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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몸에 다다르는 방법

2011-08-03


오랜 옛날부터 몸의 아름다움은 찬양의 대상이었습니다. 몸에 대한 미감은 비단 종교나 생물학 측면에서 기대되는 '기능성'에 충만한 대상에서 비롯되지 않더라도, 우리와 닮은 대상이나 정체성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으로 가능하기도 합니다.

글 | 김종혁 앨리스온 에디터


1.
한편 구체적인 이야기의 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무대의 현장감을 말하자면, 몇몇 실험적 연극이나 미술에서의 퍼포먼스 개념, 그리고 이 공연과 같이 내재적 서사가 몸의 움직임으로 추상화되어 나타나는 경우 많은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약화된 서사성 대신에 다른 요소들을 통하여 관객을 끌어들일만한 흐름을 구축해야하는 과정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작품 내적인 구조라 해도 좋습니다. 관객의 경험이거나 작품의 구성 요소 등 어디에 방점을 찍더라도, 어쨌든 무대라는 공간은 현장감이라는 파도와 이야기라는 바람으로 흔들리는 선상과 같고, 설령 결말이 없어도 언젠가는 내려야하는 곳이니까요.

이처럼 몸은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나타나왔고, 부여되는 가치의 질량도 무거워졌습니다. 그런데 몸은 여전히 불확실한 무엇이기도 합니다. 각자에게 여분이 없는 마지막 보루이면서, 너무나 가벼워서 금방 사라질 것 같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웹에 떠도는 포르노부터 화이트큐브의 살아있는 퍼포머까지, 어떤 의미로든 수월하게 아름다운 몸을 만날 수 있음에도 채워지지 않는 그것은 무엇일까요. 이 글에서 소개하는 서정춤세상의 <순환속으로> 의 주요한 소재인 현실의 '밥그릇'으로 채울 수 있을까요?


2.
예술 차원에서, 특히 몸을 담아내는 방법으로서, 영화나 뮤직비디오로도 불충분한 것. 연극이나 라이브콘서트의 경험에서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 이를 무대, 프레임 안의 현장감, 프레즌스라고 먼저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아울러 이는 작품과 관객 안팎으로 이야기, 리터러시를 만들기도 합니다. 두 가지 결과를 이끌어내는 총체적 방법으로, 여러모로 선전하고 있는 뮤지컬 장르를 떠올릴 수도 있겠습니다.

한편 구체적인 이야기의 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무대의 현장감을 말하자면, 몇몇 실험적 연극이나 미술에서의 퍼포먼스 개념, 그리고 이 공연과 같이 내재적 서사가 몸의 움직임으로 추상화되어 나타나는 경우 많은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약화된 서사성 대신에 다른 요소들을 통하여 관객을 끌어들일만한 흐름을 구축해야하는 과정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작품 내적인 구조라 해도 좋습니다. 관객의 경험이거나 작품의 구성 요소 등 어디에 방점을 찍더라도, 어쨌든 무대라는 공간은 현장감이라는 파도와 이야기라는 바람으로 흔들리는 선상과 같고, 설령 결말이 없어도 언젠가는 내려야하는 곳이니까요.


따라서 이 공연을 통하여 한정된 공간에서 현장감을 발생시키는 비서사적인 방법을 살핀다거나, 설치미술과 무대미술의 속성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더구나 이 무대에서 사용된 음악, 영상을 비롯한 무대장치 요소들은 꽤 고밀도입니다. 또한 1장부터 8장까지의 서사 구조를 갖추고 있고, 각 장마다 조금씩 다른 춤사위를 볼 수 있기도 합니다. 무용에 눈이 밝은 사람이라면, 이 공연의 주제가 어떻게 몸짓으로 구체화되며 흐름을 만들어나가는지, 어떤 (전통) 춤사위가 (현대적으로) 사용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순환속으로> 무대가 어떻게 현장감을 발생시켰는지에 대해 살피며, 무대장치로서 디지털테크놀로지가 사용된 부분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3.
산사의 타종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가 밝아지며 공연이 시작됩니다. 조명은 관객이 주목해야할 곳을 비추는 가이드라인 역할에 충실합니다. 수직선 뿐만 아니라 수평으로도 사용되는데, 이는 무대 공간 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공연 초반의 경우에는 1장의 '낚시꾼과 물고기'라는 제목처럼, 어항 위를 벗어나지 않는 남자 무용수와 나머지 무대 전체를 사용하는 다른 남자 무용수가 등장합니다. 각 무용수가 다른 높이와 면적의 공간을 활용하는 모습입니다. 좁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어항 위의 남자가 더 자유로운 몸짓이라 인상적인 대비를 만들어냅니다. 한편, 이러한 먹고 먹히는 사슬관계는 이후로도 '밥그릇'을 뺏고 빼았는 관계로 변용되며 이 공연의 주된 몸짓으로 인지되는 일관성을 보여주기도 하지요.

