르겠어.


3
태희 : 소비자에게는 이제 영향력 있는 인물이란 없어진 지 오래같아. 요즘 소비자들은 충분히 똑똑하니까. 무신사 회원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가끔 회원들이 리플을 달거나 커뮤니티 활동하는 것을 보면 깜짝 놀라. 정보력 못지 않게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을 발견하니까.

인찬 : 나도 그래. 무신사를 이리저리 눈으로 살피다 보면 정말 같이 늙어가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혀. 늙어가는 세월만큼 나도 변하지만 이 사람들도 굉장히 변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들어. 그게 은근히 기분 좋아.

인찬 : 맞아. 함께 늙어간다는 것은 좋은 거 같아. 이번 팬츠를 만들 때 무신사 회원들이 도움이 되었니?

태희 : 응, 아무래도 많은 도움이 되지. 이제는 브랜드의 변화보다는 입는 방식의 변화가 크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래서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기본적인 옷이야 말로 체형과 사이즈 만으로 충분히 변화 가능한 아이템이니까 말이야.

인찬 : 그래서 바지를 가장 기본적으로 만들자고 한 것이구나?

태희 : 그건 형과 함께 고민한 부분이잖아. 그거 읽었어?

인찬 : 어떤 것?

태희 : 더스토리랑 함께 작업했다고 하니까 더스토리 팬츠는 자기 스타일이라고 했던 것 말이야.

인찬 : 아! 읽었어. 뭔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실 그런 소리를 듣는 경로는 한정적이잖아.

태희 : 그렇지. 그런데 나도 기분 좋았어. 형이랑 하고 싶어 했을 뿐 아니라 하자고 한 것 말이야. 굉장히 잘한 것이라 생각 들었어. 형만큼 하는 사람이 드물잖아?

인찬 : 갑자기 낯 간지럽게 웬 칭찬이야?

태희 : 아니, 정말 그래. 그러고 보면 형 입장에서는 그렇겠지만 내 입장에서 더스토리 하면 팬츠를 바로 떠올릴 수 있는 것도 대단한 거 같아.

인찬 : 더스토리 하면 팬츠를 떠올릴 수 있다니, 놀랍다. 팬츠를 중심으로 모든 스타일이 완성된다고 생각해.

태희 : 사실 나도 그래. 아무리 좋은 티를 입어도 팬츠의 핏이 나쁘면 그것만큼 난해한 것이 없더라고.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 보게 되는 걸 어쩌지?

인찬 : 그건 우리가 눈이 있어서 그래.

태희 : 뭔가 굉장히 철학적이네. 눈이 있어서 그래. (웃음) 그러니까 이러저리 패션에서도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는 거겠지. 나는 이게 마음에 들어.

인찬 : 어떤 것이?

4


태희 : 페이퍼리즘이 문화를 후원하거나 응원한다는 컨셉말이야. 기본적인 것은 개인의 문화로 빛나잖아.

인찬 : 그건 동의해. 사람의 분위기는 그것을 둘러싼 문화가 만들어 주지. 문화 앞에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모든’을 부쳐도 괜찮지.

태희 : ‘개인이 가진 모든 문화를 후원합니다.’ 혹은 ‘개인을 둘러싼 모든 문화를 후원합니다.’라고 해도 되겠다. 형 말에 동의해. 그런 사람들이 있어. 어떻게 살아왔을까? 어떤 취향을 가졌을까? 하는 분위기의 사람들 말이야. 그들은 기본적인 것을 입어도 결코 기본이 아니게 만들어주지. 참 신기해.

인찬 : 응, 그런데 넌 그런 사람 본 적 있어?

태희 : 보지 않으려고 한 적은 있어. 나 역시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니까 말이야. 오히려 보다가 영향이라도 받으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이 몰락되잖아. 되도록 보지 않으려고 해.

인찬 : 그래서 음악 해?

태희 : 그건 아니고.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런데 나 음악 하는 거 티 안 나지?

인찬 : 응, 말해주기 전까지 몰라.

태희 : 그게 내가 아쉬워하는 부분이지. 하지만 그 아쉬움을 채우고 싶어서 열심히 하지.

인찬 : 맞아? 의외네. 뭔가 말이 길어질수록 진지해진다. 처음에 네가 가볍다고 해서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태희 : 그러게 말이야. 이렇게 이야기 나눠본 것도 꽤 오래된 거 같기도 해.

