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1-29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반지를 선물한다. 동그라미에 그들의 꿈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담았다.
에디터 | 이상현(shlee@jungle.co.kr)
Suspended Wings + 조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을 했다. 특별할 것 없는 연애였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여자의 다리가 불편했다. 둘 사이에선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국 둘은 헤어진다. 남자가 여자를 떠났다. 조금 다른 점은, 작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떠난 남자는 거리를 걸어 가다가 주저 앉아 소리 내어 울고, 남겨진 여자는 울지도 않고 혼자 생선을 구워 밥을 먹는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의 조제에게, 금속공예가 윤덕노의 ‘Suspended Wings’를 선물하고 싶다. 츠제오를 만나 파닥였던 조제의 가녀린 날개가 다시 하늘을 향해 작동되길 기도하면서…. 손가락 관절을 움직일 때마다 하얀 깃털이 새의 날개처럼 파닥거리는 이 반지는, “몸에 착용하는 장신구로서의 용도보다는 신체에 반응하는 오브제”에 가깝도록 고안되었다. 날갯짓이 작동되도록 구조된 메커니즘 그 자체, 즉 선과 선이 만들어내는 구조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특히 날카롭고 묵직한 철과 깃털의 연약함이 대조되어 강렬한 느낌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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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wearing the ring + 빌리 (빌리 엘리어트)
소년은 발레가 좋다. 하지만 아버지와 형은 발레를 싫어한다. 소년이 땅을 차고 힘껏 뛰어오를수록 강압적인 아버지와 형은 더욱 세게 소년을 쥐어박는다. 그러나 아들이자 동생의 자유로운 몸짓은 탄광노동자인 그들을 감동시키고, 소년은 이런저런 고난 끝에 세계 최고의 무용수로 무대에 선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
의 빌리 엘리어트에게 반지 ‘Who is wearing the ring’을 선물하고 싶다. 사진 속의 커다란 손이 아버지와 형의 억압과 강제라면, 이를 꼿꼿이 떠받들고 있는 남자는 빌리 엘리어트의 꺾이지 않는 꿈이다. 거꾸로 보면, 남자는 주먹 위를 물구나무 서고 있는지도. 현실의 무게가 가슴을 묵직하게 내려앉아도 우주의 리듬에 맞춰 사뿐히 뛰어올랐던 빌리의 자유로운 몸짓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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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 your voice… + 수리첸 (화양연화)
남자와 여자가 만났다. 남자의 아내와, 여자의 남편의 불륜 때문에 엮이게 된 두 사람은 부주의하게도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스쳐 지나고, 스쳐 지나가길 반복하는 남과 여…. 결국 차우가 앙코르와트 석조 건물 구멍에 마음 속의 비밀을 불어넣고 진흙으로 막으면서, 둘의 사랑은 풍문처럼 시간 속으로 봉인된다. 영화
<화양연화>
수리첸에게 반지 ‘Like your voice…’를 전하고 싶다. 이 반지는 링 안쪽에 글씨가 음각되어 있어서 꼈다 뺐을 때 손가락에 ‘자국’을 남기게 된다. 디자이너 김계옥은 “자국은 또 다른 유형의 텍스트를 신체에 남김으로써 무형의 주얼리를 만든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무형의 주얼리는 세상 삼라만상이 결국 소멸을 통해 자연의 일부가 됨을 상징한다. “소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은 자연과 우주에 텍스트를 남김으로써 영원히 존재한다. 실제로 우리 앞에 놓인 유형의 오브제는 영원이 아닌 순간이며 우리는 이러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영화 속 차우가 구멍에 읊조렸던 말 역시 사라지지 않고 천구를 가로질러 수리첸의 귀에 들릴 수 있을까. ‘Like your voice…’ 반지 안쪽에는 이해인 수녀의 시구가 새겨져 있다. “In the rain, sounds like a cello…, in the sunbeams, sounds like a piano…, like your voice.”
