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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상실의 잿더미 위에서 피어난 미술

우정아 | 2015-10-15


우리는 늘 무언가를 잃어버린다. 어린 시절 손에서 놓친 작은 곰 인형부터, 이제는 가물거리는 소꿉친구의 기억들, 사랑과 이별하고 피붙이를 떠나 보내고, 마침내 삶과 연을 끊게 되는 순간까지. 반복되는 이별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실들은 마음속에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낸다. 가슴을 저미고 창자를 들어내는 듯한 고통은 정신의 면역 체계를 마비시킨다. 상실이 이토록 아픈 이유는 그것이 내가 발 딛고 있던 세상의 일부-혹은 전부-를 유실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 아픔을 ‘버티는’ 것이야말로 남겨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숙제다. 〈남겨진 자들을 위한 미술〉에 등장하는 열여섯 아티스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실의 천공(穿孔)을 메운다.

에디터 | 나태양(tyna@jungle.co.kr)
자료제공 | 휴머니스트
 

남에서 북 정도가 아니라 지구 반대편 현장까지도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지금, 상실의 경험은 전 인류적 차원의 불행이 됐다. 이성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대참사들은 송곳처럼 현대 세계가 쓴 ‘합리성의 세계’라는 가면을 찢고 나왔다. 삼풍백화점 붕괴를 실감하기엔 아직 어렸던 세대들은 9. 11 테러를, 대구 지하철 참사를 거치며 재난의 감각을 구체화해 갔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로서 느끼는 무게는 세월호 사건 이후 나락으로 떨어졌다. 어른이 돼봤자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기력증,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 먹고 잠자며 유지되는 삶에 대한 환멸감. 세간에 오르내리던 ‘힐링’은 이제 잠꼬대 같은 소리가 됐다. 이 광기 어린 비합리성의 소용돌이에서 누가 누구를 힐링한단 말인가?

상처 입은 사람에게 섣불리 ‘치유하라’, ‘극복하라’ 요구하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이다. 어떤 상처들은 제대로 기억조차 되지 않는다. 나치 정권의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이 회고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습은 대개 아귀가 맞지 않는다고 한다. 위안부 피해자는 얼마나 더 정확하게 사건을 기억해야 할까? 그 진술의 비논리성과 무질서를 날조라고 말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는 이 같은 현상에서 ‘방어기제’, ‘억압’, ‘트라우마’ 등 정신분석학의 주요 개념들을 퍼 올렸다. 강한 쇼크에 노출된 주체는 오히려 기억을 무의식 저편에 묻어 버린다. 처리할 수 없는 스트레스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억압’이라는 방어기제를 발동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거부된 기억이야말로 우울 극복에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 상실을 인정함으로써 슬픔을 완화하는 과정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사건 직시를 회피하는 주체는 ‘애도’가 아닌 ‘멜랑콜리아’라는 병리적 징후에 종착하게 된다.

〈남겨진 자들을 위한 미술〉의 저자 우정아는 이 같은 멜랑콜리아적 상태를 ‘재현 불가능성’과 결부 짓는다. 수천 년 미술의 역사를 떠받쳐 온 기본 원리는 재현(represent)이었다. 재현적 미술이 뒤꼍으로 물러난 21세기에도 아티스트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감각적인 형식으로 현현(顯現)한다. 그러나 잊힌 것, 이제는 없는 것,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상실이라는 빈 공간(void)에는 재현할 실체가 없다. 혹여 실체가 있다손 치더라도, 멜랑콜리아적 주체의 태도로는 그 실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 그럼에도 미술가들은 이 무정형적 카오스에 ‘예술’이라는 언어를 입히기 위해 분투해 왔다.

〈남겨진 자들을 위한 미술〉에는 저자 우정아가 근 10년간 연구해 온 현대 미술가 16인의 작품 세계가 집성되어 있다. 이불, 오노 요코, 마르셀 뒤샹,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등 현대미술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그 이름이 낯설지 않을 미술가들의 심연에는 ‘상실’과 ‘부재’가 웅크리고 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는 뼈저린 아픔을 받아냈고, 전쟁과 재난이 휩쓸고 간 폐허를 경험했으며, 근대적 개념이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된 현대미술의 장을 활보했던 이들은 자신만의 상실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공중에 전시했다. 우정아 저자는 두 작가를 한 쌍으로 엮어 공동의 테마로 추린다. 총 8장으로 구성된 각 테마는 개인에서 사회로 퍼졌다가 미술로 모이며 결을 옮겨 간다.

