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14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 ‘제12회 송은미술대상’展이 열리고 있다. 송은미술대상은 (재)송은문화재단이 재능 있는 젊은 미술작가들을 육성하기 위해 제정한 상으로 올해 대상에는 설치미술과 최선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송은문화재단은 총 572명이 지원한 이번 대상전에서 대상 최선 작가 외에 우수상 백정기, 윤보현, 하태범 등 4인의 최종 수상자를 배출했다. 국제적 미술 흐름에 대응하고, 자기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성공적으로 개시하고 있다는 평을 받은 수상자들의 작품은 2월 28일까지 송은미술대상展을 통해 만나 볼 수 있다.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자료제공 | 송은 아트스페이스
대상 | 최선
전시장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흰 그림’. 언뜻 아무것도 없는 순수한 장면처럼 보이는 이 작품의 실체는 ‘돼지의 기름’이다. 매우 얇은 유산지에 온통 돼지에서 추출한 기름을 발라놓은 작품으로, 다가서는 관객들의 체온에 따라 온도가 상승하면 기름은 서서히 녹아 공백으로 남겨진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관객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흰 그림’의 순수함은 차츰 빛을 잃는다. 최선 작가는 돼지의 기름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것은 ‘구제역 살처분’이라는 어두운 현실의 투영이다. 그리고 보여지는 또 한 점의 ‘흰 그림’. 이번에는 불산 가스 누출사고가 발생한 구미의 대기로부터 불화수소산을 흰 천으로 채취한 무색무취의 회화 작업이다. ‘흰 그림’ 너머 메자닌에 설치된 최선 작가의 다른 작품인 ‘자홍색 족자’ 역시 끔찍했던 현실을 담고 있다. 멀리서 보면 분홍색의 평면회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구제역으로 생매장된 350만 마리의 돼지를 도살할 때 돼지 피부에 찍은 수성염료와 유사한 색의 잉크로 출력된 회화인 것. 이렇듯 최선은 미술이라는 예술의 양식을 빌려 현실의 추함을 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예술의 본질과 이에 대한 우리의 통념이 갖는 이분법적 경계의 모호함에 의문을 던지는 것으로 아름다움과 추함을 비롯해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우수상 | 백정기
백정기가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Is of : Mt. Seorak in Autumn’은 이미지로 재현되는 대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작품이 담고 있는 설악산의 풍경이 잉크가 아닌 작가가 직접 설악산에 가서 수집한 단풍잎에서 추출된 색소로 인쇄된 것이다. 일반 잉크로 출력된 것에 비해 색감이나 선명도는 떨어지지만, 이미지가 실제 현장의 단풍잎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재현대상과 이미지간의 실질적인 동질성이 형성되는 작품이다. 특히 단풍잎 잉크는 공기와 햇빛에 노출될 시 색이 바래지는데, 이 역시 재현의 대상이 되는 ‘단풍이 든 설악산’, 즉 자연의 근본적인 속성과도 일치한다. 단풍잎 색소를 추출하는 분쇄기와 농축기 등의 기자재는 작가 스스로 구성한 장비들로, 획일적인 제조과정과 달리 추출 대상에 따라 새롭게 제작되어야 하는 개별성을 갖게 된다.
우수상 | 윤보현
윤보현은 유리 매체의 비가시적인 속성인 투명함, 굴절, 왜곡과 같은 특성을 탐구하고 이를 가시화한다. ‘Glass Helmet’은 통상적으로 입거나 머리에 쓸 수 없다는 개념을 가진 유리를 보철과 같이 인체에 착용하고 물과 유리의 상호작용을 고찰한 작품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 작품은 외국에서 소통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언어가 아닌 다른 매개체로 타인과 소통하려는 생각에서 발전되었다고 한다. ‘Glass Tube’는 유리관 한 쪽에 있는 철망을 가열시켜 발생된 공기압력의 차로 인해 소리가 나는 작품으로, 서로 다른 모양의 관을 움직이는 일련의 자세에 따라 소리의 높낮이가 달라진다. 여기서 소리를 내는 과정은 삶의 고뇌로 경직된 현대인의 모십이 악기로 연주하듯이 경쾌하게 전환되는 과정을 상정한다. ‘Glass Trumpet’은 에도(江戶)시대 화가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의 작품 나팔을 부는 여자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얇은 유리 표면이 수축과 팽창됨으로써 소리가 나는 옛 장난감을 재현했으며 무작위적인 소리와 이미지 굴절을 통해 소통의 한계와 왜곡의 측면을 투사한다. 작가는 유리 특유의 속성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소리와 그림자를 통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이면의 실체와 소통의 영역을 제시한다.
우수상 | 하태범
하태범은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실제 사건, 사고 뉴스의 보도 이미지에 주목한다. 그가 재현한 이미지들은 지진, 쓰나미와 같은 자연 재해나 전쟁, 테러 등 정치적인 이슈에 이르기까지 삶과 터전이 무기력하게 짓밟히는 참혹한 현장으로 보도를 통해 이미 나온 모습들을 재구성한 것이다. 재현 방식은 실제 보도사진의 모습 그대로 모형을 제작하여 사진 촬영하는 ‘Actuality’ 접근과 실제를 바탕으로 하되 자신의 주관적인 사고를 개입하여 모형에 반영해 작업을 하는 ‘Imagination’ 접근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의 모형은 현장 잔해의 세밀한 부분까지도 사실적으로 재현되는데,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인물이나 혈흔, 또는 그을림의 흔적은 삭제된 채 백색의 모노톤으로 표현된다. 이는 보도 이미지를 기계적으로 소비하는 현대인의 희석된 시선과 냉소적인 감성을 담고 있는 것으로 전시에서는 ‘White’시리즈로 선보여진다. 그의 이런 방관적인 태도는 영상작업 ‘Playing War Games’에서 더욱 극대화 된다. 전쟁을 게임의 소재로 삼고 파괴로부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인간의 쾌감을 다룬 작품으로 건물 모형들이 비비탄총에 의해 소음과 함께 파괴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미지 과잉의 시대, 하태범은 점차 무미건조해가는 우리의 시선을 탈색된 현실의 이미지를 통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