화양연화>
Slim Ring + 앨리스 (클로저)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라고 했던가. 인파로 북적거리는 뉴욕 한 복판, 빨간 머리의 앨리스가 댄의 눈에 아로새겨진다. 걸음을 멈추고 그저 멍하게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 발을 떼고 다가가려는 찰나, 갑자기 여자가 쓰러진다. 황급한 마음에 사람들을 뚫고 댄이 달린다. 마치 잠을 자고 있는 듯 쓰러져있다가 깨어난 앨리스는, 아마도 영화 역사상 명대사로 기억될 이 대사를 뱉는다. “Hello, stranger.” 결국 치졸한 남자 댄 때문에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된 앨리스에게, 디자이너 윤라희의 ‘Slim Ring’을 선물하고 싶다. 그녀가 “Hello, stranger”라는 첫 인사와 함께 이 반지 명함을 건넸다면, 부서질 듯 얇은 약속의 종이 반지 하나 전했다면, 댄은 앨리스의 사랑을 지키지 않았을까 하는 바람으로…. 세상에서 가장 얇은 반지 ‘Slim Ring’은 허영심이나 자만심을 만족시키는 용도가 아니라, ‘력서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가치의 반지를 창조한다
Laced Trace + 김기덕의 여자들
김기덕의 영화 속 여주인공들은 파멸로부터 ‘구원’을 희구한다. 세상의 가장 밑바닥, 불운의 흙탕물을 뒤집어쓰면서도 그녀들은 홀연 ‘성녀’처럼 몸을 일으킨다. 그래서 김기덕이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강렬한 신체 훼손의 이미지는 관객들로 하여금 불편을 넘어서 그로테스크한 ‘비장미’를 선사한다. 혹자는 이를 두고 ‘에로틱과 폭력을 섞은 한편의 시’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동시에 가장 여린 김기덕의 영화 속 여자들에게 반지 ‘Laced Trace’를 끼워주고 싶다. 이 반지는 일종의 ‘지울 수 있는 문신(washable tattoo)’이다. 적어도 아프지는 않다. 주얼리의 거친 텍스쳐에 잉크를 묻혀, 착용 과정에서 그것이 피부에 자연스럽게 무늬를 남기게 된다. 사용자는 자신이 원하는 신체에 장식적인 패턴, 즉 레이스 무늬의 흔적(Laced Trace)을 그려 넣는다. 디자이너 김계옥은 “사람들은 이 반지를 통해 신체 유희를 즐기게 되는데, 이는 주얼리의 본질적 유희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Me, Myself and I + 잭과 애니스 (브로크백 마운틴)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의 브로크백 마운틴은 쉼 없이 되돌이표를 찍는 세상의 법칙을 상징하고 있는 걸까.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다시 가을을 거쳐 겨울을 맞는 영원한 동그라미의 세상…. 이곳에서 스무 살 두 청년, 잭과 애니스가 만나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싶은, 사랑의 생채기를 낸다. 기약도 없이 헤어졌던 두 청년은 끝과 시작이 하나인 동그라미처럼 다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재회하게 되고, 이미 각자 결혼해서 왼쪽 검지 손가락에 반지를 낀 채 사랑을 확인한다. 두 사람은 그 후로 일년에 한 두 번씩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만난다. 20년간 계속된 짧은 만남과 긴 그리움의 반복, 그러나 잭의 죽음으로 맞는 파국…. 커다란 반지 위에 선 두 남자가 또 다른 반지를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디자이너 문영신의 ‘Me, Myself and I’ 반지는, 잭과 애니스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죽은 잭의 셔츠와 자신의 셔츠를 겹쳐 옷걸이에 걸고 “Jack, I Swear”라고 낮게 읊조리는 애니스의 손에 이 반지를 들려주고 싶다.
브로크백>
어느 기계쟁이의 쉬는 시간에 일어났던 일 + 영군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에는 스스로를 사이보그라고 믿는 여자가 등장한다. 어서 힘을 키워 ‘하얀맨’들로부터 할머니를 구해내야 하는 사이보그 영군은 밥 대신 건전지를 낼름거리다가 ‘아사’ 직전에 처하게 된다. 정신병동에서 영군이 만난 반사회성 인격장애자 일순은 일명 ‘훔치심’의 대가로 남의 능력을 자유자재로 훔칠 수 있다고 믿는 남자다. 영군의 ‘동정심’을 훔쳐 그녀의 슬픔을 대신 느끼다 결국 사랑에 빠진 그는 ‘평생 A/S’를 보장하며 ‘영군 밥 먹이기’에 총력을 쏟는다. 자판기처럼, 형광등처럼 분명한 ‘존재의 목적’이 궁금한 영군에게 ‘사용설명서’ 대신 반지 ‘어느 기계쟁이의 쉬는 시간에 일어났던 일’을 전하고 싶다. 톱니 모양으로 링을 만들고, 다이아몬드 대신 나사못으로 장식을 한 이 반지는 존재 자체가 이유라고 말하는 듯 하다. 영군이 사이보그임을 인정하고, “싸이보그지만 괜찮다”고 말하는 일순이 그녀를 위해 준비했을 법한 반지가 아닐까.
싸이보그지만>
Button rings + 사자(死者)들 (원더풀 라이프)
이곳은 이승과 저승에 사이에 위치한 중간역 ‘림보.’ 매주 월요일, 림보를 찾아온 사자(死者)들에게 일종의 미션이 주어진다. 일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기억해내고, 이를 필름으로 기록해야 하는 것. 그들의 ‘화양연화’는 가지각색이다. 관동 대지진 때 대나무 숲에서 그네를 타며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주먹밥을 먹던 순간을 이야기하는 할머니, 통학 길에 버스 차창 밖으로 불어오던 바람을 이야기하는 중년의 남자, 첫 비행의 순간 빛나던 구름을 기억하는 전직 비행사, 귀를 파줄 때 느끼던 어머니의 포근한 무릎 감촉을 이야기하는 소녀…. 이들 모두에게 디자이너 곽미나의 반지 ‘Button rings’을 끼워주고 싶다. 촌스러운 단추라도 곽미나의 손을 거치면 이렇게 ‘어여뿐’ 반지로 재탄생 하듯, 비록 남루했던 삶이라도 기억해낸다면 누구에게나 반지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 버려진 단추를 구리철사로 엮어 반지로 재창조하는 일련의 과정은, 기억의 먼지를 탈탈 털어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필름으로 담아내는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한편 곽미나의 ‘Button rings’는 최근 미국 모마미술관에 입점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