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23
현대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보르헤스는 문학의 다원성을 그의 대표작 『모래의 책』에 빗대었다. 작가 남현주 작품 안의 공간도 ‘모래의 책’이다.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그런 공간이다. 작가는 스스로 설정한 구도와 사물, 이중적 의미들을 사용하여 관람자의 환상과 감정이입을 이끌어낸다. 그녀의 그림은 이렇게 시작한다.
에디터 | 이영진(yjlee@jungle.co.kr)
자료제공 | 롯데에비뉴엘갤러리
남현주는 일상의 소재를 일상적이지 않는 혹은 일상과 비일상이 혼재하는 공간을 재해석하는 작가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공존(2009)’이나 ‘공존 3, 4(2008)’의 작품처럼 민화(民畵)병풍으로 가려진 공간 뒤로 보이는 허공의 조합이라든가, ‘근대보기(2009)’시리즈에서 단순한 공간의 한 면을 근대 풍경화로 병치한 것처럼 말이다. 그는 민화를 통해서는 강렬하고 화려한 색감을, 전원적인 풍경화에서는 작가의 이상과 환상을 구현해왔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설정을 그림에서는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재미있는 작품 읽기는 이제부터 시작한다.
그녀의 공간에 들어서면 손에 잡힐 것 같은 묘사력과 흡입력이 관람자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늘 상 드나들었던 사람처럼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 빈 의자에 앉아보기도 하고, 그 너머의 공간을 다시 한번 관람하기도 한다. 작품 안 병풍 뒤의 푸른 허공과 나비들의 군무(群舞)에서는 자유를, 그리고 근대여인의 반가운 마중과 바람 따라 휘어진 빨랫감에서 그리움과 향수를 느낀다. 때로는 작품 속에 차용한 루소(Henri Rousseau)의 그림에서 허구가 주는 환영을 떠올리기도 한다.
좀더 천천히 둘러보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의 그림이 단순한 ‘공간의 중첩’에만 의존하여 우리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다양하고 함축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소재들을 사용하여 관람자로 하여금 다양한 감상을 유도하는 것이다. 일률적인 감상을 종용하는 것이 아니란 말씀. 즉, 화면 안에 배치된 의자, 달, 의자를 압도하는 꽃은 그들의 일상성과 함께 존재하는 비일상성, 혹은 현실과 환상의 중간통로인 셈이다.
작가는 일상의 매우 정적인 ‘정지장면’을 주로 보여준다. 긴 호흡을 가지고 관찰한다 하더라도 미동조차 없어 보이는 공간과 상황, 시간이다. 분명히 남현주의 작품들은 안과 밖, 뜨거움과 차가움, 건과 습이라는 경계가 불명확한 대상을 선택하여 일상을 ‘비일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짙은 원색과 평면적으로 단순화된 이미지의 화면은 전혀 동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 깊은 곳의 동요를 일으키는 것이다.
현실과 환상을 오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이미 예술의 오래된 매력이다. 그 매력이 마음껏 발산된 남현주의 이번 전시에서 일상에 숨겨진 환상의 통로를 발견하고 경험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