인찬 : 우리 서로 바쁘게 살았잖아. 남자의 이 십대와 삼 십대는 바쁠 수 밖에 없나 봐.

태희 : 응, 이미 친구들한테 그렇게 인식되어 버렸어. 노후가 어떨까? 계속 이 바지 입을 수 있을까?

인찬 : 지금 내가 만들어 놓은 거 의심하냐? 설마 그때 되면 집안에 굴러 다니는 걸레 될까 봐? 걱정하지 마라. 원단 찾느라 시장 돌아다닌 시간이랑 네가 일주일간 무신사에서 근무한 시간이랑 맞먹으니까!

태희 : 그럼 뭐야? 24 곱하기 6을 해야 하는 거야? 이 원단을 찾는데 허비한 시간?

인찬 : 재미없는 건 여전하네. 그건 그렇고 페이퍼리즘 언제까지 하냐?

태희 : 형이야말로 뜬금없이 묻는 건 여전하네. 그리고 형도 알다시피 모든 것은 장기근속이야. 앞으로 할 건 아주 많아. 팬츠도 티의 그래픽과 같은 거 같다라고 생각했어. 종류도 많고 할 수 있는 것들도 무궁무진해.

5


인찬 : 앞으로 어떤 걸 하고 싶은 거지?

태희 : 앞으로 반바지와 테이퍼드 핏등 다양한 상품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그러는 형은 따로 생각한 게 있어?

인찬 : 나도 마찬가지야. 갑자기 생각 난 건데 팬츠는 사기 참 어려운 제품인 거 같아. 입어보지 않고 아무도 그 것을 모르니까 말이야.

태희 : 그걸 고려해서 페이퍼리즘을 만든 것 아니야?

인찬 : 핏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다양한 핏을 보여주고 싶었어. 믿고 사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 그런데 가격 면에서는 합리적이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 생산자의 입장에서 ‘이 정도라면 합리적이야.’라는 식의 멘트보다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합리적이다라는 말 말이지.

태희 : 내 말이 그 말이야. 바지가 너무 비싸서 나도 슬림 스트레이트의 정확한 핏을 찾느라 몇 십시간은 물론 몇 백 만원 쓴 거 같아.

인찬 : 그렇지? 그 돈으로 너는 신발을 사야 하는데 말이지.

해설_ 인터뷰를 진행한 김태희 매니저는 신발에 대한 애착이 남들과 달리 심한 편이다. 그것을 평소 친분이 있는 강인찬 디렉터는 알고 있었다.

태희 : 그렇지. 스니커즈에 쏟아야 하는데 말이지. 형은 죽기 전에 어떤 팬츠를 한 번 입어보고 싶어?

인찬 : 여기서 다른 브랜드 논하는 건 웃기지만 지금까지 일을 하느라 활동성만을 팬츠에 주입했어. 핏은 2차적인 문제였고.

태희 : 그런데 형은 형에게 어울리는 팬츠를 잘 입고 다니잖아. 형이 생산한 바지는 모두가 믿고 있고.

인찬 : 내가 생산한 바지를 그들이 믿어주는 까닭은 내가 대한민국 평균신장과 몸무게를 지녀서 일 것이야. (웃음) 아무튼 나는 죽기 전에 두꺼운 원단의 팬츠를 입어보고 싶어. 몇 십 년이 지난 끝에 내 활동성과 맞아 떨어지는 팬츠 말이야.

태희 : 아까 브랜드 언급했잖아. 예를 들어 어떤 브랜드? 앞에서도 타 브랜드라는 언급을 했잖아.

인찬 : A.P.C.나 Naked & Famous 가 생산하는 팬츠들 말이지.

태희 : 아! 그러한 것들은 정말이지 불편하지. 심지어 허벅지 살점이 넘어지지 않았는데도 상처가 난 적이 많지.

인찬 :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그 것에 열광한다고 생각하냐?

태희 : 글쎄, 아무래도 나의 시간과 함께 달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

인찬 : 계속 진지하고 점점 느끼해지는 대화군. 글쎄 나는 나도 늙는데, 바지도 함께 늙어가는 기분이 들어. 그리고 나로 인해 그것들이 낡아가는 모습을 보는 데 오는 희열?

