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11
“인생에서 만나 본 중 최고로 친절한 사람이죠.” “멋진 사람입니다. 좋은 말들만 기록해 주세요.” 로버트 페리스 톰슨(Robert Farris Thompson)이 펭귄사에서 펴낸 「키스 해링 다이어리」서문을 쓰기 위해 인터뷰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해링의 인품을 칭찬한다.
글│이나연 통신원
기사 제공│퍼블릭아트
1989년 도쿄, 뉴욕, 런던을 포함한 유럽 일대에 걸쳐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의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고유한 스타일을 인지하던 시절 (락 스타만큼이나 인기가 있던), 해링은 호텔을 체크아웃하면서 벨보이와 스태프, 안내원에게 오리지널 드로잉을 선물한다. 대중에게 다가가는 미술이 퍼블릭 아트라면, 해링은 그 퍼블릭 아트의 규범을 온몸으로 실천한 셈이다. 그가 뉴욕의 지하철 등지에 그린 낙서화 탓에 공공기물 파손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는 유명한 장면들과는 극명히 상충되는 지점이다. 한 쪽 입장에선 기물을 훼손하는 악동이지만, 다른 쪽 입장에선 관대한 이미지 자선가다. 다행히 역사는 그를 기록하며 후자에 방점을 찍는다.
지난 3월부터 브루클린 뮤지엄에서 선보이고 있는
지난 3월부터 브루클린 뮤지엄에서 선보이고 있는
전시는 1978년, 20살이 된 해링이 고향인 펜실베니아를 떠나 스쿨오브비주얼아트에 입학하게 되면서 뉴욕에 정착한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는 학생 시절 이미 도시의 거리로 나와 공공미술과 정치적 미술을 선보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뉴욕의 다운타운 문화에 깊이 관여하면서, 장-미셀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케니 샤프(Kenny Scharf)를 비롯, 유명 시인, 음악가, 행위예술가, 작가들과 친구가 되었다. 이 전시는 그들과의 우정이 작품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보여준다. 그룹쇼나 퍼포먼스를 기획하는 데 촉진제 노릇을 하면서, 금세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해링의 능력을 칭찬한다. 단 하룻밤동안의 퍼포먼스 형식 전시를 친숙하지 않은 공간들에서 기획하곤 했던 것이다. 홍보를 위해 해링이 직접 제작한 각종 전단지들이 이 이벤트를 기록해주고 있다. 큐레이터로서도 발군의 재능을 보였음을 입증하는 기록물들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다시 뜨거운 감자가 된 핵, “가장 순수하고 긍정적인 인간 존재”라고 여기던 어린이의 건강,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 에이즈의 확산에 대한 투쟁같이 굵직하고 중요한 문제들이 해링이 그리 길지 않은 일생 동안 많은 힘을 쏟은 부분이다.
“대중은 예술을 할 권리가 있다”거나 “예술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라는 문장이 해링의 다이어리에 반복적으로 기록된다.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행위가 바로 뉴욕 지하철에 그의 작품을 그려 넣는 것이었다. 상형문자나 픽토그램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이미지 만들기에 골몰하던 청년이었다. “예술이 프로파간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은 영혼을 자유롭게 하거나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사람들을 더 멀리 나갈 수 있게 복 돋을 수 있는 무엇이어야 한다. 예술은 휴머니티를 조종하는 대신에 찬양하는 것이다.” 그렇게 도시 관객들에게 영감을 불러 넣어주면서 해링 자신 역시 유명세를 누렸다. 그의 아이디어와 에너지는 늘 분출했고, 어딘가로 표현돼야만 했다. 1980년대엔 이미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하고 해외활동을 하느라 분주한 시간들을 보내면서 일기를 쓸 시간도 거의 낼 수 없었지만, 인터뷰나 전시 기획 등 그가 벌인 활동의 기록들이 다른 형태의 일기로 남았다.
<빛나는 아기>
나
<개 가족>
등의 고유의 캐릭터들이 그의 관심사와 결합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로봇, 우주선, 컴퓨터, 텔레비전, 피라미드, 항아리, 아크로바틱 무용가까지 다양한 소재들이 그의 단순한 라인 속에 소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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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다르게 그린다. 매 시. 매 분. 매 순간. 내 그림들은 시간의 특정한 공간에 대한 기록이다. 그들은 생각의 패턴으로 기록된다. 카메라 없이 복제는 불가능하다. 카메라(혹은 기계)없는 반복은 반복이 아니다.” 1978년 10월 14일, 해링이 일기장에 남긴 문장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남기기 위해 끊임없이 펜을 분필을 물감을 이용해 그림을 그려댔다. 사실 그의 일기도 그가 유명해 질 것을 예견하면서 타인에게 “읽힐” 요량으로 쓰인 것들이다. 많게는 하루에 40여 점의 드로잉을 지하철에 그려낸 적도 있다. 간결한 만큼 에너지가 넘치고, 잘 다듬어진 동시에 원시적인 형태를 가진 이미지 자체의 강렬함과 그들의 확산에 혼신을 다 했던 작가 덕에 이미지들은 지금껏 생명력이 넘친다.
1990년, 31살의 젊은 나이에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했지만, 우린 그의 후예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뱅크시(Banksy), 베리 맥기(Barry McGee), 세파드 페어리(Shepard Fairey) 등의 예술가는 물론, 패션, 제품 디자인, 수많은 무명의 거리 아티스트들에게 해링은 여전히 훌륭한 롤모델이다. 해링이 바라던 바로 그대로 말이다. 그는 적은 적이 있다. “끝이란 없다. 왜냐하면 모든 건 언제나 새롭고 다른 어떤 것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다소 낯간지러운 문장으로 끝내도 된다면 키스 해링은 아직도 건재하고 대중에게 사랑받는 중이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는 중이다. 그것이 이미지든 사람이든. 전시는 7월 8일까지.
글쓴이 이나연은 홍익대학교 회화과 졸업 후 한양대학교 교육대학원 재학 중에, 미술 전문지 에디터 생활을 시작했다. 작가 생활이나 미술 교육보다는, 미술에 관한 글쓰기가 재미있어 유학행. 현재 스쿨오브비주얼아트에서 미술비평 석사과정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