이들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연인과 본인의 몸무게를 합친 양의 사탕으로 ‘모두의 것인 동시에 누구의 것도 아닌’ 초상화를 제작하고(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러버 보이〉), 격동기 중국의 압제와 비극적 가족사를 거치며 발현된 어머니의 강박 장애를 설치작품으로 풀어놓기도 한다(쑹둥, 〈버릴 것 없는〉). 어머니가 아이의 일원적 관계가 분리되는 과정을 건조하게 기록한 메리 켈리의 육아일기 〈산후 기록〉, 아버지의 부도덕과 어머니의 무기력을 관찰하는 트라우마를 ‘박탈된 남근상’으로 표현한 루이스 부르주아의 조각은 여성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끔 한다.

제3장 ‘구원 없는 삶’에는 ‘숭고하고 신성한 국가’라는 환영이 허위로 드러난 전후 일본의 상황이 담겨 있다. 권태와 불안이 공존하는 ‘기묘한 세대’를 그린 50년 간의 일일 연작 〈일일 회화〉(온 가와라), ‘민족 국가’라는 고결한 숙명으로 포장된 전체주의에 저항해 군중의 본능적 폭력, 증오, 광기를 드러내고자 했던 오노 요코의 퍼포먼스 등이다. 히지카타 다쓰미와 양혜규는 ‘실향’으로 묶인다. 전후 일본사회가 ‘조화’와 ‘청결’을 위시로 억압해 온 ‘더러운 몸’을 거칠고 추한 몸짓으로 해방시킨 히지카타 다쓰미는 피난 생활의 근거지였던 도호쿠 지방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고, 소속 없는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양혜규의 고립감과 주거지에 대한 갈망은 〈사동 30번지〉라는 가상의 고향을 창조했다.

안규철과 이불의 작업은 진보에 대한 믿음과 유토피아의 이상이 붕괴된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조명하는 한편, 멕시코시티 대지진은 자본주의와 산업화를 수입 ‘당한’ 남아메리카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작품(프란시스 알리스)을 낳았다. 2011년 일본 대지진은 난민들을 위한 소통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커뮤니티 아트’로 이어진다(나카무라 마사토).

마지막 두 장은 ‘저자’의 위상과 ‘감각’의 기능이 변화된 현대미술의 상황을 시사한다. 사인한 기성품 변기를 〈샘〉이라는 작품으로 내놓아 센세이션을 일으킨 마르셀 뒤샹, 자신의 설명서를 따라 제작된 모든 작품의 진품성을 인정해 저작권 개념을 파괴한 솔 르윗, 스펙터클의 과잉 시대에 관객으로 하여금 ‘더 많이 보게’ 만들기 위해 매체와 기법을 실험했던 로버트 어윈, 듣는 이와 소리의 관계성을 비틀어 지각과 인식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라 몬티 영 등이 이에 해당한다.

더러는 현대미술 읽기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 여긴다. 하지만 저자는 정신분석학, 사회학, 철학과 미학을 광범위하게 인용하며 ‘상실’이라는 사적이고, 정치적이며, 관념적인 주제에 설득이라는 힘을 불어넣는다. 덕분에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프로이트, 라캉, 로잘린드 크라우스, 장 보드리야르, 롤랑 바르트, 수전 손태그, 랑시에르, 낭시, 아감벤, 지젝 등 현대 미술과 철학을 논할 때 늘상 오르내리는 굵직한 이론가들을 마주하게 된다. 소위 현대 담론의 ‘바이블’들을 한 권의 책으로 시식해볼 수 있는 셈.

저자 우정아는 에필로그에서 책을 마무리하며 “참담한 재난이 늘 가까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러니 이 책도 아마 ‘시의적절’할 것이다. 10년 뒤에도, 100년 뒤에도 ‘시의적절’할 것이다. 불행히도 그럴 것이다”라고 썼다. 그렇다. 세월호 침몰 이후에도 환풍구가 추락하고, 체육관이 붕괴됐다. 최근에는 인도주의 의료 구호 단체 ‘국경 없는 의사회’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의 폭격을 받기도 했다. 우울하게도 상실과 재난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미술가들은 상실이 할퀴고 간 자리를 응시하려 몸부림을 계속할 테다. 그들은 과연 이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도달했거나, 도달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잡히지 않는 대상에 헛손질을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답은 그들만이 알겠지만, 그 잿더미 위에도 미술은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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