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영웅을 필요로 할 때, 누군가는 영웅이 된다. 15년 전 우리 사회가 그랬다. IMF 사태로 실의에 빠진 우리에겐 누군가가 필요했다. 딱히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일자리를 잃어야 했고, 빚쟁이가 되어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어 줄 누군가가. 그리고 먼 미국땅에서 강속구를 던지던 한 젊은 야구 선수는 시대의 고난을 분노가 아닌 위안으로 어루만져 주었다. 코리아 특급, 박찬호. 그가 던진 한 구 한 구는 희망의 메시지였고,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 불렀다.

7월 11일, 서울미술관은 그 때, 그 영웅의 모습을 다시 한번 불러낸다. 스포츠 영웅과 예술의 만남, ‘The Hero-우리 모두가 영웅이다' 展. 아침, 새벽 할 것 없이 국민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의 영웅, 박찬호의 모든 것이 이 자리에서 펼쳐진다. 전시는 11월 17일까지. .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자료제공 | 서울미술관(www.seoulmuseum.org)

스포츠스타의 미술관 입성. 이번 박찬호전은 조형예술과 스포츠스타의 야구인생의 접목이라는 이색 콘셉트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아티스트들의 손길로 다시 만져 지는 박찬호와 국내에서는 볼 수 있는 기회가 드문 스포츠 콜렉션. 언뜻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만남은 새로운 전시 장르의 개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시 구성은 두 가지로 나뉜다.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이 박찬호의 삶을 예술적으로 다시 그려낸 1부 ‘Perfect Game’과 인포그래픽, 체험존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박찬호를 보여주는 2부 ‘Park’s Gallery’다.

강익중, 권오상, 김태은, 뮌(MIOON), 송필, 유현미, 이배경, 이현세 등의 아티스들이 참여힌 ‘Perfect Game’은 ‘프롤로그', ‘신화의 탄생’, ‘꿈’, ‘마이웨이’, ‘고독’, ‘영웅의 탄생’, ‘우리 모두가 영웅이다’, ‘에필로그' 등 8개 테마로 다시 구성된다. 각 테마를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먼저 권오상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박찬호를 미켈란젤로 다비드상과 같은 포즈의 조각으로 가져다 놓는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비드와 박찬호를 영웅의 관점에서 동일시 한 작품이다. ‘신화의 탄생'에서는 김태은 작가의 영상 설치 작품을 통해 박찬호가 이룩한 업적이 재조명된다. 박찬호의 어린 시절은 ‘꿈' 테마에 담긴다. 100개의 에어모터와 그 위에서 부유하는 ‘Deam Cube’로 야구 선수로서의 꿈을 표현한 이배경 작가의 작품과 박대민 CF감독의 도움을 받아 박찬호가 자신의 조카와 함께 직접 제작한 어린 시절 재현 영상을 볼 수 있다.

유현미 작가가 메이저리거로서 걸어온 야구인생과 철학을 시각화 한 ‘마이웨이'는 박찬호가 얼굴과 옷에 물감을 칠하고 직접 모델이 된 초상화 작업이 흥미로운 테마다. 이 초상화는 사진처럼 보이지만 실제 박찬호가 움직이지 않은 상태로 비디오 촬영한 동영상이다. ‘고독'에서 박찬호는 수백 명의 관중으로 변하기도 한다. 마운드 위에서 겪었던 긴장, 흥분, 고독 같은 내적 갈등을 뮌(MIOON)작가가 영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영웅의 탄생'에서는 만화가 이현세가 박찬호를 모델로 제작한 단편 만화를 선보인다. 여기에 더해 박찬호 선수가 사용한 야구 용품과 그의 주특기인 커브볼을 재현한 작품도 함께 놓인다.

‘우리 모두가 영웅이다'는 박찬호로부터 위안을 받았던 우리 모두를 기념한다. 꿈을 주제로 수집된 아이들의 작은 회화들과 우리강산과 포석정을 형상화한 오브제 등 강익중 작가의 작품들과 박찬호 선수의 유니폼들이 걸린 거대한 샹들리에를 만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는 송필 작가의 작품으로 구성된다. 수백 개의 아크릴 조각이 모빌처럼 매달려 박찬호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2부 ‘Park’s Gallery’는 선수 박찬호를 다양한 방식을 빌려 담아낸 전시다. 박찬호가 구사했던 6가지 구종의 그립을 표현한 석고상과 엑스레이 필름, 물감이 들어 있는 컬러볼을 박찬호가 직접 던져 마치 액션페인팅처럼 그려낸 ‘투화(投花)’, 관람객들을 위한 인터랙티브 체험존, 글러브, 경기 티켓, 피규어, 결혼사진, 어록, 그리고 필라델피아 시절 얻은 내셔널리그 우승 반지도 함께 선보인다.

시간이 흐르고, 박찬호가 전해 준 희망의 메시지는 흐릿해진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마운드에 선 그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이제는 쉽지 않다. 박찬호 이후에도, 아니 그 이전에도 우리를 들뜨게 만들었던 스포츠 영웅은 많았다. 누가 더 위대하냐는 유치한 질문은 접어두고, 1998년 그 어느 시대보다 필요할 때 등장한 박찬호와 그의 패스트볼은 분명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영웅의 기억일 것이다.