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19
머지않아 과학자들이 예술가보다 앞서 영혼의 성분을 밝혀버릴지도 모른다. 허무맹랑하지만,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이하 CERN)의 사례를 보면 뜬구름 잡는 소리만은 아닌 듯하다. 4,056명의 과학자가 모여 매일 24시간씩, 20년간 오매불망 힉스입자의 실체를 들이팠다.
기획, 글│이정헌 기자
기사 제공│월간 퍼블릭아트 11월호
빅뱅의 순간, 약 1조분의 1초만 모습을 드러내고 사라졌으리라 추측되는 이 가상의 입자는 만물의 기원을 설명해줄 수 있기에 ‘신의 조각’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유령 같은 입자를 확인하기 위해 유럽 20개국은 매년 1조원이라는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 부었는데 지난 7월 CERN이 그 실체를 찾아낸 것 같다고 발표한 것이다. 유로존의 위기 탓인지 이르게 발표한 감이 없지 않지만, 가설이었던 힉스입자의 존재 가능성이 높다는 발표에 지구촌은 술렁였다. 댄 브라운의 소설 「천사와 악마」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CERN. 빅뱅을 재현한 이 연구는, 그만큼 종교적 성스러움, 즉 형이상학의 영역에 대한 과학의 침범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바로 이 극명한 대척점이자 현대과학의 최전선에 미술이 초대받았다.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CERN은 1954년 스위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20개국에 의해 설립돼 기초과학 연구와 각종 기술개발을 진행했다. 월드와이드웹(WWW)과 하이퍼텍스트의 개념을 창안한 것도 이곳이다. 이들은 2008년, 힉스입자를 생성할 수 있는 27킬로미터의 길이에 달하는 대형강입자충돌기(LHC)를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에 구축하고 이른바 ‘우주의 기원’을 연구하기에 이른다. NASA와 더불어 인류의 지식이 집약된 기관인 CERN은 2009년부터 아트레지던시 ARTS@CERN을 운영 중이다. 과연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핫한 장소에서는 어떤 예술이 펼쳐지고 있을까? 또 여타 다른 연구소의 아트레지던시나 미술관이나 기업이 운영하는 레지던시와는 어떤 다른 점이 있을까? 우선 설립배경부터 살펴보자.
CERN의 사무총장 롤프 휴어(Rolf Heuer)는 LHC 완공에 맞춰 과학과 예술의 상호관계에 주목했다. LHC는 착공 이전부터 전 세계의 언론과 여론으로부터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에 시달렸다. 유로존 위기가 겹친 때에 연간 약 1조원 예산을 투입해 가설을 증명한다는 건 돈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이 일었다. 또 한쪽에서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그들의 연구를 힐난하던 단체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는 예술을 끌어들임으로써 이미지 완화에 노력하고자 했다. ARTS@CERN 창립 당시 휴어 사무총장은 “예술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위한 것이며, 예술과 과학은 서로를 보완하고 대변해왔다. 우리 프로그램의 작가들은 힉스입자의 발견보다 어려운 증명을 시도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성이다”라고 말할 바 있다. 사실 직접적인 방향을 제시한 건 문화예술계에서 프로듀서와 아트컨설팅 등 일을 해온 아드리안 코엑(Adrian Koek)이다. 그녀의 제의가 아트레지던시를 만드는 데 무시 못 할 기여를 했다. ‘Great Art for Great Science’라는 친근한(?) 슬로건으로 시작한 이 레지던시는 애초에 디지털아트와 디지털 기술을 사용한 공연으로 한정지어 작가들을 불러 모았지만, 근래 건축과 문학 등 예술의 전 장르로 영역을 확장했다.
현재까지 안소니 곰리(Anthony Gormley, 영국 조각가), 자크 헤어조크(Jacques Herzog, 스위스 건축가), 마리코 모리(Mariko Mori, 일본 비주얼아티스트),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s Gursky, 독일 사진가), 프란스 랜팅(Frans Lanting, 독일 사진가), 피필로티 리스트(Pipilotti Rist, 스위스 영상작가) 등 전 세계에서 활동 중인 작가들이 레지던시를 거쳐 갔다. 잘 알려진 조각가 안소니 곰리의 경우는 올해
레지던시는 조형예술 말고도 안무가와 공연기획자 등에도 큰 관심을 보인다. 오스트리아에 매년 열리고 있는 테크놀로지 축제 아르스 일렉트로니카(Ars ectronica)와 프랑스의 현대음향연구소 IRCAM 등과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레지던시의 안무가와 공연기획자를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현재는 국내에도 내한공연을 가진 바 있던 안무가 질 조뱅(Gilles Jobin, 질조뱅 무용단 대표)이 연구소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각종 퍼포먼스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ARTS@CERN은 올해부터 예술상 제도인 ‘The Collide@CERN Prize’도 운영하고 있다. 이 예술상의 최종 수상자에게는 1만 유로(약 1,420만원)의 상금이 주어지며 원하는 규모의 프로젝트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레지던시에 참여한 작가과 마찬가지로 선정작가에게는 전문 큐레이터와 프로듀서, 그리고 과학자가 일대일로 따라 붙어 작품 아이디어와 프로젝트를 함께 협업해 실현시킨다. CERN은 지난 9월 첫 수상자로 독일 출신의 작가 줄리어스 폰 비스마르크(Julius von Bismark)를 선정했다. 심사위원으로는 비트릭스 루프(Beatrix Ruf, 쿤스트할레 취리히 디렉터), 세르주 도니(Serge Dorny, 리옹 오페라하우스 총괄디렉터), 프랭크 만델라(Frank Mandella, IRCAM 디렉터), 크리스토프 볼만(Christoph Bollman, Art of Geneva 디렉터) 그리고 CERN의 과학자들이 참여해 다각적으로 검증했다. 작가는 카메라 기계 자체를 손봐 독특한 촬영기술을 선보이며 주목받은 바 있는데, 이 기술력은 레지던시를 거치며 한층 진화될 것으로 보인다. 의도한 바가 그대로 나온다는 건 작가들에겐 꿈만 같을 테다. 작가 본인도 레지던시 기간 중에 “꿈만 같다. 내가 현실적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던 것들이 현실화되고 있다”고 말하듯, ARTS@CERN은 예술가가 지닌 상상력과 창조성에 당대 최고의 기술력이란 엔진이 달아주고 있다.