어쨌거나, 처음의 공간 활용에 익숙한 상태였던 1장 말미, 무대 뒤편 배경의 꽤 높은 위치에서 여자무용수의 나타난 것은 꽤 충격이었습니다. 새로운 포식자의 등장이자, 순간적으로 확대된 무대 공간. 이러한 확장은 단 한 번만 사용됩니다. 유사한 식으로, 무용수의 관객석 난입도 공연 초반부에 단 한 번만 일어납니다. 군무가 많아지는 공연 중반 이후로 상당히 넓은 면적의 무대를 사용하는 이 공연에서, 초반부에 발생했던 확장은 결과적으로 관객이 무대공간을 축소시키는 과정을 통해 더욱 몰입하는 계기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공연 초반에서 사용된 충격-안정의 전환은 다른 요소에도 나타납니다. 초반에 자주 사용되는 전체 암전에 의한 전환은 후반부에서는 조명의 음영조절에 의한 전경/배경의 구분으로 처리됩니다. 또한 몇몇 영상으로 표현된 디지털 테크놀로지로서의 무대 장치에도 이러한 특성이 나타나는데, 특히 두 곳에서 사용된 영상이 인상적입니다. 먼저, 무대 평면을 전면과 후면으로 나누었을 때 그 사이에 자리한 스크린의 수평 시점의 영상이 있습니다. 이곳의 영상은 공연 초중반에 두 차례 사용되었고, 모두 모션캡처 기술이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으로는 무대 후면의 바닥에 사용된 영상입니다. 1장에서는 수면이 연상되는 이미지가 비추어졌고, 공연 후반부에서는 검은 바탕에서 솟아오르는 하얀 사각형의 형태를 보이며, 심연 위에서 가변적인 발판을 딛는 이미희 씨의 독무와 함께하기도 했습니다. 사전에 녹화된 영상으로, 무용수의 움직임에 근거를 부여하는 역할에 사용되었습니다.


첫 번째 수평 시점의 영상은 이 공연의 '밥그릇'을 처음 놋쇠 그릇 소품으로 갖고 나온 탁발승(?) 역할의 남자의 뒤편을 비추던 영상입니다. 영상에는 탁발승의 얼굴과 양손이 그의 몸동작을 실시간으로 반영하여 나타납니다. 또한 영상에는 무대 전면에 놓여진 그릇을 닮은 이미지들이 함께 있습니다. 탁발승이 양손을 허공으로 움직일 때마다, 뒤편의 영상에는 가상의 몸이 주워담는 가상의 그릇들이 나타납니다. 마임과 같은 상황이 기술을 통하여 가시화된 모습이자, 동시에 이 공연의 주제로서 욕망이나 물질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는 초월적 태도를 떠올릴만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또한 영상이 종료되고 이어지는 탁발승의 독무가 오히려 돋보이도록 대비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두 번째 영상이 바로 이어집니다. 무예동작이 연상되는 춤사위가 사용된 부분입니다. 여기서 영상은 무예가 역할의 무용수 뒤편에서 기공의 흐름을 가시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이 경우에는 스크린 자체의 반투명 속성이 장치로서 활용됩니다. 앞서 탁발승 등장 이후로는 스크린으로 인해 무대 전면만 사용되게 됩니다. 그런데 무예가의 동작으로 동기화되는 영상이 종료됨과 동시에 무대 뒤편 배경 위치에서도 수평적으로 조명이 사용되면서, 지금까지 그림자로 사용된 가상의 이미지 대신에 탁발승이 반투명 스크린 뒤편에서 무예가와 대칭으로 자리하는 모습이 갑자기 나타납니다.


