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트무트 에슬링거 | 2011-08-10
디자인의 사전적인 의미를 살펴보자. ‘주어진 목적을 조형적으로 실체화하는 것’이라는 풀이가 눈에 띈다. 그게 제품이든, 의상이든, 혹은 건축물이든 무언가를 미적으로 형상화하는 노작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단어인 것. 하지만 지금 디자인의 범주는 이런 정의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영어 단어 ‘Design’ 속에 담겨있는 ‘설계’라는 의미를 극대화한 디자인 주도적인 다양한 설계들이 경영과 마케팅, 그리고 문화 전반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 그 반증이다. 이러한 변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향후 변화의 양상은 어떠할 것인가? 이 책, ‘프로그’는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담고 있다.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자료제공 | 부즈펌
‘비즈니스 하는 디자이너’의 개념이 우리나라에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이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기획자의 역할과 디자이너의 역할을 확실히 구분했던 것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디자인 업계의 전통. 하지만 ‘프로그’의 저자 하르트무트 에슬링거는 이런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행보를 계속해왔었다. 그는 스물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프로그’라는 디자인 회사를 설립한다. 나이나 경력에 따라 평가 받는 세태에 과감히 도전장을 낸 것. 독일의 소형 전자제품 기업인 베가(Wega)와 파트너십을 체결하며 그와 프로그의 놀라운 창조의 역사는 시작된다.
“나는 인간이 산소를 필요로 하는 것 같이, 비즈니스도 창의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고, 나의 고객들에게 그들이 성공하려면 ‘호흡’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시킬 수 있었다.”
얼마 전, 융합 디자인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모든 세션이 다 인상적이었지만 그 중 눈에 띄는 내용은 새 시대가 요구하는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한 정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단순히 제품을 디자인하는 기능인을 넘어서 엔지니어와 경영인, 그리고 마케터와 디렉터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디자이너에 대한 요구. 세션의 강연자는 미래의 디자이너에겐 이러한 융합의 능력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하르트무트 에슬링거는 이런 융합 디자인의 중요성을 너무나 일찌감치 깨닫는다.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애플의 ‘스노 화이트’ 디자인 언어나 루이뷔통의 새로운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그의 이러한 선견지명을 대표하는 브랜드들. 에슬링거는 기업의 정책에 따라 디자인만을 담당하는 디자이너가 아닌, 기업의 모든 것을 설계하는 작업을 통해 ‘디자인 중심 혁신’ 전략의 중요성을 설파해왔다. 앞에서 예를 든 애플이나 루이뷔통을 비롯하여 마이크로소프트, 아디다스, 소니, 야마하, 디즈니, 휴렛팩커드가 바로 그의 선진적인 디자인 정책을 통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던 대표적인 기업들이다.
하르트무트 에슬링거는 책을 여는 부분에서 스스로의 첫 번째 목표를 ‘배고픈 아티스트가 되기보다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것’이었다 회고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철학은 물질이 윤리가 된 오늘날의 성공주의자들과는 전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그는 결국엔 모든 것을 파괴로 몰고 가는 잦은 디자인 정책의 변화라던가, 제 3세계국가의 값싼 인적자원을 이용한 아웃소싱이나 오프쇼어링에 열광하는 기업들을 경계한다. 눈 앞의 이익을 위해 자국의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제 3세계국가들의 노동자들에게 인간적인 노동조건을 보장하지 않는 등의 일은 결국은 그 기업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또한 디터 람스가 주창했듯이 그 역시 오래 가는 디자인전략을 수립하고 불필요한 생산을 줄이는 것이 기업이 더욱 오래 생존할 수 있는 길이라 이야기한다. 이를 바탕으로 그가 이야기하는 3단계의 혁신 전략은 신자유주의의 회오리 속에 갇혀있는 우리에게는 한번쯤 되새겨 볼 만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