CERN과 엇비슷한 규모와 성격을 가진 NASA의 경우는 어떨까? NASA는 1962년 ‘NASA Art Program’을 만들어 로버트 라우센버그, 노먼 록웰 등 당대 유명 예술가와 제임스 딘에 이르는 대중적 아티스트 250여명의 창작활동 지원했다.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으나 대부분은 후원 작가들의 전시회나 공연 개최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과학과 예술을 접목시킨 다른 과학기구나 기업의 레지던시와 우리는 목적이 다르다. 따라서 과정도 색다를 수밖에 없다. 작품과 작품에 쓰이는 기술이 하나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이런 사항을 염두에 둔 듯 아드리안 코엑 디렉터는, ARTS@CERN이 시작될 때부터 CERN을 단순 미화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아님을 강조했다. 예술이 맹목적으로 기술 자랑에 지나지 않게 되거나 선전용으로 사용되는 걸 경계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지난 7월 14일, CERN이 힉스입자의 존재 가능성을 설명하는 것이라며 제시한 데이터 이미지는 묘한 느낌을 준다. 27킬로미터의 LHC를 빛의 속도로 돌던 두 양자가 맞부딪쳐 생성한 저 데이터들은 마치 한 점의 현대 회화작품 같다. 저 이미지가 무엇을 표상하는지 알 수 있는 이가 과연 세계에 몇 명이나 될까? 보기만 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빅뱅의 데이터 출력 이미지는 난해한 현대미술을 닮은 듯하다.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던가. ‘E=MC²’이라는 공식이 실제로 피카소가 사용한 붓에 영향을 주었을까? 글쎄다. 문명의 최정점인 CERN이 예술에 바라는 희망은, 오직 예술과 과학의 상호관계와 충돌(Collide)에서 오는 공통적 지점을 발견하는 것이리라. 마치 유령 같은 힉스입자를 발견하듯이 말이다.
“과학과 예술의 궁극적 목표는 같다”
아리안 코엑 ARTS@CERN 디렉터
CERN이라는 장소의 어떤 성격이 아트레지던시를 운영하게끔 만들었는가?
잘 알려졌듯이 CERN은 현재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가장 뜨거운 장소다. 이런 장소에 작가들이 있다면, 그들의 영감을 증폭시킬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과학과 예술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나는 ARTS@CERN을 ‘상상의 실험실’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여타 연구기관의 아트레지선시와 달리 과학을 설명하기위해 예술을 사용하지 않는다. 둘은 하나의 이상향을 목적으로 등가적 발전을 이룩해간다. 과학과 예술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인간이라는 가설을 증명하려 한다.
작가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 꼭 디지털아트와 연계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모든 예술가를 환영한다. 무용, 건축, 디자인, 문학, 각종 공연 등 모든 장르의 예술가가 레지던시에 참여할 수 있다. 단 하나 조건이 있다면, 작품이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미학적 완성도, 독창성 등의 기준이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작품을 보여주는 기술적 방식과 과정과 결과의 완성도이다. 이는 자신의 작업과 과학적 기술을 잘 활용하거나 이해하고 있으면 된다. 또 그렇다고 기술만 추구하는 건 취지와 부합되지 않는다.
ARTS@CERN 작가들과 Collide@CERN Prize 수상자에게는 어떤 기회가 주어지는가?
세계최고의 과학자와 기술자들, 또 큐레이터들의 적극적인 협력, 그리고 연구소 금방에 ‘실험실’이 주어진다. 작가들이 레지던시에 하는 요청은 대부분 이루어지는데, 그들은 우리의 지원에 놀라움을 숨기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약 3개월간의 숙식과 여행, 작품제작비를 CERN에서 지원하며 원할 경우 1년간 머물게 한다. 작가가 구상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결과를 전 세계에 선보이는 공식 전시나 공연 기회를 마련한다. 우리는 누구도 상상의 실험실에 들어오는 걸 막지 않는다. 한국에 좋은 작가가 있으면 소개해달라!
준비 중인 프로젝트는 어떤 게 있는가?
다양하다. 이번 아트레지던시 선정작가인 빌 폰타나(Bil Fontana, 사운드아티스트)의 전시와 세계에서 가장 큰 디지털아트 페스티벌인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의 내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또 Centre D'Art Contemporain in Geneva의 디렉터 안드레아 벨리니(Andrea Bellini)와 협업해 새로운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다. Collide@CERN Prize의 수상작가 줄리어스 폰 비스마르크와 안무가 줄스 조빈, CERN의 물리학자 제임스 웰스 박사가 함께한 ‘빛’을 주제로 한 프로젝트가 준비 중이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아마 몇 년 사이 가장 매력적인 결과물을 선보일 것으로 기대된다. 애초의 설립의도대로 작가와 작가, 작가와 과학자 사이의 협업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