태희 : 그런데 그들의 핏도 무시 못하지. 그런데 심지어 그 핏들이 처음과 달리 나로 인해 점점 나에 맞춰지는 느낌이야. 예를 들어 분명 맞춤복은 아닌데 맞춰지고 있어.

인찬 : 그건 네가 다이어트를 하기 때문일 거야. 태희야.

태희 : 들켰나?

인찬 : 응, 너 요즘에 너무 심하게 마른 거 같아.

태희 : 몰라, 무엇보다 살이 쪘을 때는 바지가 맞지 않는 다는 것에서 짜증이 밀려왔어.

인찬 : 사두었던 바지가 맞지 않는 순간 비로소 퇴화를 느낄 때가 더러 있지. 바지란 참으로 정직해. 그러고 보면.

태희 : 응, 쇼트팬츠를 제외하고는 전부 종아리와 허벅지와 허리를 담아주니까 내 몸의 변화를 가장 잘 느끼게 되는 거 같아. 살이 쪘다는 사실을 말이야.

인찬 : 맞아! 페이퍼리즘도 그에 한 몫 해 줄 거야.

태희 : 아무래도 원단이 한 몫 하지. 그런데 원단마다 약간씩 착용감이 달라.

인찬 : 슬림스트레이트 중 그레이 컬러는 편안한 반면 인디고는 아페쎄 생지 데님 버금가게 꽉 조여오지. 그럼에도 허리를 크게 만들었지. ‘내려 입으세요. 당신의 숨겨둔 남성미가 강조 됩니다.’ 뭐 이런 뉘앙스.

태희 : (화들짝 놀라며) 맞아? 그거였어?

인찬 : 아니, 골반에 걸치면 허리가 자유로워서 움직이기 편하잖아. 티 하나만 입어도 좋아 보이고 말이야. 남자는 바지를 어디에 걸쳤느냐에 따라 그 멋이 많이 달라지니까.

태희 : 그래서 내가 내려 입잖아. 형이 장난스럽게 말한 대로 섹시해 보이고 싶어서.

인찬 : 야! 장난하지마. 곧 죽어도 네게 섹시가 있다라고 인정하기는 싫다. 무신사 회원들은 어떨까? 사실 매번 새로운 걸 내놓을 때마다 그 부분이 걱정스러워.

태희 : 글쎄 모르긴 몰라도 내 입장에서는 반응이 좋길 바라.

인찬 : 단지 바라는 것뿐이야?

태희 : 응, 바라면 다 이루어 진다고 형이 더스토리 오픈 하면서 말했잖아.

인찬 : 그걸 기억하냐? (웃음)


Epilog
갓 서른이 된 남자와 곧 서른이 되는 남자들의 만남을 마치며


이렇게 5시간 가량 이어진 대화는 끝났다. 인찬과 태희는 기본이 유니크해질 수 있다는 것과 자신들이 만든 가장 기본 적인 팬츠를 다르게 입어주길 원한다는 말 대신 ‘페이퍼리즘’이라는 브랜드 명을 앞세웠다. 사람들에게 페이퍼리즘을 소개하면 대부분이 새로 나온 매거진 혹 새로 론칭 된 문구브랜드라고 지레 짐작하기 일수였다. 이것만 보더라도 페이퍼리즘은 이름만으로 생산되는 상품이 무엇인지 연상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신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확실히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누가 감히 의류 브랜드에서 종이로 이루어진 물건을 떠올릴까?

우리는 새로운 잡지를 넘길 때 그 안에 무엇이 채워져 있을 지에 대한 기대감과 갓 출시된 문구 디자인의 제품을 대할 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채울지에 대한 상상을 한다. ‘비웠다.’라는 것은 ‘채움’에 대한 다른 말이다. 지류로 이루어진 매거진과 더불어 문구 제품들은 ‘채움’과 ‘비어짐’을 동시에 선사한다. 페이퍼리즘은 가장 기본 적인 형태로 누군가의 채움을 필요로 한다. 같은 스타일을 입더라도 분명 다른 방식으로 채워질 것이다. 우리네 생활 방식이 제 각각이니까 말이다. 시간을 덧입는 팬츠는 한 권의 매거진만큼 개인의 생활 워싱으로 꽉 채워져 있을 거라는 것을 기억하며.


* 페이퍼리즘 참고 기사
Musinsa’s Denim Brand ‘Paperism' by Thest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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