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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공연같은 전시, 전시같은 공연

2011-08-17


미로로 만들어진 하얀방. 그 속에서 작가는 관객들과 심리 게임을 벌인다. 이 게임에는 아무런 규칙이 없는 것 같지만 일종의 보이지 않는 규칙이 존재 한다. 이 보이지 않는 규칙은 관객들이 몸으로 스스로 지각하고 인지하면서 심리적인 움직임과 신체적인 움직임을 통해 나타나게 된다.

글, 사진 | 구선아 객원기자
에디터 | 최동은(dechoi@jungle.co.kr)


8월 5일부터 14일까지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하얀방’은 2008년 초연한 전시와 공연이 결합된 <유진규의 빨간방> 에 이은 일명 ‘방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유진규의 하얀방> 은 제목처럼 온통 하얀방을 미궁과 미로로 구조화 하여 공간 안에서 관객의 움직임을 통해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설치공연이다.

관객들은 입장료를 내고 번호표를 받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앞서 들어간 다른 관객과의 거리와 시간을 맞추기 위해 관객들은 3분 간격으로 신발을 벗고 입장하게 되며, 관람 동선은 자유로이 이루어진다.

관객들은 하얀방에 들어서면 맨 처음 보이는 세 갈래길 앞에서 한 길을 선택하여야 한다. 그리고 계속 공간을 이동하면서 두 갈래 이상의 길 중 선택하여 나아가야 하며 막다른 길에서 돌아 나오기도 해야 한다. 이렇듯 관객은 홀로 어느 길로 갈지 계속적인 선택에 직면한다. 이러한 계속적인 관객의 선택은 하루하루 작은 선택에서부터 큰 선택에 이르기까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위해 계속 나아가야 하는 우리의 실제 삶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이처럼 <유진규의 하얀방> 은 동시에 한정된 공간 안에서 한정된 관객과 만나는 기존의 공연 형식과는 달리, 공연의 주요 공간은 정해져 있지만 공간과 관객이 맞닿는 공간이나 시간적 순서가 관객마다 제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새로운 형태의 퍼포먼스이다.

<유진규의 하얀방> 을 이루는 주요 공간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미로 형식을 따르고 있다.

미로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어지럽게 갈래가 져서 한번 들어가면 다시 빠져나오기 어려운 길’ 그리고 ‘입구에서 목표물에 이르는 길에 막다른 골목을 만들어 놓고 인간이나 동물의 행동 특히 학습 과정을 연구하는 장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미로’라는 공간 구조는 매력적이면서도 공포스럽다. 이는 공간을 물리적으로 구획하고 나누어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공포심이 작용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유진규의 하얀방> 은 10대 20대의 젊은 관객들에게 더 호응이 높으며, 공포심을 자극하는 오브제나 상황이 특히 주어지지 않는데도 관객들은 긴장하고 무서워한다. 미로라는 공간 구조적 개념은 이렇게 심리 게임이라는 설치공연과 딱 어울린다.


<유진규의 하얀방> 은 크게 ‘그림자의 방’, ‘구더기의 방’, ‘기억의 방’ 그리고 작가와 직접 만나 소통할 수 있는 ‘막걸리의 방’의 네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그림자의 방’으로 앞마당에 널린 하얀 이불 속에서 이뤄졌던 어린 유진규의 그림자 놀이를 바탕으로 표현되어 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두 번째 ‘구더기의 방’은 실제 살아있는 하얀 구더기 수십, 아니 수백마리가 꿈틀거리고 그를 감싸고 있는 유리벽에 걸려있는 해드폰에서는 구더기들이 조잘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이는 어릴적 골목길에서 본 동물 사체 위에서 꿈틀거리는 구더기에 대한 작가의 기억과 연계된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소리가 들려오는 세 번째 ‘기억의 방’은 병원을 연상시키는 작은 하얀 공간에 앞·뒤가 거울로 되어 있고 하얀 스툴에 앉아 거울에 비친 관객 자신을 바라보며 해드폰을 끼면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작가의 음산하지만 관객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듯한 음성을 들을 때, 관객들은 왠지 모르게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하얀 비닐 장막을 걷어내며 앞으로 나아가면 만날 수 있는 ‘막걸리의 방’은 그 한가운데 아우라를 한껏 머금은 유진규 작가가 떡 하니 앉아 있다. 바닥이 온통 구더기 영상으로 뒤덮여 있어 관객들은 우물쭈물 거리기 일쑤지만 유진규 작가와 막걸리 한잔, 커피 한잔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구더기들은 저멀리 물러간다.


이 공간들의 주요 오브제와 관객의 행동을 유발하는 요소는 해드폰과 소리다. 작가 그리고 관객 내면에서 속삭이는 듯한 소리는 물론 구더기, 새, 물, 바람 소리 등이 관객의 신체적 움직임을 통해 소통하고 관객의 심리적 움직임을 통해 교감하게 된다. 또한 관객 내면의 소리처럼 들리는 듯한 나레이션과 음향 효과가 공연의 몰입을 돕고 있다.

이처럼 <유진규의 하얀방> 은 공간과 관객의 소통, 관객의 직접적 참여를 이끌면서 관객들이 공간을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뒤돌아보고 발견하게 만든다. 관객은 공간을 경험하고 공연이 진행될수록 더 늘어나는 스스로의 선택에서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유진규 작가는 빨간방, 하얀방은 물론 올해 12월 초연 될 <유진규의 까만방> 등 오방색을 바탕으로 방 시리즈를 발표하고 준비하고 있다.

왜 방시리즈를 하는가 하는 물음에 작가는 “극장, 관객, 공연자가 공연예술의 3요소인 것은 맞지만 지금과 같은 극장의 구조와 한정된 시간 내에 시작하고 끝내야 하는 공연자의 역할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한 것 일뿐, 그것이 전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은 왜 정해진 공간에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관객을 모아놓고 해야만 가능한 것인가? 그래서 그러한 고착화 된 틀을 벗어난 새로운 형식을 구상했고 그 시작이 <유진규의 빨간방> 이었다.”고 답했다.

방 시리즈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지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갈등이 있다. 나는 아직도 작품은 이래야 한다는 고전적인 작품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젊은 관객으로부터 이만큼의 반응을 얻어냈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을 수용하는 게임, 테크놀로지, 미디어 쪽으로 가야하는 것이 맞지 않나 하는 것이 지금의 고민이다. 늘 시대와 함께 하면서 관객과 변형 되는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가능성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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