극의 흐름상, 수평 시점의 영상과 실사가 교차반복되는 부분은 이 공연의 도입부 역할입니다. 이 공연의 주제를 대유하는 '밥그릇'과 주된 표현수단인 몸의 움직임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 이후에는 배경으로 사라질 기능입니다. 이 기능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영상을 만들어내는 장치의 물리적 속성이나 영상이 맺히는 스크린의 공간적 속성까지도 고려되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보통의 경우, 극 예술의 무대에 삽입된 스크린들이 내제된(혹은 복합적인) 서사성을 보여주려는 과욕으로 나타나거나, 없어도 좋을 장식 역할에 그치는 데 비하면, 이 공연에서는 특정 상황과 필수적으로 결부된 장치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4.
무용수들의 몸짓을 녹화하여 그 영상을 실시간으로 제어하여 내보내거나, 장구와 꽹과리의 음향을 제어하여 실시간으로 내보내는 기술들을 사용하여 오직 무용에 국한된 무대가 아닌 여러 장르의 예술들이 함께 테크놀러지라는 묶음 아래 하나로 융합되어 나타난 무대라고 말 할 수 있었다. 센서에 의한 영상의 제어, 또는 일레트로닉한 사운드의 표현은 단순한 한국춤의 세계라고 말하기에는 또는 단순한 무용을 위한 무대라고만 표현하기보다 융합된 종합예술이라 표현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정진희)

특히나 이 작품을 관람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음악이 생각보다 난해하기는 커녕 친숙하게 들렸던 점이다. 이 작품의 특성상 매우 전위적인 음악 - 예켠데 불규칙척인 소음들의 조합이라던가 - 이 흘러나올 것을 예상했으나 그렇지 아니하고 규칙적이고 강렬한 비트가 강조되는 듯한 음악을 선보였다. 마치 클럽에서 나오는 하우스나 트랜스 뮤직이 떠올랐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오히려 난해하지 않은 이 음악으로 하여금 더욱 무용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았다.(최태윤)

기술의 발전에 따라 공연에 있어서도 많은 기술적인 부분들이 첨가가 되어져 가는 지금 이번 공연 또한 그 흐름의 선상에 있는 공연이었다. 디지털과 댄스. 두 분야의 결합은 시각적인 예술인 무용에 더욱 배가 되는 영상과 사운드가 더해지며 공연 전체에 있어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확장시켰다. 하지만 기존의 몸 하나의 선만으로 압축적 표현에서 얻어지는 담백한 무용만의 힘은 여러 방법들과 어우러진 공연에서 가감되어진 듯하다.(김은솔)



이번 이벤트 참여자들의 감상 중 일부입니다.
이 공연에서 조명이 몸의 가이드라인이었다면 음악은 그림자였습니다. 무대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배경으로서 역할과, 중반부의 군무에서 몸의 박력을 들려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군무에 어울리는 댄서블한 음악은, 동시에 현실의 기계적 체계와 인간의 욕망을 채집한 소리의 풍경이기도 합니다. 이 공연을 구성하는 요소들 중에서는 총체성의 면모가 큽니다. (전통무용이 의식되기 때문인지, 전자)음악을 극 중의 시련을 만드는 무엇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감각적으로도 음악은 무용의 추상성보다 먼저 인지되기에, 음악에 무용수들의 몸이 지배당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뜨거운 몸을 가진 인간이자, 폭력적인 상황에 놓인 인형의 모습이 함께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군무는 전자음악의 규칙성이 만들어내는 체계를 깨트립니다. 의도한 오차로서 같은 동작을 시간차를 두고 반복하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기계적인 정확성 대신에 인간 눈의 잔상에 의한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몸의 생명력이 가시화되는 방법이자, 다음 시퀀스에서 주목할 무용수를 강조하여 관객의 시선이 따라갈 곳을 예비합니다. 또한 이러한 불규칙성은 이 공연을 채우는 고밀도 장치들에 대비되는, 일종의 여백처럼 탁 트인 느낌으로 매우 자유롭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요소로 자리하게 됩니다.

다양한 장치들이 멀티적으로 사용되고, 특히 전자음악이 가져다주는 강력함이 지배하는 (일견 바그너 스타일의) 공간에서, 과부하에 다다른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열연하는 무용수들의 모습은 그대로 보고만 있어도 충분히 아름다울지 모릅니다. 이 공연이 제시하는 주제의 거대함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또한 멀티미디어 장치에 대항하여 추상화된 몸짓으로 무대공간을 점유하기 위해서도, 그럴만 합니다.

보는 사람이 없어도 아름다운 무대. 무대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표시하기 위한 현장감. 그것만으로는 이야기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불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이 공연에서 몸이 만들어내는 오차는 관객이 이 공연 무대에 개입할 수 있는 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공연에는 관객이 무대 위의 몸을 바라보도록 조율된 무대장치들과, 총체적인 무대 공간의 출구처럼 자리하는 몸이 함께 있습니다. 그것이 이 공연에서 볼 수 있는 순환의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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